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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6: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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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3. 기념일 및 절기4. 축일5. 생일
5.1. 실존 인물5.2. 가상 인물
6. 기일
6.1. 실존 인물6.2. 가상 인물

1. 개요

1년의 77번째(윤년의 경우 78번째) 날에 해당한다.

2. 사건

3. 기념일 및 절기

4. 축일

5. 생일

5.1. 실존 인물

5.2. 가상 인물

6. 기일

6.1. 실존 인물

6.2. 가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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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수도 금성에 반란을 보고하자, 헌덕왕은 최웅과 영충에게 관직을 하사한 후 장웅(張雄)을 선발대로, 위공(衛恭)·제릉(悌凌)은 그 뒤를 잇게 하고, 김균정·김웅원(金雄元)·김우징 등이 삼군을 통솔하게 하였다.[2] 김충공과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종군을 청하기에 명기는 낭도들과 황산(黃山)으로,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가게 했다. 이에 김헌창은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한 후 삼년산성과 속리산에서, 김균정은 성산(星山)에서 김헌창의 군대를 격파한 뒤 모두 웅진성으로 진격하였다. 사세는 기울어 포위 공격 열흘 만에 김헌창은 자살하고 부하들이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 성이 함락되어 김헌창의 시체는 또 베어지고, 일가와 수뇌급 239명은 주륙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녹진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에 속한 굴자군은 지리적으로 장안국과 가까웠으나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825년 정월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주에서 재차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사하였다.[3] 예루살렘의 키릴로스[4] ?~[5] 가수 이특의 누나.[6] 음력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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