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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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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잠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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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잠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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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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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金憲昌之 亂
<colbgcolor=#4a2d5b,#0e0f37><colcolor=#fbe673> 시기 822년 (헌덕왕 14년) 3월 ~ 4월
장소

웅천주,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및 그 인접 지역
금관소경[1]
원인 김헌창 가문의 왕위 쟁탈전 패배와 지방 좌천
교전 세력 <rowcolor=black> 통일 신라
(진압군)
장안국
(반란군)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헌덕왕 (신라 태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균정 (이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웅원 (잡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위공 ((衛恭) 잡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녹진 ((祿眞),아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우징 (대아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향영 ((向榮), 청주 도독)[2]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최웅 ((崔雄), 완산주 장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영충 (令忠)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장웅 ((張雄), 일길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제릉 ((悌凌), 파진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충공 ((忠恭), 각간)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잡윤응((允膺), 잡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명기 ((明基), 화랑)[3]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안락 ((安樂), 화랑)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헌창 (웅천주 도독)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범문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방어군 궤멸
결과 진압군의 승리
- 전국규모 반란의 신속한 제압
- 후속 반란 김범문의 난 조기 진압
영향 장안국 붕괴
- 서라벌 중심 방어 체제 구축 시작

1. 개요2. 배경: 혼돈 속의 신라 왕위쟁탈전3. 난을 일으키다4. 전개 과정5. 그 후6. 역대 장안국왕

[clearfix]

1. 개요

822년 3월 18일, 웅천주 도독으로 재임 중이던 신라 진골 귀족 김헌창이 일으킨 난.

신라 조정에 단지 반기만 든 게 아니라 국호를 장안국, 연호를 경운으로 정해 일으킨 대규모 반란 사건이다. 나당전쟁 이후로 큰 전란이 별로 없었던 통일신라 시기에 있었던 가장 큰 내전이었다.

2. 배경: 혼돈 속의 신라 왕위쟁탈전

혜공왕 16년(780) 2월,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자(김지정의 난) 같은 해 4월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등이 힘을 합쳐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나중에 사망한 혜공왕을 이어 내물왕 10대손인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는 혜공왕이 김지정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최근 학계에서도 그렇게 파악한다.

이로써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태종 무열왕계의 왕위 세습이 단절되며, 이때부터 신라 중대가 끝나고 내물왕 계통 하대가 시작되는 걸로 본다.

785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라 화백회의 전통에 따라 차기 왕을 가리는 귀족회의가 열린다. 여기에서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金周元, 태종 무열왕 5대 손)을 차기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회의 당시 김주원은 서라벌 북쪽에 거주했던 관계로 폭우로 갑자기 불어난 알천(오늘날의 북천)을 건너지 못해 궁궐에 당도하지 못한다. 이에 귀족들은 때마침 내린 비를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 여겨 선덕왕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당시 상대등 김경신(내물왕 12대 손)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바로 38대 원성왕이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785)##

그러나 강물에 관련된 이야기는 왕위쟁탈전에서 김경신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뒤 자신의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김경신이 사람들을 위협하여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물】신라 김주원은 태종왕의 손자다. 원래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왕위 계승 싸움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원성왕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꼈던지 서라벌 정계를 떠나 본인의 장원(莊園)과 친족 세력이 있는 명주(오늘날의 강릉시)지방으로 물러나게 되고 원성왕 2년(786)에는 원성왕이 그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였다. 후에 김주원은 강릉 김씨시조가 된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원성왕이 죽고 손자 김준옹(金俊邕)이 소성왕으로 즉위하였으나 1년 반 만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김중희(金重熙)가 애장왕으로 뒤를 이었으나 어린 왕의 섭정이자 숙부인 김언승(金彦昇)과 이찬 김제옹 그리고 언승의 아우 김수종이 일으킨 반란으로 시해당한 후 김언승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809), 이가 곧 신라 41대 헌덕왕이다.

3. 난을 일으키다

한편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도 중앙 정계에 남아 활약했다. 무열왕계 귀족들이 비록 왕위는 놓쳤지만 신라의 영웅이던 무열왕문무왕의 적통으로서 가진 권위와 쌓아올린 권력은 여전히 무시못할 정도였다. 무열왕과 문무왕은 신라 오묘(종묘)에서도 불천위로 지정되어 있었고 하대 왕들도 이를 부정하지 못했다.[4] 때문에 무열왕계의 대표 정치인이 된 김헌창은 애장왕 8년(807)에는 집사부 시중(오늘날의 국무총리급)으로 임명되는 등 당시 상대등이였던 김언승 다음가는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809년, 김언승이 조카를 죽이고 헌덕왕으로 즉위하자 중앙 요직은 헌덕왕의 친인척이 장악했지만, 김헌창과 그 일족이 완전히 정계에서 밀려나진 않았다. 김헌창은 무진주(광주광역시) 도독(신라 지방 각 주를 관할하는 최고 벼슬로, 주치에 부임해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행정권, 사법권, 징병권 등을 행사), 청주(경상남도 진주시) 도독, 웅천주(충청남도 공주시) 도독 같은 지방직을 전전했지만, 무진주 도독을 역임한 후엔 중앙 정계에서 시중으로 17개월 동안 재임했고 무진주 도독 이전에도 딱히 푸대접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상대적으로 그전만 못하게 되었다면 말은 되지만 이런 이력은 분명한 우대였다. 이 때문에 822년도 3월에 김헌창이 뜬금없이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건, 신라 왕실은 물론이고 무열왕계 일족에게도 대단히 황당한 사태였을 개연성이 높다.
웅천주 도독 헌창이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함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하였으나,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것은 김주원이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난지 무려 37년(!) 후로 원성왕 이후 세 번이나 왕이 바뀐 뒤니 아버지의 왕위를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는 것은 좀 말이 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내물왕계로 왕위가 넘어간 뒤에도 그 아래에서 한동안 시중 등 중앙 요직에서 정치를 했으니 적극적으로 내물왕계 반대활동을 했다기에는 모양이 살지 않는다. 그리고 정작 김헌창 본인 또한 김주원이 설사 왕이 된다 하여도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으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적다.

그러므로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본인의 권력욕과 야심이 전부였던 걸로 보인다. 게다가 정작 왕 자리를 놓치고 명주에 갔던 김주원 세력(김주원 본인이나 김헌창의 형)은 정작 이 명분의 당사자인데도 김헌창의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권력욕과 야심이 분리주의라는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던 옛 백제 지역 민심의 이반은 부인하기 어렵다. 김헌창의 난으로 잠깐 구현된 부활한 백제의 판도 및 옛 고구려 영역이었던 북부 3주의 기이한 동향을 보면, 이것이 훗날 후삼국시대의 전조임은 부정하기 매우 어렵다.
파일:external/www.ilbe.com/573364ea2d66990ae849d97c53f43070.png
김헌창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정한다. 신라는 진덕여왕 때부터는 당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독자적 연호를 만든다는 것은 당나라에 대한 사대를 배격한다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비슷한 의미로 연호를 선포한 반란 시도로 묘청의 난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신라 9주 5소경5주(웅천, 무진, 완산, 청주, 사벌)의 도독, 3경(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의 사신들, 그리고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김헌창의 포섭 시도에 호응해 반란에 가담했다. 이 영역은 80여 년 뒤 등장할 후백제 전성기 때와 비슷하거나 약간 작다.[5]

특이한 점은 본인이 신라 무열왕계 왕족임에도 신라왕을 폐위하고 본인이 국왕이 되는 게 아니라 옛 백제 지역에서 자신의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 목표였고 나라 이름을 장안국이라고 했다. 당시 김헌창이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옛 백제 백성들의 민심을 알았고 이를 역이용하여 분리주의 성격 반란을 일으킨 것이며, 이는 바로 어떤 의미에선 궁예와 견훤이 일으킬 후삼국시대의 프리퀄 격이었다.

80년 뒤에 등장하는 궁예견훤도 그 자신은 삼국시대부터 쭉 신라였던 지역 출신이었지만[6] 옛 삼국 유민의식이 본인들의 거병에 도움이 되니까 명분으로 이용했듯이 김헌창도 그랬던 것인데, 이게 가능했던 건 무열왕계 왕실이 백제계 유민들의 민심을 꾸준히 회유하려 노력했고, 김헌창 자신이 그런 인연을 강조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열왕계 왕실은 백제 불교의 전통을 존중했고, 백제 왕실에서 지내던 산천제사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계승해서 국가예산 들여 지내는 수고도 감수했는데 이는 무열왕계 왕실이 백제 유민의 인심을 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김헌창의 난이 백제부흥운동과 연관될 만한 직접적 근거는 정황상 공주에서 시작했다는 지역적 근거 외에도 여럿 있어 단순 가설로 치부될 견해가 아니다. 신라사에서 최초로 아예 분리된 국가를 세우려 한 시도는 이 김헌창의 난이 최초며, 판도와 돌아가는 판세는 훗날 후삼국 시대와 궁예의 활동 및 침미다례 일대의 반광주 지역 정서로 인한 변수 외에는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항은 황선영 저 나말여초제도사(국학자료원 발간)에서 다룬 바 있다. 충남연사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백제 유민편 또한 참조.

한편 문제의 추풍령 일대도 빠짐 없이 장악한 것도 후백제의 정확한 프리퀄. 김헌창의 이 장안국은 후백제와는 달리 죽령 일대도 판도에 넣고 있어 대(對) 신라 전 상황에선 견훤보다도 훨씬 유리했다.

4. 전개 과정

822년 3월, 김헌창은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4개 주 도독(+자신의 관할인 웅천주 1주)과 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의 사신,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해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 그러나 반란 초기에 청주(경상남도 진주시)도독 향영(向營)이 배신하여 추화군(밀양시)으로 달아나 반란을 알렸고, 신라 북쪽의 한산주, 패강진, 수약주, 북원소경, 하서주나 수도 서라벌과 가장 가까운 삽량주 등은 김헌창의 반란을 미리 알았고 가담하지 않고 스스로 성을 수비했다. 대체로 통일 전 기준으로 옛 백제와 가야 지역 주들이 김헌창에 가담했다가 가야 지역 주는 재빨리 먼저 이탈해버렸고, 옛 고구려 지역 주들은 김헌창에게 가담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신라 조정에게 협조하지도 않는 애매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는 훗날의 후삼국 시대 전개를 거의 압축해서 보여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후삼국 시대 초반 판세 기준으로 옛 침미다례 일대와 옛 목지국 일대가 이탈하면서 웅천주 절반 정도를 잃으면서 백제부흥운동에서 이탈한 반면 옛 가야 일대는 신라 왕실에게 충성했고,[7] 옛 고구려 지역 주를 기반으로 건국된 태봉의 태도가 대단히 비이성적인 반신라 일변도였다는 건데, 이 차이는 전부 궁예라는 걸물의 성향에서 나온 특징이었다는 걸 주의해야 한다. 즉 신라를 극도로 증오한 궁예라는 인물의 기이한 개성을 제외하면 나타날 통일신라의 가능한 분열상을, 정확히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18일에 완산주 장사 최웅과 주조(州助) 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라벌로 도망와 반란을 보고했다. 헌덕왕은 곧바로 최웅을 급찬 겸 속함군 태수직을, 영충을 급찬으로 임명하고 장군 8명을 뽑아 서라벌의 8방을 지키게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을 선발로 잡찬 위공, 파진찬 제릉 등이 차례로 군사를 출발하면서 이찬 김균정, 잡찬 김웅원, 대아찬 김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각간 충공, 잡찬 윤응이 문화를 지키고 화랑 명기, 안락 등이 여러 낭도를 이끌고 신라에서 파견한 토벌군에 종군을 요청해 명기는 황산,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향했다.

하지만 여기서 신라 왕실에겐 대단한 행운이 찾아왔다. 김헌창의 후배 격인 훗날의 견훤은 그 차지한 지역을 기회만 되면 직접 순행하면서 포섭한 지역의 향방을 재확인하고, 각종 제도를 손질하며 군제도 직접 손보면서 기회만 되면 다른 지역으로 군사 행동을 감행하여 공격적 행동으로 신생 국가에 활력을 불어넣은 반면, 김헌창은 정치적 술수는 꽤 뛰어났는지 많은 지역은 손아귀에 넣었으나, 군사적 재능은 영 아니었는지 그 이후론 신라 왕실이 진압군을 파견하기 전까지 대단히 안이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김헌창의 군대는 장수를 보내 주요 도로를 미리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지만 대단히 다급하게 되는대로 보낸 거나 마찬가지라 신라군과 맞서 싸우는 게 제대로 될리 없었다. 한편 신라군은 세력 있는 귀족들이 모두 모여 단합해 일종의 올스타 군대를 이뤘으니 안이한 김헌창의 군사들이 이에 제대로 대적할 순 없었다. 신라군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둬 장웅이 도동 고개에서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위공, 제릉이 장웅과 연합해 보은군 삼년산성을 함락한다.

삼년산성 함락 후 속리산으로 진군해 격파했고, 김균정이 성산에서 승리를 거두고 신라의 여러 군대가 김헌창의 본거지격인 웅진성에 집결해, 크게 싸우면서 장안국의 병사를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김헌창은 간신히 몸을 피해 웅진성에 들어가서 저항했으나, 신라군이 성을 포위해 10일 만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 그 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묻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김헌창이 자결하자 김헌창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지만, 웅진성을 함락한 신라 중앙군은 반역자 김헌창의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다시 부관참시했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은 처형되었다. 다만 반군의 병사가 된 백성들은 처벌하지 않고 놓아주었다.

반란을 토벌한 귀족들에게는 전공을 논해 관직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는데, 아찬 녹진이 대아찬에 임명되었지만, 녹진이 이를 사양했다고 하고, 삽량주(양주) 굴자군(후의 의안군, 현 창원시)은 김헌창에 가담한 지역과 가까이 있었음에도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기에 상으로 7년 동안 조세가 면제되었다.

한편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과 큰아들 김종기, 셋째 김신 등은 당시 반란과 멀리 떨어진 하서주(명주, 현 강릉시 일대)에 기거하고 있었고, 반란이 별로 가능성이 없다 생각했는지 일단 기록상으로는 전혀 호응하지 않았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아들놈의 반란에 호응하려 해도 하서주와 웅천주 사이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수약주와 한산주가 끼어 있어 서로 연계되기도 어려웠고, 김주원 본인도 서라벌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중앙 기득권을 잃고 하서주로 물러난 판에 어설프게 아들놈의 반란에 함께 움직였다가 그나마 남은 영향력 상실은 물론 가문 자체가 멸족되는 모험은 걸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신라 중앙정부에서도 연좌제에 민감했던 고대 왕조국가답지 않게 김주원 가문을 특별히 제재하진 않았다. 당시 진골들은 인맥으로 워낙 엮여 있어서 철저한 연좌제를 적용시키는 것도 무리였었던 데다가, 만약 김주원 가문을 연좌제로 엮어 제거하려 했다면 김헌창의 노림수대로 하서주 또한 장안국 반란에 합세했을 것이니 반란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졌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알아서 가만히 있는 김주원까지 굳이 자극해서 판을 키우려 하지 않은 것이다.

김주원의 자손들은 후에 하서주를 기반으로 해서 후삼국시대호족(豪族)으로 성장했는지 하서주의 호족으로 김예가 등장한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웅천주에서 도망하여 한산주의 산적 세력에 의탁한다. 김헌창의 부하인 승려 수신(壽神)이 산적들의 두목이었다. 그래서 김헌창의 난에 산적들이 많이 가담했다. 수신은 김헌창의 충신으로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웅진성이 함락될 때 김범문을 대피시켰다. 나중에 김범문과 같이 반란을 일으키다 전사한다.

그리고 3년 뒤인 825년(헌덕왕 17년) 고달산(현 고래산(여주와 양평 사이))에서 수신의 산적 무리 100여 명과 함께 재차 난을 일으켜, 남평양에 도읍하기 위해 공격하였다. 이곳은 한산주 북한산군의 별칭으로 후의 한양군.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대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실패하여 한산주도독 김총명에게 잡혀 죽었다. 김헌창, 김범문 부자의 연이은 반란으로 인해 무열왕계는 6두품으로 강등당해(족강일등) 왕위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김헌창의 난의 규모를 보면 훗날의 후백제에 맞먹는 규모인데도 신라 중앙군이 이를 단기간에 평정하고, 한산주 등 수도에서 거리가 먼 지방의 관리들도 중앙군에 적극 협조할 정도로 9세기 초반의 신라는 9세기 후반과 달리 강력한 지방 통제력을 가진 건실한 체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후 신라 왕실은 김헌창 같은 자가 또 난을 일으킬 경우를 대비해 온갖 조치를 하기 시작했다. 신라 왕실은 김헌창이 만약 서라벌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려 하였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결코 모르지 않았으며, 특히 북부 세 개 주가 남부 주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도 왕실을 적극적으로 비호하지 않는 등 불온한 분위기를 풍긴 것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헌덕왕과 그 이후 임금들은 진골 우위 관료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주로 문화행정적 기능에 치우친 5소경에 군사적 기능을 부여하는 한편 서라벌을 중심으로 군사적 특수 기능을 하는 부(府)들을 추가로 설치하여, 이중으로 종심 방어 체제를 구축하여 김헌창 같은 자가 나타나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더라도, 적어도 진흥왕 이전 옛 신라 영토는 수호할 수 있는 체제는 만들어 놓았다.[8]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후삼국시대 신라가 장안국과는 군사 역량이 비교가 안 되는 견훤의 후백제를 상대로 26년 동안이나 버티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6. 역대 장안국왕

대수 시호 별호 연호 재위기간
1 - 장안국왕(長安國王) 김헌창(金憲昌) 경운(慶雲)  822년
- - - 김범문(金梵文) - 825년

[1] 금관소경에 인접한 굴자군(창원시) 등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아 현 김해 지역은 장안국 반란군의 월경지가 되었다. 이에 반란 토벌 후 양산창원 지역 등은 적과 가까웠지만 가담하지 않고 버텼다는 공으로 7년 동안 세금을 면제받았다.[2] 김헌창의 협박에 응하지 않고 청주를 탈출했다.[3] 정규군은 아니고 따로 종군을 청했다.[4] 원성왕과 원성왕계도 무열왕을 무시할 수 없던 것이 원성왕 자신은 부계쪽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듯 내물 마립간의 후손이지만 모계로는 무열왕의 후손으로 무열왕의 외현손였다. 원성왕 입장에서는 함부로 무열왕 건드렸다간 그 후손인 자기에게도 악영향이 돌아올 판이었다. 덤으로 부계로 따져보면 원성왕의 선대들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그만큼 또 삼국통일전쟁에서의 기여분도 없거나 적다는 얘기고.[5] 후백제는 최전성기 기준으로 무진주, 완산주는 당연히 점거한 상태였고, 청주와 웅천주는 확고하게 장악한 상태였다. 사벌주는 고려와 약 절반씩 나눠가진 상태였다. 참고로, 김헌창의 난의 근거지인 웅천주의 치소는 옛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이기도 하다.[6] 다만 궁예는 실질적 출신지는 과거 백제의 영지였던 현재 충청북도 지역으로 본다.[7] 엄밀히는 옛 가야 일대는 옛날 가야 소국들도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신라를 상국으로 보아 주로 친신라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결코 신라가 자신들의 이권을 넘보는 것까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백제가 확장하여 위협이 임박했을 때는 자신들의 생존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바로 친백제로 갈아타기도 했고 후백제가 후퇴할 땐 또 바로 친고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8] 물론 불과 17년 뒤인 839년 민애왕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도 달벌대전에서 장보고, 김양의 정예군 5천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사례는 있었지만 일단 10만을 동원해 대구까지 끌고오는 행정력 자체에 의미는 있었다 할 수 있다. 오히려 달벌대전 사례 역시 신무왕계 군주들에게는 옛 신라 영역을 방어하는데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대비 태세를 키우는데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