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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6:24:03

빌헬름 그뢰너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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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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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파일:440px-Bundesarchiv_Bild_102-01049,_Wilhelm_Groener.jpg
이름 Karl Eduard Wilhelm Groener
카를 에두아르트 빌헬름 그뢰너
출생 1867년 11월 2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사망 1939년 5월 3일 (향년 71세)
독일국
복무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독일 제국군(1884년~1918년)
국가방위군(1918년~1919년)
최종 계급 중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백엽 푸르 르 메리트
소속 정당 무소속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일 혁명2.3. 정치인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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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그뢰너는 독일 제국군의 군인이자 독일의 정치인이다. 패전 후 잠시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으로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초기

그뢰너는 1867년, 뷔르템베르크 왕국에서 태어났다. 기초교육을 마친 1884년, 그뢰너는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1893년부터 1896년까지 베를린의 전쟁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뢰너는 대위의 계급으로 장군참모에 들어갔다. 이후 그뢰너는 철도 부서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철도 부서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슐리펜 계획이 더 잘 실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일 혁명

파일:Groener.jpg
군복을 입고 있는 그뢰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국경 전투에서 철도 부서는 병사들을 국경으로 보내는 것을 도와주었다. 1915년 그뢰너는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전투식량 부서를 신설하였다. 그뢰너는 루마니아로부터의 식량 배송을 담당하였다. 이후 1916년 중장이 되고, 프로이센의 전쟁부 소속인 육군성의 부장이 되었다. 이후 그 자리에서 계속 있었다. 그러다가 서부전선에서 처음 실전 경험을 쌓았다. 제25 예비 사단의 사령관이 되며 참호전의 분위기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보았다. 이후 폴란드에 주둔중이던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의 집단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다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최고 참모차장 자리에서 1918년 10월 26일 물러나자, 그뢰너는 독일 제국군의 최고 참모차장이 되었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언제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그뢰너는 군대를 전선에서 뺄 준비를 하였다. 이때 이미 그뢰너는 군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빌헬름 2세에게 퇴위를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뢰너는 독일제국이 항복할때, 독일제국군의 퇴각과 해산을 지휘하였다. 동시에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동의하였다. 이는 당시 타 프로이센의 장교들이나 전쟁장관, 발터 라인하르트의 의견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뢰너는 이후 힌덴부르크의 후임으로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한스 폰 젝트가 임명되었고, 국가방위군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그뢰너는 대통령이자 총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의 의견충돌로 해임당하였다.

2.3. 정치인으로서

그뢰너는 전역 후 입당을 하지는 않았지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부탁에 의해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그뢰너는 딱히 군국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방위군의 확대를 제외하고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를 지지하였다. 1928년 1월 28일 그뢰너는 비밀 국방기금 스캔들인 로만 스캔들을 이유로 사임한 오토 게슬러의 후임으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그는 당시 "국가 내의 국가"로서 문민통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국가방위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회복하고 당시 존립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을 장교단에 주지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1931년 10월에는 요제프 비르트가 사임하여 공석이 된 내무장관직을 권한대행으로서 승계하였다.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의 직을 동시에 수행하였던 이 시기부터 그는 정치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나치당과 공산당은 대통령과 내각 그리고 바이마르 헌법체제 자체를 비방하고 폭력적 정치투쟁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뢰너는 내무장관의 입장에서 이러한 정치적 극단주의 세력을 규제해야 했다. 반면 국방장관으로서는 국가방위군에 대해 초당파적 중립성을 요구하여야 했는데, 내무장관의 직무수행이 당시 군부에는 당파적인 행동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1932년 5월에 정점에 이르게 된다. 1932년 5월 초 그뢰너는 내무장관 권한대행으로서 돌격대의 금지를 명령하였고 며칠 뒤인 5월 10일 의회에서 이 명령에 대해 나치당 의원과 공방을 벌여가면서까지 돌격대 금지를 관철하려 하였다.[1] 하지만 돌격대를 재무장시 인적자원으로 유용하려 계획하던 국방부 사무처장(Chef des Ministeramts)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돌격대의 해산을 반대하였고 오히려 국가방위군 부대들과의 통합을 원하였다. 이때문에 슐라이어는 그뢰너에게 사실상 사임을 강요하였고 그는 5월 13일 국방장관의 직을 사임하였다. 내무장관 권한대행의 직도 제2차 브뤼닝 내각의 붕괴 직전인 5월 30일에 사임하였다.

공직을 모두 내려놓은 그는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고, 이 때문에 정치활동을 하기 전에 열심이었던 저술활동까지도 지장을 받았다. 그는 1934년 포츠담으로 이사간뒤 1939년 5월 3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언론은 그의 사망을 알고 있었지만 나치정부는 보도를 금지하였고, 국방군 장교들도 명령에 따라 그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당했다.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뢰너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군인은 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남작이 유일하였다고 한다.
[1] 이날 그뢰너와 나치당 의원의 공방은 녹음되어 지금도 들을 수 있다. 아래 링크의 1:18:00 즈음부터 돌격대 금지를 둘러싼 그뢰너와 나치당 의원들의 공방이 시작된다. https://www.swr.de/swr2/wissen/archivradio/reichswehrminister-wilhelm-groener-rechtfertig-das-sa-verbot-1932-reichstag-vor-hitler-100.html?fbclid=IwAR0t4vhl77UN7ju4Fvqxj7HCiuNPjdmp5tjuiOFBOrZLnXBLDCHkVIdV0x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