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상급대장 펠릭스 폰 보트머 백작 Felix Graf von Bothmer | |
이름 | Felix Ludwig Graf von Bothmer 펠릭스 루트비히 폰 보트머 백작[1] |
출생 | 1852년 12월 10일 바이에른 왕국 뮌헨 |
사망 | 1937년 3월 18일 (향년 85세) 독일국 뮌헨 |
복무 | 독일 제국군(1871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상급대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대 막스 요제프 훈장 백엽 푸르 르 메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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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군의 장성으로 최종계급은 상급대장. 왕립 바이에른 예비군단, 남부집단군과 19군을 지휘하였다.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852년 12월 10일, 보트머는 뮌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막스 폰 보트머 백작은 바이에른 왕국군의 참모총장이었다.[2]1871년에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하였고, 제 14보병연대에 소위로 배치되었다. 1875년부터 1878년까지 바이에른 전쟁 대학에서 공부한후, 장군참모를 밟기 시작하였다. 보트머는 참모장교가 되어 대대 부관으로 지냈다. 1882년, 보트머는 중위로 진급하였고, 참모장교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이후 1885년, 보트머는 보병연대의 부관이 되었고, 1888년, 그는 대위가 되었다. 1890년 4월 24일 그는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제2군단의 총참모부로, 1891년 4월 25일에는 총참모본부로 배치되었다. 1900년,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1901년에는 왕의 시중 중 하나로 뽑혔다. 1901년 8월 4일에는 보병 소총 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903년 5월 18일, 보트머는 소장이 되면서, 그의 연대를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크레스 폰 크레센슈타인 장군에게 넘겼다. 제2 보병여단을 지휘하였으며, 이후 중장으로의 진급과 함께 인명 구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10년 5월 4일, 보트머는 보병대장이 되었다. 바이에른 왕국에서도 좋은 장군으로 평가받았는지, 퍼레이드 중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 루트비히 3세의 오른쪽에 선 사진이 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915년의 보트머 |
그 공로로 독일의 신문사 Die Woche도 그의 공적을 기사로 활용할 정도였다.
▲당시 Die Woche의 기사
이후 알렉산더 폰 린징겐의 후임으로 남부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1916년 계속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장군의 공세에 굳건히 건뎠다. 보트머는 계속 승리를 이끌었지만, 동부전선의 전황은 절대 좋지 않았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그런 보트머를 칭찬하였다. 하지만,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보트머의 군대는 활약을 하지 못하고, 수적인 문제로 러시아군에게 졌다. 하지만 그는 1917년 7월 25일 동부 전선에 대한 독일 하계 공세 동안 브레자니 시 주변 전투에서 뛰어난 지도력과 조직력을 인정받았고, 즈브루츠 교두보 전투에서 뛰어난 지도력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백엽 푸르 르 메리트와 대 막스 요제프 훈장을 수상했다. 이후 케렌스키 공세를 잘 막아냈다. 도히려 반격을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918년 2월 8일, 보트머는 새로이 편성된 19군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동부전선의 끝을 알리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4월 9일에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1918년 12월 독일군 육군 최고 사령부가 헤채되자 보트머는 전역하였다.
2.3. 패전 후
보트머는 나치 집권에 딱히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37년 그의 고향 뮌헨에서 사망하였다. 보트머의 장례식은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국장으로 진행되었는데, 정작 그의 가족들은 국장을 원하지 않았다.3. 가족
보트머의 아버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장군이었으며, 그는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4. 계급
소위: 1871년 11월 28일중위: 1882년 11월 23일
대위: 1888년 10월 31일
소령: 1893년 9월 22일
중령: 1897년 3월 17일
대령: 1900년 7월 21일
소장: 1903년 5월 18일
중장: 1905년 9월 15일
보병대장: 1910년 5월 4일
상급대장: 1918년 4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