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바이마르 공화국 방위장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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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질적으로 전쟁장관이었다. | }}}}}}}}} |
<colbgcolor=#000><colcolor=#fff> 바이마르 공화국 제3대 방위장관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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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Karl Eduard Wilhelm Groener 카를 에두아르트 빌헬름 그뢰너 | ||
출생 | 1867년 11월 2일 | ||
뷔르템베르크 루트비히스부르크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현 루트비히스부르크군 루트비히스부르크) | |||
사망 | 1939년 5월 3일 (향년 71세) | ||
독일국 브란덴부르크 포츠담 보른시테트 (現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포츠담 보른시테트) | |||
재임기간 | 제3대 교통장관 | ||
1920년 6월 25일 ~ 1923년 8월 12일 | |||
제3대 방위장관 | |||
1928년 1월 19일 ~ 1932년 5월 30일 | |||
제14대 내무장관 | |||
1931년 10월 9일 ~ 1932년 5월 3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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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 1918년 | |||
국가방위군 육군 | |||
1918년 ~ 1919년 | |||
최종 계급 | 중장 (국가방위군 육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백엽 푸르 르 메리트 | ||
소속 정당 | }}}}}}}}} |
1. 개요
빌헬름 그뢰너는 독일 제국군의 군인이자 독일의 정치인이다. 패전 후 잠시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으로 역임하였다.2. 생애
2.1. 초기
그뢰너는 1867년, 뷔르템베르크 왕국에서 태어났다. 기초교육을 마친 1884년, 그뢰너는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1893년부터 1896년까지 베를린의 전쟁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뢰너는 대위의 계급으로 일반참모에 들어갔다. 이후 그뢰너는 철도 부서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철도 부서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슐리펜 계획이 더 잘 실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2.2.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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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을 입고 있는 그뢰너 |
2.3. 정치인으로서
그뢰너는 전역 후 입당을 하지는 않았지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부탁에 의해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그뢰너는 딱히 군국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방위군의 확대를 제외하고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를 지지하였다. 1928년 1월 28일 그뢰너는 비밀 국방기금 스캔들인 로만 스캔들을 이유로 사임한 오토 게슬러의 후임으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그는 당시 "국가 내의 국가"로서 문민통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국가방위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회복하고 당시 존립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을 장교단에 주지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1931년 10월에는 요제프 비르트가 사임하여 공석이 된 내무장관직을 권한대행으로서 승계하였다.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의 직을 동시에 수행하였던 이 시기부터 그는 정치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나치당과 공산당은 대통령과 내각 그리고 바이마르 헌법체제 자체를 비방하고 폭력적 정치투쟁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뢰너는 내무장관의 입장에서 이러한 정치적 극단주의 세력을 규제해야 했다. 반면 국방장관으로서는 국가방위군에 대해 초당파적 중립성을 요구하여야 했는데, 내무장관의 직무수행이 당시 군부에는 당파적인 행동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1932년 5월에 정점에 이르게 된다. 1932년 5월 초 그뢰너는 내무장관 권한대행으로서 돌격대의 금지를 명령하였고 며칠 뒤인 5월 10일 의회에서 이 명령에 대해 나치당 의원과 공방을 벌여가면서까지 돌격대 금지를 관철하려 하였다.[1] 하지만 돌격대를 재무장시 인적자원으로 유용하려 계획하던 국방부 사무처장(Chef des Ministeramts)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돌격대의 해산을 반대하였고 오히려 국가방위군 부대들과의 통합을 원하였다. 이때문에 슐라이어는 그뢰너에게 사실상 사임을 강요하였고 그는 5월 13일 국방장관의 직을 사임하였다. 내무장관 권한대행의 직도 제2차 브뤼닝 내각의 붕괴 직전인 5월 30일에 사임하였다.공직을 모두 내려놓은 그는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고, 이 때문에 정치활동을 하기 전에 열심이었던 저술활동까지도 지장을 받았다. 그는 1934년 포츠담으로 이사간뒤 1939년 5월 3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언론은 그의 사망을 알고 있었지만 나치정부는 보도를 금지하였고, 국방군 장교들도 명령에 따라 그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당했다.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뢰너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군인은 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남작이 유일하였다고 한다.
3. 둘러보기
[1] 이날 그뢰너와 나치당 의원의 공방은 녹음되어 지금도 들을 수 있다. 아래 링크의 1:18:00 즈음부터 돌격대 금지를 둘러싼 그뢰너와 나치당 의원들의 공방이 시작된다. https://www.swr.de/swr2/wissen/archivradio/reichswehrminister-wilhelm-groener-rechtfertig-das-sa-verbot-1932-reichstag-vor-hitler-100.html?fbclid=IwAR0t4vhl77UN7ju4Fvqxj7HCiuNPjdmp5tjuiOFBOrZLnXBLDCHkVIdV0x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