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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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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왕릉 전경.
출생
(음력)
790년대~800년대 추정[1]
신라 금성
사망 839년 9월 8일[A] (향년 30~40대)
신라 금성
능묘 신무왕릉(神武王陵)
재임기간
(음력)
신라 시중 (1차)
828년 1월 ~ ?
신라 시중 (2차)
834년 1월 ~ ?
재위기간 신라 제45대 국왕
839년 음력 4월 ~ 839년 9월 8일[A] (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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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최후에 관한 이설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삼국사기》 기록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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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45대 군주.

할아버지는 제38대 열조 원성왕의 3남 김예영(金禮英), 아버지는 상대등을 지낸 김균정이다. 희강왕[7]이나 민애왕[8]처럼 열조 원성왕의 증손자로 태종 무열왕 이래 나타난 신라 왕실복수귀이다.[9]

삼국유사》 원문에서는 '신호왕'(神虎王)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가 고려 시대에 작성됐으므로 고려 제2대 혜종의 휘인 '무'(武)를 피휘했기 때문이다. 문무왕을 '문호왕'으로 적은 것과 같은 케이스다. 즉 고려 시대가 아닌 원래 신라 때는 신무왕이 맞다.

2. 생애

제41대 헌덕왕 때 아버지 김균정시중에 임명되었고, 후삼국시대 이전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아버지 김균정, 잡찬 김웅원과 함께 삼군을 이끌고 출진해 진압했다.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828년 시중에 임명되었다. 제42대 흥덕왕 때인 834년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임명되자 부자가 동시에 재상이 될 수는 없다 하여 물러났고[10] 시중 자리는 혜충태자 김인겸의 손자이자 김충공의 아들인 김명(훗날 민애왕)이 이어받게 되었다.

김예영계의 자손이었던 김우징이 김인겸왕실에서 중용받았던 이유는 당시 김인겸계의 막장 왕위 계승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었다. 즉 김인겸계의 헌덕왕 김언승의 왕위 계승은 비정상적이었고, 그로 인해 위에서 언급된 태종 무열왕 방계인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열조 원성왕계의 또 다른 축인 예영계(열조의 3남)가 인겸계(열조의 장남)에 반발을 하게 된다면 이는 김헌창의 난보다 더 크게 작용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김예영의 장남인 김헌정, 차남인 김균정 모두 시중에 오르고 병부를 책임질 정도로 막중한 직책에 오르게 되었다. 김균정의 아들이었던 김우징 역시 828년에 시중에 올랐으니 말 다 한 상황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김헌정의 아들인 김제륭이 김인겸계 왕실과의 결탁을 통해 김인겸계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균형이 깨지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흥덕왕은 김제륭과 김균정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우였던 김충공의 후임으로 김균정에게 상대등 지위를 내려주게 되는데 이는 오히려 더 파국을 부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으로 하여금 아버지 김균정의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결국 흥덕왕이 왕후 장화부인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자식이 없이 죽자 조카이자 당시 사실상 왕위 계승권자로 있었던 것이 유력한 김제륭(훗날 희강왕)과 김제륭을 지지하는 김명[11] 등이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과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12] 사실 이는 왕위 계승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김우징이 일으킨 것으로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김균정은 먼저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갔으나 김제륭 세력의 궁중 기습을 받아 김균정은 살해당하고, 자신과 태종 무열왕 방계인 김주원의 증손 김양은 겨우 도망쳐 청해진장보고에 의탁했는데 김명 등에 복수하기 위해 장보고에게 군대를 빌리려 했고, 그 와중에 사돈 약속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의탁하기 이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던 828년 당시의 시중이 김우징이었는데 시중은 신라 정계의 실세였던만큼 김우징의 입김이나 영향력이 없이는 청해진 설치 같은 큰 정책이 결정되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서 이 무렵에 이미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은 있다.[13]

이후 희강왕 김제륭이 일단 왕위에 올랐다가 김명이 또다시 희강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니 민애왕이다. 김우징은 청해진 소속 군대와 김주원계인 김양의 도움을 받아 청해진[14]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수도 서라벌로 진격해 달벌대전 등 전투에서 정부군을 대파하고 결국 839년 1월 23일[15]에 수도 경주에 입성해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종기로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무왕이 복수한 시중 이홍(利弘)의 귀신에서 신무왕을 로 쏘아 을 맞추었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등에 종기가 나있었고 결국 종기가 난 달 23일이 되어 승하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복수[16]도 이루었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지만 복수귀스런 인생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비해 왕답게 살아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간 인물. 그리고 김우징은 사돈 약속을 지키려 했을지 아닐지 너무 빨리 죽어 알 수 없게 됐지만 뒤를 이은 문성왕이 장보고와의 사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장보고의 수명도 단축시킨 셈이 되었다.

3. 평가

복수귀이자 권력욕에 불타 올랐던 인물이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정계의 혼탁한 상황을 일단 정리해서 통일신라의 수명을 50년은 늘린 임금이기도 하다. 제36대 혜공왕 시기에는 그나마 혜공왕이라는 지도자를 대표로 하는 중앙정부가 지방을 어느 정도 통제라도 할 수 있었지만 흥덕왕 사후부터 신무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도망갔는데도 아무 조치도 못 취하는 등 혼란이 심했다. 그러나 김우징은 민애왕을 무력으로 축출하고 신무왕으로 즉위함으로서 일단 이 혼란을 종식시켰다.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장보고 열전>의 사론 등에서 장보고에 대한 높은 평가를 보면 사관들도 1년만에 죽었으나 꽤 긍정적으로 보았을 수는 있다.

반면 조선 왕조에서는 직접적으로 좋은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신무(神武)는 능히 적(賊)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의리를 알아서, 의리의 깃발을 한번 휘둘러 원악(元惡)의 목을 치고 혼란을 평정하여 정의를 다시 세우니, 인심이 통쾌하게 여겨서 신라의 나라 형세가 거의 위태로웠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동국통감》의 평가는 위에서 소개했듯이 "악인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워 후대에 좋은 왕들이 나올수 있도록 했다." 정도다. 거기다 《동국통감》의 사론의 평대로라면 예를 들어 31대 신문왕은 나라를 겨우겨우 유지한 왕[원문]에 불과한데 나무위키를 비롯해 현대에는 많은 개혁을 시도, 시행한 철혈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대로 문성왕은 《동국통감》의 평가에서 신무왕이 정의를 세운 나라를 잘 이끌었다고 평가했는데 나무위키를 비롯해 현대에는 중대 왕들에 비해 꽤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18]

이렇게 조선 사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는 첫째, 《동국통감》의 사관은 미천한 출신인 장보고와 사돈 약속을 맺어 족내혼을 타파하려 했기 때문에 유교 사회화가 정착된 조선 시대의 기준에 맞다는 점과 민애왕과 그를 돕던 난신적자들을 소탕하여 신라의 어지러운 상황을 단박에 제압해 이후 신라 하대기 나름의 치세를 연명한 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민애왕의 경우는 아예 왕명을 삭탈해버리고 '김명'이라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동국통감》의 의도를 파악할수 있다.
"마침내 김명(金明)에게 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신문왕(神文王) 이후로는 순박함이 없어지고 난적(亂賊)이 뒤를 이어 그 화가 만연(蔓延)됨이 이에 이르러 심화되었습니다."
민애왕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면서 왕위에 올랐고, 신하들을 겁박했으며, 이를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못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신라정통론을 밀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동국통감》은 훈구파가 쓴 《동국통감》이 아니라 사림파가 개보수한 《신찬동국통감》으로 권근이 쓴 《동국사략》처럼 기자조선 / 마한 / 신라를 한국사의 흐름 중심에 있는 정통왕조로 편성했다. 이런 신라정통론은 조선 건국 초기, 조선이 무너트린 고려 왕조 위주의 고려정통론을 부정하기 위함이었으며 《동국사략》,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등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에 적극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것과 신무왕이랑 무슨 상관이냐!라고 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고려 왕조의 성립 배경이자 전 왕조인 신라 몰락의 배경으로 부정적 인식이 있었던 800년대를 뒤엎자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800년대 신라를 보면 상황이 영 좋지 않았지만, 《동국통감》에서는 신무왕이 역적을 몰아내고 800년대의 신라가 재부흥했다고 재평가하며, 결국 진성여왕 이후로 신라가 몰락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19]

하지만 애초에 《동국통감》도 《조선왕조실록》 그대로 서거정이 관여했고, 훈구파와 사림파 모두가 참여했으며, 무엇보다 사림파를 떠나서 삼국유사》의 경우도 신무왕을 '신무대왕'이라고 격상시켰다. 이미 조선 이전부터 고려 왕조에서 신무왕에 대한 재평가는 이루어진 셈이다. 실질적으로 복권에 성공한 것은 조선왕조다.

신무왕의 가장 큰 문제는 900년간 이어진 왕족들의 기득권을 깨기 위해서 장보고와 정략혼을 약속했다는 것인데, 장보고의 경우는 집안이 미천해 당시 기준에서 고대부터 전례가 없는 일이라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문제가 컸다. 이는 당장에 신라의 왕족이었던 궁예도 어머니의 집안 문제로 왕족들 손에 죽을 뻔 하다가 한쪽 눈만 잃고 겨우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보면 신라 자체에서는 이러한 정략혼 자체가 무리가 뒤따랐다. 이전에 신라가 족내혼을 타파했던 사례를 살펴보면 나라의 기틀이 잡힌 중고기쯤부턴 전부 다른 나라의 왕가와의 결혼이었다. 백제대가야와의 국혼이나, 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은 가야계 출신인 김해 김씨와 손을 잡았는데 이들도 전 왕족으로서 진골을 인정받은 케이스이다. 아예 거리가 먼 발해나 일본 말고는 마땅히 국혼할 주변국도 없어진 통일신라에게는 적용하기 힘든 전례다. 하다못해 경주 최씨경주 설씨를 비롯한 6두품 귀족급 신분들과 결혼해 손을 잡지도 못한 것이 컸다.

그리고 중부 지방을 비롯해 패서의 호족들과 손을 잡고 혈구진을 키웠어야 하는데, 서남 지역 일대 호족들과 손을 잡은 것은 신라를 서남지역에서만 세력을 확장, 공고히 했지 중북부 지방과 패서의 호족들을 외면한 감이 없지 않다. 정작 김헌창의 난 때까지는 신라 북부는 반란에 참여하지 않고 신라 조정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는데 이 기조를 그대로 이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훗날 궁예가 이 틈을 노려 중북부 지방을 대부분 장악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삼국유사》나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신분을 뛰어넘는 정략혼과 부모를 죽이고 왕에 오른 왕들을 갈아치웠다는 점에서 신 세력으로 분류가 되었으나 결국 신무왕은 고려 왕조 입장에서는 《삼국유사》에서 재평가가 되어도 구 세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고, 재위기간이 단축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무왕의 이상주의적 면모는 이후 궁예가 실현했고, 신무왕의 현실주의적 면모는 왕건이 실행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후삼국시대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후일 고려 희종과 조선의 인종과 비슷한 편이다.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혹은 편찬자들이 중요시하는 것에 따라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기에 함부로 왕에 대해 재단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것이다.

4. 최후에 관한 이설

신무왕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많은 설이 있다. 일단 사서에는 종기로 인한 사망으로 적혀 있지만, 굳이 "꿈에 김이홍(金利弘)이 나타나 신무왕의 등에 화살을 쐈다"라는 서술이 있다는 점과, 장보고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건으로 인해 기존 세력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나고 신무왕이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 그리고 정실부인인 정종태후가 왕후로 추봉된 기록이 없다는 점 때문에 재위 초반에 장보고와 급격하게 밀착된 모습을 보였고 이에 김정종 등 문성왕의 모계 세력과 김이홍 등 옛 희강왕-민애왕파가 신무왕을 몰아냈으며, 이에 신무왕의 후손들은 죽음을 피해 몸을 숨겼고, 상대적으로 좌지우지하기 쉬운 문성왕을 재위에 올렸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신무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죽어서 갑자기 죽었다고 보이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왕족으로 호의호식하던 그는 김균정 사망 시점부터 목숨을 건 탈출극을 찍고 경주에서 청해진이 있는 완도군까지 국토대장정을 했으며, 그 뒤에도 전장과 같은 환경에서 구르며 살았다. 몸이 축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각에서는 근친혼의 누적에 따른 유전병 탓에 사망했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근친혼을 통한 질병은 보통 3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고, 정말로 근친혼으로 인한 병치레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왕에 오르기도 전에 반란통에 그 병으로 인해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었거나 장보고에게 가기 전 산 넘고 물 건너던 고생부터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는 장보고가 신무왕을 암살했다고 하는데 별다른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장보고가 굳이 청해진 본진으로 돌아가 문성왕을 즉위시킬 이유가 없다.

셋째는 염장과 공신 김양의 결탁으로 신무왕이 시해되었고, 이로 인해 장보고도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대체로 염장과 김양의 경우는 구 세력으로 신무왕과 장보고는 신 세력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장보고의 난은 신라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건이었으며 난이 진압된 이후 신라는 안정을 찾는다.

정작 훗날의 개경 호족들이 성장한 것에 기여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양이 밀어붙인 혈구진이었다.[20] 실제로 청해진의 경우는 무진주(광주)를 수도로 하려했다는 설이 있는데, 옛 백제 지방에 대호족 세력이 생기는 셈이다. 장보고의 딸과 태자를 결혼시킨다는 족외혼도 장점만 있는게 아니라서 척신을 키우고 권력 다툼이 커질 우려가 있었다. 비교대상으로 고려는 초기 태조가 잦은 족외혼을 통해 이후 외척 가문별로 피터지는 싸움이 벌어져 2, 3대 왕들의 재위가 2년에서 4년 밖에 안되었다.

즉 기록대로 종기가 승하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다른 시나리오들도 가정일 뿐이고, 말년에 죽을 고생을 한 신무왕이 승리하자마자 중병을 앓는다는 게 그리 석연찮은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바로 앞의 왕이 둘이나 연속으로 살해당한 판국이라 승자인 자신조차 쿠데타로 즉위해서 정통성 부재의 상황에 처했기에 언제 또 형세가 뒤집힐지 몰라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했고 신무왕이 악몽에 시달린 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신무왕 사망 이후 문성왕 치세까지 이어져 문성왕은 숱한 역모사건[21]과 숙청을 반복해야 했고 이 와중에 결국 장보고 암살과 공신 김양의 조기 은퇴 같은 일련의 일들도 발생하게 된다.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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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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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무왕 본기>
一年春閏一月 신무왕이 즉위하다
一年春閏一月 조부와 아버지를 추존하고, 어머니를 태후로 삼았으며, 아들 경응을 태자로 세우다
一年春閏一月 궁복을 감의군사로 삼다
一年春閏一月 이홍이 달아났으나 잡혀 죽다
一年秋七月 치청절도사에게 노비를 주자, 황제가 불쌍히 여겨 돌려보내다
一年秋七月 왕이 이홍의 저주로 병에 걸리다
一年秋七月二十三日 왕이 붕어하다

《삼국사기》 10권은 열조 원성왕부터 시작하여 신무왕에서 끝난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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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창 박언침 마의태자
{{{#!wiki style="margin:-5px -10px"[왕조 보기]
[朴] 밀양 박씨 왕조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昔] 경주 석씨 왕조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5촌 당숙 흥덕왕이 777년생이고, 김균정이 흥덕왕과 그 동생인 김충공보다도 어리다는 것을 감안하고, 822년 김헌창의 난 토벌 때 참가한 것을 보면 신무왕은 790년대~800년대 전후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A] 음력 7월 23일, 율리우스력 9월 4일[A] [4] 정계(貞繼), 진종(真從), 정종(定宗) 중 하나라고 하는데, 계(繼)의 이체자가 継이고 종(從)의 이체자가 従이라서 한쪽이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표기로 定宗이 쓰이는 점을 볼 때 정종(貞從)이 맞는 듯하다.[5]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에 명(明)자가 들어가는데 이 돌림자는 혜충태자 김인겸의 손자들이 공통적으로 쓰던 항렬자이다. 만약 이 김○명이 헌덕왕 김언승의 태자와 동일인이라면 정계부인의 어머니는 정교부인이 된다. 이부남매끼리 혼인한 셈.[6]삼국유사》 기록.[7] 김제륭, 제43대 왕. 열조 원성왕의 3남 김예영의 장남인 김헌정의 아들이자 김균정의 조카[8] 김명, 제44대 왕. 혜충태자 김인겸의 4남 김충공의 아들[9]동국통감》에서는 신무왕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를 두고 명군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이 《동국통감》의 평가는 "정의를 바로 세웠다" 정도의 이야기이고, 정치 등 군주로서의 일을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원문 보기. 당장 《동국통감》에 나온 평은 31대 신문왕, 32대 효소왕, 33대 성덕왕은 겨우 나라를 지킬 뿐이었고, 34대 효성왕불교에 빠졌으며, 35대 경덕왕신하들의 충정어린 간언을 받기는 했으니 효성왕보다는 낫고, 36대 혜공왕은 여색에 빠졌다는 등 "신문왕(神文王) 이후로는 순박함이 없어지고 난적(亂賊)이 뒤를 이어 그 화가 만연(蔓延)됨이 이에 이르러 심화되었습니다."라며 현대의 일반적인 평가와 달리 30대 문무왕 이후 왕들은 모조리 폄하하고 있다. 다만 42대 흥덕왕은 나쁜 길로 안 빠져들고 재해도 잘 극복했다며 칭찬했다. 그러다가 "신무왕이 민애왕을 죽여서 그동안 망해가던 나라를 뒷 사람들에게 잘 전달해주었다."라며 신무왕 이후 왕들인 46대 문성왕, 47대 헌안왕, 48대 경문왕, 49대 헌강왕을 언급하며 "이들이 다스릴 때는 중외(中外)가 편안하고 백성이 잘 살게 되었으니, (후략)"이라며 신라 하대 초기 왕들을 좀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국통감》 사관의 평은 '신무왕이 한 일은 앞서 나쁜 기운을 잘라내고 좋은 기운을 물려줬다는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혹자는 왕족으로 있을 때의 활약을 높게 쳤다고 하는데 명군에서 '군'은 왕족이 아니라 군왕을 말한다. 광해군세자 시절만 놓고 보면 명군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국왕일 때는 정작 명군 소리를 못 듣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10] 거꾸로 말하면 이 때 권력이 얼마나 김예영계 왕족 일가에게 집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기도 하다.[11] 김인겸계의 유일한 적손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연히 인겸계로 편입된 김제륭을 지지하며 훗날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높다.[12] 사실 김제륭이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인 이유는 흥덕왕의 동생인 김충공의 사위이기 때문이며, 김제륭의 숙부인 김균정이 대항자인 이유는 역시나 김충공의 사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다만 김충공의 아들인 김명이 후순위인 것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김제륭이 숙부인 김균정보다 유력한 것은 아내인 문목부인이 김균정의 후처인 조명부인보다 연장자인 것으로 생각된다.[13] 보통 장보고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이 해석을 수용해서 김우징이 당나라에서 신라에 막 돌아온 장보고의 조력자 역할로 많이 묘사된다.[14]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15]삼국사기》에는 1월 19일, <민애왕석탑사리함기>에서는 1월 23일에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16] 사실 신무왕의 원수김제륭이기는 하지만 희강왕을 죽게 하고 왕위에 오른 김명도 처음에는 희강왕을 지지하여 김균정과 대립했었다. 사실상 민애왕도 신무왕의 원수.[원문] 신문(神文)·효소(孝昭)·성덕(聖德)은 간신히 수성(守成)할 수 있었고(후략)[18] 이는 장보고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영향이 크다.[19] 권근의 《동국사략》과 《동국통감》 등은 모두 신라가 900년대에 비로소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0] 혈구진이 설치된 강화도의 경우, 본시 고려나 조선에서 주요 요충지였다.[21] 진짜 역모인지 문성왕이 귀족들을 숙청하기 위해 벌인 일인지는 불분명하다.[22] 기록에 따라 헌강왕의 셋째 아들이라고도 한다. 현재 광산 김씨 족보에는 어느 왕의 아들이라고 적지 않고 '신라왕자'라고만 적는다.[23] <공화국 시리즈>에서는 김영삼 역,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의자왕 역,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복지겸 역,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보장왕 역.[24] 김양은 염장에게 청해진과 조정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장보고를 죽여야 한다고 부추겼고 과거에 장보고와 원한이 있던 염장은 김양의 지시에 따라 장보고를 죽이지만 김양은 염장마저 잔인하게 죽여버린다.[25] 사실 장보고 암살 이후 김양이 시중직에서 해임당했기에 청해진 해체 작업과 김양은 별 관련이 없다. 오히려 김양 자신도 문성왕 재위 중에 있던 숱한 숙청 바람의 피해자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