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33대 왕 성덕왕(聖德王) 김융기에 대한 내용은 성덕왕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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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2대 상대등 |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추존 국왕 성덕왕 | 成德王 | |||
출생 (음력) | 미상[1] | ||
신라 | |||
사망 (음력) | 836년 (향년 불명) | ||
신라 | |||
재임기간 (음력) | 제32대 상대등 | ||
835년 2월 ~ 836년 (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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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균정(均貞) | ||
부친 | 김예영 | ||
형제 | 김헌정 | ||
자매 | 귀승부인 | ||
왕후 | 정교부인, 조명부인 | ||
아들 | 김우징, 김의정 | ||
시호 | 성덕대왕(成德大王) | ||
골품 | 진골(真骨) | ||
관등 | 대아찬(大阿餐) | ||
직위 | 시중(侍中) 상대등(上大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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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하대의 왕족이자 대신.제38대 열조 원성왕의 3남인 김예영의 아들이다.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희강왕(제43대) 김제륭은 그의 조카가 된다. 비록 본인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후 아들들(제45대 신무왕 김우징, 제47대 헌안왕 김의정)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의 아버지로서 훗날 '성덕왕'(成德王)[2]으로 추존되었다.
열조 원성왕의 장남인 김인겸의 4남인 김충공의 두 딸과 5촌 근친혼으로 정교부인 사이에서 신무왕을, 조명부인 사이에서 헌안왕을 낳았다
2. 생애
제40대 애장왕 3년(802년) 대아찬에 올라 주요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이 해 조정에서 김균정을 가짜 왕자로 삼아 일본에 보내려 했지만 김균정이 거절했다고 한다. 812년에 시중에 올랐다.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왕위를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던 혜충태자 김인겸계의 정치적 배려가 한 몫 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김균정이 헌덕왕(제41대) 치세때 시중에 올랐다는 것이 꽤나 중요한 기록이 되는데 헌덕왕의 경우, 자신의 조카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이 꽤나 취약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의 치세에 후에 언급되는 태종 무열왕의 방계 귀족인 김헌창의 난이 발생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열조 원성왕계의 또 다른 혈통인 김예영의 자손들이 반기를 들게 된다면 김헌창의 난보다도 훨씬 더 큰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김예영의 아들이었던 김헌정이 807년 애장왕 말기에 시중으로 있었는데 애장왕 시해후에도 지속적으로 시중을 역임했으며, 그가 시중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곧바로 그의 동생인 김균정이 시중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813년에는 김헌정이 국상에 병부령 겸 수성부령을 역임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군권을 맡은 셈이 되므로 왕실인 김인겸계가 철저하게 김예영계를 중용했다는 것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의 화룡점정은 혼인 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김헌정의 아들인 김제륭, 그리고 김균정이 모두 김인겸의 4남인 김충공의 딸과 혼인을 한 것이다. 비록 김충공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김예영계가 김인겸계 왕실에게 본인들의 입지를 어느 정도 요구하는 과정에서 김충공의 아들 김명(제44대 민애왕)의 왕위 계승보다는 예영계 후손의 왕위 계승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과정에서 김헌정의 아들 김제륭이 김인겸계 왕실로 편입되어 김충공의 아들 김명보다도 항렬이 높게 되면서 후대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고, 여기에 김명이 같이 참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왜 김균정이 흥덕왕의 친조카인 김명을 제치고, 자신의 조카인 김제륭과 왕위 다툼을 하게 되었는지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822년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찬 김균정은 아들인 대아찬 김우징, 잡찬 김웅원 등과 함께 삼군을 이끌고 출정, 후삼국시대 이전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신라의 멸망이 100여년 앞당겨질 수도 있던 사태였는데 꽤 군사적 식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35년 상대등에 올랐고, 836년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김제륭(후의 희강왕) 및 그를 지지한 김명(후의 민애왕)과 왕위를 놓고 적판궁(積板宮)에서 전투를 벌이다 패배해 김제륭의 사병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의 방계 후손인 김양이 다리에 배훤백이 쏜 화살을 맞았고, 부상당한 김양과 김우징은 도망쳤다. 당시 김균정은 상대등이었기에 흥덕왕의 조카인 김명[3]을 제치고 사촌인 김제륭과 왕위를 다툰 것이다.
이건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김균정의 할아버지 열조 원성왕에게는 소성왕, 헌덕왕, 흥덕왕의 아버지인 장남 김인겸이 있었는데 일찍 사망했다. 해서 원성왕은 둘째 아들 김의영을 태자로 다시 세웠다가 그마저 일찍 죽자 장손인 소성왕 김준옹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김균정은 비록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졌다고는 하나 헌덕왕의 며느리 정교부인의 남편이었고, 흥덕왕이 죽기 직전에는 상대등이라는 직책까지 덧붙여진 것이니 말 다했다.
실제로 신라는 왕이 죽으면서 태자나 인척이 없거나, 왕이 후사를 정하지 않고 죽으면 화백회의에서 상대등을 왕으로 추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후사가 없는 흥덕왕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했을 것이다. 당장 아들인 김우징도 아버지가 상대등이 되자 시중에서 물러났는데 두 부자가 시중과 상대등을 겸할 수는 없으니 권력도 상당했을 것이다.
어쨌든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흥덕왕의 친조카이던 김명을 등에 업은 조카 김제륭에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 때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했고, 이후 장보고의 도움으로 거사를 일으켜 달벌대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서라벌로 진격해 민애왕에 대한 복수를 이루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