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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3:39:33

이사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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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의 인물
이사지왕 | 尒斯智王
파일:이사지왕.png
디지털로 복원한 이사지왕의 모습.
출생 연대 미상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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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능묘 금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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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신체 109㎝ 전후(허리 둘레)[2], 발 342mm 전후[3]
왕호 이사지왕(尒斯智王) }}}}}}}}}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56b275fc10d140c88176bd3a4c3f6593_99_20140710215704.jpg
이사지왕의 검.

1. 개요2. 신라 56왕 중의 한 명인가?3. 기타

[clearfix]

1. 개요

태조 성한왕처럼 한국의 사서에선 등장하지 않고 금관총(이사지왕릉)의 유물 중 금관총 환두대도에서 이름이 발견된 신라.[4]

유물 자체는 1921년 9월 일제강점기 발굴 때 출토됐으나 시대가 시대인데다가 당시 일제도 철저히 준비하고 발굴한 게 아니라 우연히 시작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현대에 재발굴이 진행되었고, 이 재발굴에서 92년 만인 2013년에야 이전엔 찾아볼 수 없었던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인명을 발견했다. 이 인명의 발견으로 결국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으로 밝혀졌다. 금관총 유물이 500년 전후로 비정되므로 500년 전후에 활동한 왕족 또는 귀족인 듯하다.

2. 신라 56왕 중의 한 명인가?

파일:국립경주박물관 금관총 이사지왕.png
국립경주박물관의 금관총 이사지왕 부분 설명.

결론부터 말하지면 알 수 없다. 무덤의 양식을 볼 때 이사지왕이란 인물이 활동했던 무렵의 왕이면 자비 마립간, 소지 마립간, 지증왕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금관총 조성 시기를 5세기 후반으로 본다면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 시기에 활동했을 것이다. 이사지왕이라는 인물이 신라의 국왕이라면 이 왕들 중 한 명의 다른 이름이 이사지왕이라는 말인데, 자비 마립간이나 소지 마립간이라고 하기에는 음의 연관성도 미약하다. 묘지문이 나오지 않는 이상 금관총이 이사지왕의 무덤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2015년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도'라고 새겨진 칼집 부속구가 추가로 확인되고, 금관총에서 출토된 이사지왕 관련 명문 환두대도 3점이 나왔으므로 일단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사람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마립간들 중 하나라고 추정할 수만도 없다. '이사지왕' 명문 출토 이전까지는 출토 유물들을 근거로 금관총의 피장자는 여자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가령 출토된 귀걸이의 종류나 발굴 조사팀의 회고 등에서 나온 검의 발굴 위치 등으로 볼 때 남성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사지왕의 부인의 무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금관총이 졸속으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유물들의 정확한 배치를 기록한 글이나 사진 등이 없다. 발굴 3년 후 교토대학에서 낸 회고록 수준의 발굴보고서밖에 없어서 여러 의혹을 제대로 풀 수가 없다. 심지어 발굴 유물의 도면이 여러 사람의 기억에 따라 총 6개나 나왔는데, 도면들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령 도면 5점에서는 출토된 칼 세 자루가 모두 피장자 주위에 둘러싼 형태로 발굴되었다고 묘사한 반면, 1점에서는 피장자가 칼 한 자루를 착장했다고 묘사했다. 칼의 위치는 피장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판단하는 한 가지 근거로 사용되므로, 후대의 우리는 피장자의 성별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만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여러 점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피장자의 이름을 표시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노사화현(奴斯火縣)과 자인현(慈仁縣)[5]이 대응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비롭다"는 뜻의 고대 한국어 어휘를 *nese로 재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 한자음이 *nese-ti에 가까웠던 이사지왕이 자비 마립간의 이표기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 이 견해에 따르면 울주 천전리 각석 계사년(453년) 명문에 등장하는 이소지(尒小知) 대형가(大兄加)와도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 #

금관총이 소지왕릉이며 이사지왕은 소지 마립간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 하지만 해당 기사에서 이사지왕을 '이(지시관형사)+사지왕'으로 분석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삼국시대 당시 이사지왕의 이(尒)는 한자음이 ㄴ으로 시작한 반면, 한국어의 지시관형사 '이'는 지금과 같은 어형이었기 때문이다.[6] 소지왕이 비처(毗處)라고도 불린 사실을 바탕으로 소지의 소(炤)를 음차가 아닌 훈차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오류와 별개로 이사지왕이 소지 마립간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혹은 비록 이사지왕이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에서 '차칠왕(此七王)'이라는 표기가 쓰이거나 그 외 여러 갈문왕에서 왕의 용례가 사용된 것을 보면 왕호 자체는 일찍 받아들였으나 확정된 것이 지증왕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런 관점으로 보면 고위 귀족인 이사지왕이 '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신라 국왕 56명 중 누군가라고 비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 지배자인 마립간의 친족이거나 신라 육부(六部)의 수장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이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 하지만 이 역시 소지왕설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적 고찰이 결여된 주장이다. 상술한 것처럼 당시 한자음 기준 이사지왕의 이(尒)는 ㄴ으로 시작했으나, 이사부의 이(伊)는 현재와 같은 발음이었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보기 어렵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사부의 활동 시기인 500~560년대는 이미 '왕'이 군주만의 칭호로 확정된 이후였으며, 5세기 후반으로 비정되는 금관총의 조성 시점과도 맞지 않는다.

한편 이사지왕과 관련된 연구가 거듭될수록 노태돈이 주장했던 '고대국가 초기부터 일정 시기까지 신라의 왕들은 6부의 대표자였지 통치자가 아니었다.'는 가설이 점점 더 힘을 얻었다.

3. 기타

2024년 10월, 금령총의 피장자가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1] 금관총의 축조 연도가 500년 전후로 추정되니까 이사지왕은 500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 이사지왕이 매고 있었던 금관총 금제 허리띠의 길이가 109cm였다는데 금관총 금제 허리띠 길이를 볼 때 이사지왕의 허리 둘레는 109cm 전후로 추측된다.[3] 이사지왕이 신고 다녔던 금관총 금동신발의 길이가 342mm였다는데 금관총 금동신발 길이를 볼 때 이사지왕의 발 사이즈는 342mm 전후로 추측된다.[4] 단, 신라에서는 일부 귀족층에게도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예가 있으니 정말 '임금'이었다기보다는 왕족과 귀족까지 포함하는 최상위 지배계층으로 보아야 한다.[5] 지금의 경산시 동남부에 존재했던 옛 현이다. 경산시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 진량읍 남부, 압량읍 동부에 해당.[6] 한국어에서 ㄴ 두음 법칙이 발생한 것은 17세기 이후로, 삼국시대와는 천 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