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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2:36

김거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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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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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494><colcolor=#fbe673>
신라 제3대 상대등
居柒夫 | 거칠부
출생
(음력)
502년
사로국
사망
(음력)
579년 (향년 77세)
신라
재임기간
(음력)
대아찬
~ 545년 7월
파진찬
545년 7월 ~ 576년
제3대 상대등
576년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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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494><colcolor=#fbe673> 성씨 경주 김씨
이름 거칠부(居柒夫), 거칠부(居七夫), 황종(荒宗)
부친 김물력(金勿力)
종교 불교
관등 대아찬(大阿飡)
파진찬(波珍飡)
직위 상대등(上大等) }}}}}}}}}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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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진흥왕 ~ 진지왕 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

2. 생애

거칠부지(居七夫智), 김황종(金荒宗)이라고도 한다. 동시대 인물인 이사부의 예처럼, 다른 이름인 황종의 황(荒)은 당시에나 현대 한국어에서나 거칠다는 의미고 종(宗)과 부(夫)는 상대 신라 인명에서 흔히 대응되는 글자다.[1] 거칠부의 '거칠'은 고대 한국어를 한자의 의미에 관계없이 음이 같은 한자들로 쓴 것이다.[2] 즉 거칠부라는 이름의 의미는 '거친 벌판'으로 해석할 수 있다.[3] 일본 기록에서는 구지포례(久遲布禮) 혹은 구례이사지간내사마리(久禮爾師知干奈師磨里)[4]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물 마립간의 5세손으로 조부는 각간 잉숙(仍宿), 아버지는 이찬 물력(勿力)이다.[5] 이를 통해 거칠부의 가계는 당시 신라 왕실의 핵심적인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물력은 524년(법흥왕 11)에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탁물력지일길간지(啄勿力智一吉干支)'로 나오는 물력과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물력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 외에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부인 잉숙의 이름은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486년(소지왕 8) 2월 이벌찬에 오른 내숙(乃宿)이 잉숙일 것이라고 흔히 추정한다. 잉(仍)과 내(乃)가 비슷한 모양의 한자이기 때문이다.[6]

내숙과 잉숙이 동일 인물이라면, 《삼국사기》에서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이 내숙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거칠부의 가계에 대해서도 더 추적해 볼 여지가 생겨난다. 조부가 내숙이라면 증조부는 미사흔이 된다. 그리고 미사흔계는 지증왕 즉위 이전까지 왕비를 대대로 배출한 왕비족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에서도 꽤나 중요한 집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증왕 즉위로 미사흔계의 왕비 배출은 끝이 나버렸기 때문에 이후에는 왕실의 인척으로 내려 앉으며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뭐가 되든 눌지 마립간의 직계가 소지 마립간으로 끝난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 중인 복호계를 제외한 내물계의 나머지 직계인 미사흔계의 직계 자손인 거칠부도 왕실의 주요 일원으로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해보인다.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의 조카설을 따를 경우, 선혜(善兮)라는 이름은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초기 고유 신라식이 아니라 불교적인 이름이었기에, 거칠부 본인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불교에 호의적이고 신라에 수용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고[7] 젊을 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정확히 언제 출가하고 떠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545년 국사 편찬 책임자가 됐을 때 이미 관등이 대아찬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 때 기준으로도 상당히 오래 전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천하를 유람하다 신라 국내뿐만 아니라 문득 고구려의 강약을 엿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고구려에서 지냈던 적도 있다. 고구려에서 지내던 시절 승려 혜량의 강연을 들었는데, 얼마 안 돼 혜량법사는 거칠부가 신라 귀족인 것을 눈치채고 고구려에서 붙잡히기 전에 돌아가라고 조용히 전해 거칠부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후 신라로 돌아와 환속하고 신라에서 일했다.

《일본서기》 기록상 529년에 구지포례(久遲布禮)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일반적으로 거칠부의 이름을 다른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이 있어 해석이 조금 어렵지만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 탁순국기능말다간기[8]백제와 신라를 두려워해 왜국오미노 케나(近江毛野臣)를 가야 땅에 불러왔고, 거칠부가 그에게 사신으로 갔다. 그러나 오미노 케나는 급이 낮은 자가 사신으로 왔다고 돌려보냈다. 이후 거칠부 대신 이사부가 3천 명의 군대를 끌고 와서 오미노 케나를 쫓아냈다.

진흥왕 때 이사부의 제안으로 역사서인 《국사(國史)》[9]를 편찬했다. 《삼국사기》에는 545년에 편찬된 것으로 나온다. 거칠부는 어릴 때부터 승려였으므로 외국에서 들여온 불경을 읽으려면 중국식 한문 해독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10] 당시 신라에서 손꼽히는 한문 능력을 익혔던 사람인데다, 신라와 고구려 이곳저곳을 유람하면서 각 지방의 명사들과 교류해 학식, 경험, 인맥을 쌓은 인물이므로 이런 일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국사》는 거의 천 년이 지난 고려 시대까지는 존재했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으며 고려시대에 기존 사서를 집대성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많은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550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 신라 적성비에 거칠부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변태섭 교수는 비문의 3번째 줄 맨 위 부분의 이름 부분이 손상된 ▨▨夫智大阿干支(대아찬 ▨▨부)가 거칠부일 것으로 추측했다. 다만 주보돈 교수는 추정할 근거가 없다고 부정했다.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 남부의 한강 유역 10군을 탈취하는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때 참전한 아홉 장수[11] 중 한 명이었다.[12] 진흥왕의 북진 정책에 따라 고구려를 칠 때 과거 은혜를 입었던 고구려 승려 혜량을 만나자마자 거칠부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군례(軍禮)로 인사를 올리고 신라로 데려와 진흥왕에게 직접 천거해 신라 불교의 승통으로 삼았다.

이후 창녕 척경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에서 진흥왕의 행차를 보좌한 인물 목록에서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가야와 함경도 지역 정복에도 참여하며 맹활약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가야 정복 완료 1년 전에 만들어진 창녕 척경비에서는 갈문왕, 대일벌간 등 진흥왕을 호위하는 최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실제 정복 전쟁에서 전투를 실제로 치르는 자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직책을 보유하였음이 드러난다.

주보돈 교수는 진흥왕 재위 후반부에 창설한 화랑 제도를 거칠부가 주도해 추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거칠부 본인이 어릴 적 승려로 출가해 지식을 쌓거나 유명한 승려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적국 고구려 땅까지 포함해 천하를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경험을 쌓은 뒤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로서 활약하는 생애 전반부 자체가 훗날 화랑의 교육 과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마침 화랑 제도를 창설한 진흥왕 말년 시기에 거칠부는 이사부의 뒤를 이어 최고위직에 앉아있었으므로 충분히 임금에게 이런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할 수 있는 위치였기도 하다.

이렇게 신라 상고기 전성기의 영토 확장이 마무리되고 진지왕의 치세가 시작된 말년에는 상대등에 올라 권세를 누렸고 579년 78세에 사망했는데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했다. 진지왕이 불과 4년만에 정치를 돌보지 않아 폐위되었는데 이 때 상대등이었던 거칠부가 폐위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13] 그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3. 평가

동시대에 활약한 이사부가 50년 이상 전장을 누빈 백전 노장이었다면 거칠부는 상당히 다양한 경력을 보여준다. 주로 정치에서 활약한 재상급 인사였지만 소싯적에는 승려 경력도 있고, 역사서를 편찬한 문인이었으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영토 확장에도 한 몫했다. 또한 고구려를 엿보려고 고구려에서 눌러 살았었다는걸 보면 일종의 스파이 경력도 있었던 셈. 그야말로 당시 신라의 만능인였던 인물이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그러나 거칠부가 진지왕을 폐위하는데 동의하고 미실을 지지한 것은 진흥왕의 삼한일통의 꿈과 신라의 부흥을 위해서였지만 미실은 그저 황후가 되기 위해서였기에 마야부인이 돌아오고 황후가 될 수 없었던 미실이 삼한일통의 꿈을 접고 국사를 조작하려고 하자 미실과 의견차가 생긴다. 결국 미실의 진흥왕 시해 시도를 유추해내고 그것을 의심하자 미실에 의해 암살되며 상대등의 자리는 미실의 계획대로 세종이 잇게 된다.[16][17]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미실과 문노는 완전히 갈라서게 되어 결국 문노는 미실의 수많은 계획을 망쳐버리며 왕실을 구하는데 일조를 한다. 거칠부가 회고로 나온 시기가 마침 풍월주 교체 시기였는데 김유신은 어머니인 만명부인을 통해 거칠부가 시 짓기에 능하고 마방진과 세필에 능하다는 점을 가르쳐주어 2번째 부재인 신라의 뜻을 알아맞힐 수 있게 도와주었다.[18]
사실 이 부분은 어느정도 급조한 부분으로 보이는게 이 정도의 거물이 정작 미실이 황후가 되려던 그 화백회의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흥왕 시절의 상대등이었다면 노리부, 을제, 그리고 세종보다도 권력이 막강할텐데 그 화백회의에서는 모습조차 드러나지 않으며 진지제 폐위에도 노리부가 앞장서고, 화백회의에서도 노리부가 을제를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때문.[19]

[1] 신라시대 인명에 자주 쓰인 이 부(夫)라는 접미사는 벌판을 뜻하는 지명 접미사 부리(夫里)·벌(伐)과 같은 단어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사부 - 이질부례, 거칠부 - 구지포례 등의 이표기 관계를 통해 '부'가 '부리'의 축약 표기임을 알 수 있으며, 미질부(彌秩夫)처럼 지명에 부(夫) 자가 쓰이기도 했다. 사람 이름에 '벌판'이 들어가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고대 한국 인명에서 종종 내 천(川: 알천, 금천, 구진천, 동타천, 횡천, 술천), 거칠 황(荒), 이끼 태(苔) 등 지명에 쓰일 법한 한자가 사용되거나 미진부고전해처럼 고지명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어휘가 포함된 사례가 있음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2] ‘居柒夫或云荒宗’(삼국사기 권44), ‘東萊郡本居柒山郡’(삼국사기 권34)에서는 ‘荒, 萊’를 의미하는 단어가 ‘居柒(중세국어: 거츨-)’이라 발음되었음을 볼 수 있다.[3] 다만 《일본서기》의 표기를 최대한 살리면 구디부레로 관형격 어미인 ㄹ이 관찰되지 않는지라 거칠-보다는 겉(고어형: 겇)-이 당대 표기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거칠다'라는 표현 자체도 결국에는 '겉(면이 두드러기처럼) 일다'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거칠다'의 중세 국어형이 '거츨다'인 반면 동시대 '일다[起\]'의 어형은 '닐다'였기 때문에, '겇'과 '닐다'가 합쳐져 '거츨다'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도 '거칠다'가 '겉'의 고어형 '겇'에서 파생된 표현일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4] 이사지(爾師知)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이질(爾叱)과 같은 이사금(尼師今)의 이사(尼師)가 아닐까 싶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보검에 새겨진 이사지왕(尒斯智王)의 이사지(尒斯智)도 같은 단어일 가능성이 있다. 尒는 爾의 이체자다. 한편 구례(久禮)는 구지포례(久遲布禮)를 축약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5] 일반적으로 잉숙은 내숙과 동일 인물로 여겨지므로 거칠부는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의 조카가 된다. 《삼국사기》에 소지 마립간의 왕비인 선혜부인을 내숙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와 달리 소지 마립간의 왕비가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기보갈문왕은 지증왕의 아버지이기도 했는데 만약 둘이 동일인이라면 지증왕은 거칠부의 백부가 되는 셈이나 그럴 가능성은 적다. 두 기록에 하자가 없다면 소지 마립간은 내숙의 딸 선혜부인과 기보갈문왕의 딸을 왕비로 맞은 것인데 당시만 해도 신라에서는 왕이 2명의 왕비를 두지 않았으므로 둘은 선후해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6] 삼국시대 지명 중 진내군(進乃郡)이 진잉을군(進仍乙郡), 내매현(乃買縣)이 잉매현(仍買縣)으로도 불린 점을 고려하면 삼국시대 당시 잉(仍)은 내(乃)와 통용되는 음차자였으며 '나'에 가깝게 읽혔을 것으로 보인다.[7]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의 첫머리에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신라는 거칠부가 20대이던 527년 이차돈순교로 불교를 공인하므로 거칠부는 불교 공인 이전에 승려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승려의 존재 자체는 이전 기록부터 나오므로 모순은 아니다. 불교는 이차돈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신라 정부의 공인이 527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젊을 적부터 불교에 우호적인 인사였던 거칠부가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법흥왕과 처음부터 입장을 같이 했고 이후 진흥왕 시대까지 정치적 핵심으로 부상하는 배경으로 보는 설도 있다.[8] 가야 전체의 왕이 아니라 가야의 여러 나라 중 한 나라의 왕으로 보고 있다.[9] 보통 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10] 그래서 역사 시대 내내 특히 고대에는 승려는 지식인 계층으로 대우받았다.[11] 대각간 구진, 각간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거칠부ㆍ서력부(西力夫)ㆍ노부(奴夫), 대아찬 비차부, 아찬 미진부[12] 아직 나제동맹이 끊어지기 이전이었다.[13] 진지왕 폐위를 주도한 국인(國人) 입장이었거나 진지왕 폐위에 따른 책임을 지고 상대등에서 물러났을 수도 있다.[14] 작중 묘사 상 이 사람의 기일이 주인공인 덕만의 생일과 같은 날이다.[15] 미실은 문노와 자신의 고종사촌인 윤궁의 아버지이므로 미실에게 거칠부는 고모부이다.[16] 미실의 표독스러움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의 폐위 이후 자식인 비담도 버리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고모부도 없애버린 것이다.[17] 여담으로 배우의 대표작인 드라마 제5공화국장태완 장군과 비슷한 포지션이라는 의견이 있다. 둘 다 반역의 심리를 간파하고 발버둥치다 제거당하는 역할이다. 여기서는 아쉽게도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같은 오마주격 명대사를 미실에게 날리지는 못했지만.[18] 당연히 여기서도 무적의 소엽도가 도움을 준다.[19] 여담으로 노리부 역시 이 에피소드에서는 충신으로 묘사되고 미실을 황후로 세우려는 이유 역시 신라를 위해서라고 그려진다. 하지만 미실을 황후로 세우려던 화백회의에서는 그저 미실의 꼬봉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게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