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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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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계 김씨(金氏) 시조(始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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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추존 국왕
세조 김알지 | 世祖 金閼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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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상상화
출생
(음력)
65년 3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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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2]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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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국 서라벌 (?)
(現 경상북도 경주시) (?)
능묘 불명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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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태자[3]
연대 미상
재임 기간
(음력)
제3대 대보[4]
연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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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閼智) / 성한(星漢) (?)
부모 양부 탈해 이사금
왕자 김성한
묘호 세조(世祖)[7]
태조(太祖)(?)[8]
직위 대보(大輔) }}}}}}}}}

1. 개요2. 설명3. 정체 관련4. 관련항목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왕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이자 경주 김씨, 강릉 김씨, 연안 김씨를 비롯한 현대 신라계 김씨[9]의 시조이기도 하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정체에 대해선 여러 설들이 있다.

박씨 왕조의 시조 박혁거세나 석씨 왕조의 시조 석탈해와 달리 김알지 본인은 생전에 신라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고, 훗날 김알지의 김씨 후손들이 왕위에 올라 추존된 것이다.[10] 김알지가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의 탈해 이사금 편인데 이에 따르면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의 양자로 들어가 대보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2. 설명

삼국사기》에는 이런 말이 전해져온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 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9년 봄 3월에 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9년출처 - 삼국사기
여담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관련 이야기를 "전설이라 솔직히 안 믿기지만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이야기이니 일단 써 놓는다."라고 적어놨다. 괴력난신을 배격하는 유학자인 자신이 전설을 관찬 사서에 써도 되나 고민했던 흔적이다.[11]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하는데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하는데 이 말이 전해 내려온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朴居勿)이 지었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도 알지 신화가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와 세부적인 몇 군데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동일한 편이다.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 지었다. 알지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췄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12]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삼국유사
해당 내용은 신라에서 김씨 가문이 박씨, 석씨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점을 그들의 토템과 연결시켜서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味鄒尼師今立【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 出於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일설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 이사금
알지는 훗날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학계에서 김성한으로 추정하기도 하는[13]) 김세한(金勢漢), 혹은 김열한(金熱漢)이다. 경주 김씨 족보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세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 이사금이 13대 왕위에 오르며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고, 17대 내물 마립간 시기 이후부턴 김씨 세습이 고착화되면서[14] 오늘날 신라는 대중들에게 김씨 왕조로 많이 알려져있다.[15]

3. 정체 관련

신라의 시조 신화는 3개의 성씨별로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버전이 존재하지만 김알지는 앞의 두 시조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다. 앞에서 말했듯 본인이 왕에 오르지는 못했다는 점도 있으며, 혁거세가 시조묘에서 성씨에 관계없이 신라왕에 올랐다면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고 석탈해는 사후 동악 토함산산신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김알지는 이후 신격으로 숭배했던 흔적이 거의 없다. 게다가 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가 전해지는 둘과 달리 김알지는 조그만 상자에 실려와 열어보니 있더라는 그나마 현실적인(...) 얘기다. 훗날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유교식 오묘제를 시행하지만 거기서도 태조, 미추 이사금 등이 더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김알지의 실존 여부와 더불어 실존했다면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의견들도 분분하다. 일단 오늘날 그래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서로 인정받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선 김알지라고 나오지만, 정작 문무왕릉비흥덕왕릉비 등 당대 금석문 상에선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로[16] 뜬금없이 추존왕 성한왕(星漢王)이란 인물이 언급되고 있어 그의 정체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다.

가장 간단한 해석은 일단 성한왕을 김알지로 보는 것이다. 김알지(金閼智)가 성한왕(星漢王)의 다른 표기라는 주장도 있다. 성(星)="쇠"=김(金), 한(漢)=크다=알(閼), 그리고 왕(王)과 지(智)는 공통적으로 존칭접사를 뜻하기 때문. 다만 당시 이름이 한문의 음차였던 것을 감안하면 음의 유사성이 '알지'보다는 김알지의 아들로 기록된 세한(혹은 열한)[17]과 더 비슷해 이쪽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18] 실제 비석에 기록된 대수를 타고 올라가면 경주 김씨 족보에 기록된[19] 세한이 성한왕의 대수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니면 김씨 왕조의 시작인 미추 이사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만약 김세한이 성한왕이 맞다면, 왜 김알지가 아닌 아들인 김세한을 시조로 모셨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박씨나 석씨에 무시당할 요소를 없애기 위해 신화적으로 1대를 격상하여 신라 초기에 등장시킨 것 아니냔 주장도 있다.

문무왕릉비, 흥덕왕릉비, 김인문 묘비에 기록된 성한왕의 금수레 설화와 알지 거서간이라는 이명을 지녔던 박혁거세의 난생 설화가 융합되어 삼국사기의 김알지 설화가 탄생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문무왕릉비에 등장하는, 흉노족 신라왕족설의 떡밥이 되는 김일제와 연관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20] 학계에선 항목에도 있듯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를 부정하는 기류가 강하다. 참고로 《한서》 김일제 열전에 따르면, 사성정책으로 김일제가 하사받은 김은 "금(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므로 김씨(金氏)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성균관대 김영하 교수에 의하면 알지는 금(金)을 뜻하는 몽골어 "알티"와 같은 어원을 가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한다. 허나 관점을 바꿔 고대 흉노어에서 기원을 찾으면, 고대 흉노어는 중세 몽골어보다는 투르크어와 더 유사하기 때문에 오히려 튀르크어 계통의 "altin"과 연관성이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여하튼 중국 문화 유입 이후 많은 한반도 토착민들은 한자 성씨를 사용하였고, 그래서 김씨 일가도 한자 성씨인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1]

그 외 금관가야 수로왕 세력과 관련된 사람을 양자로 들였다는 주장이나 마한 출신 왕족으로 마한 부흥 운동을 일으킨 사람[22] 아닐까 하는 주장들도 있으나 가설 수준에 머문다. 한편으론 고구려인들이 머리에 깃털을 달고 다니는 것을 신라인이 벼슬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서 고구려인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주장도 있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은 실성 마립간 대에는 고구려인들이 신라를 칠 것이다라고 하여 그것을 신라왕까지 듣게 되었고 이후 눌지 마립간이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人殺家內所養鷄之雄者)"라고 말하니 신라인들이 뜻을 알아채고 신라에 거주한 고구려인들을 제거하였다. 다만 머리에 새 깃털을 꽂는 관모를 쓰는 것은 삼국 공통의 문화였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고구려인과 관련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4. 관련항목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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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유사》에는 60년 8월 4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후에 계림(雞林)으로 바뀌었고, 신라의 옛 국호 중 하나의 유래가 되었다.[3] 《삼국유사》에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있다.[4] 《삼국사기》 미추 이사금 본기대보(大輔)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5] 사실상 김해김씨와 나머지 가야계 소수 김씨를 제외한 360본관 김씨들의 시조이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김해 김씨가 훨씬 많으나, 본관 비례로 따지면 경주 김씨가 훨씬 많다.[6] (김녕 김씨 족보)[7] 조선 영조가 양어머니인 인원왕후의 사망 이후 그녀의 행록을 작성케 하는데 그때 "(인원왕후는) 경주 김씨이며 김알지가 선조인데 (훗날) 세조로 추존되었다."는 내용이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 3월 26일 정사 5번째기사에 나온다. 가문 차원의 추숭을 굳이 실을 이유는 없으므로 신라조 대에 추숭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8] 태조 성한왕과 김알지가 동일인이라 보는 학설이 존재한다.[9] 구 안동 김씨도 올라가보면 도시조다. 김씨였다가 성씨가 나뉜 수성 최씨, 안동 권씨에서도 도시조, 비조격에 해당된다.[10] 참고로 신라 최초의 김씨 군주는 13대 군주인 미추 이사금이다.[11] 사실 김부식은 박혁거세석탈해는 물론 고구려 동명성왕 신화 일부도 믿을 수 없다고 까면서도 일단은 적어놨다.[12] 이 열한을 신라 태조 성한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13] 물론 항목에도 있듯 성한왕의 경우 김알지나 김미추 등을 뜻하는거라고 보기도 한다.[14] 신라 최후반기 3명이 집권한 것 외엔 다 김씨 왕가였다.[15] 초대 군주인 박혁거세 덕분에 박씨 왕도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석씨는 역사에 관심 없으면 진짜 모르는 경우도 꽤 많다.[16] 신라의 시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중기부터 신라는 사실상 500년 이상을 이어진 김씨 왕조의 나라가 됐으므로 김씨의 시조로 해석할 수 있다.[17] 삼국사기에선 세한(勢漢), 삼국유사에선 열한(熱漢)으로 나온다.[18] 다만 현재로는 당시의 정확한 발음이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설 수준에 머물고 있다.[19] 삼국사기 기준이라는 말도 있는데 확인이 필요한 부분.[20] 대당고김씨부인명에도 신라의 김씨 시조가 (김알지가 아닌) 투후 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다.[21] 고사기, 일본서기를 보더라도 많은 한반도인 성씨가 삼국시대까지도 한자 단일 성씨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것도 상류층 한정이지, 일반 평민들은 성씨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애초에 현대에도 성씨를 쓰지 않는 지역(아랍, 인도네시아 등)이 생각보다 제법 많다.[22] 탈해 이사금이 양자로 받아들일만큼 귀한 신분이어야 된다는 점이 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