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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01:08:47

인원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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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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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순왕대비 | 惠順王大妃
조선 영조조 대왕대비
혜순대왕대비 | 惠順大王大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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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릉인원왕후.jpg
명릉 인원왕후 능침
출생 1687년 10월 24일(음력 9월 29일)
조선 한성부 순화방 사저 양정재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일대)
사망 1757년 5월 2일(음력 3월 26일)
(향년 71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영모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명릉(明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702년 11월 10일 ~ 1720년 7월 8일
조선 왕대비
1720년 7월 8일 ~ 1724년 10월 5일
조선 대왕대비
1724년 10월 5일 ~ 1757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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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경주 김씨
부모 부친 경은부원군 김주신
(慶恩府院君 金柱臣, 1661 ~ 1721)
모친 가림부부인 임천 조씨
(嘉林府夫人 林川 趙氏, 1660 ~ 1731)
형제자매 4남 5녀 중 차녀
배우자 숙종대왕
자녀
양자 1남 [ 펼치기 · 접기 ]
양자 - 영조(英祖, 1694 ~ 1776)
봉작 왕비(王妃) → 혜순왕대비(惠順王大妃)
→ 혜순대왕대비(惠順大王大妃)
전호 효소전(孝昭殿)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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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순자경헌렬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휘정정운
(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正運)
휘호 정의장목(定懿章穆)
시호 인원왕후(仁元王后) }}}}}}}}}
1. 개요2. 생애
2.1. 숙종 시절2.2. 연잉군 왕세제 책봉2.3. 영조 즉위 이후
3. 성격4. 미디어에서의 인원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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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19대 왕 숙종의 두 번째 계비이다.

영조의 양어머니, 정성왕후정빈 이씨, 영빈 이씨, 숙의 문씨의 시어머니이다. 효장세자, 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의 할머니이다.

2. 생애

2.1. 숙종 시절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곧바로 간택되어, 삼년상을 다 치르지 않고 바로 다음 해인 1702년(숙종 28년) 10월 3일 16세 때 왕비에 책봉되었다.
좌참찬 이여가 지어 바친 교명문의 내용
교명문(校命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왕화(王化)의 근본은 내치(內治)에서 힘입고, 종사(宗祀)의 중요함은 공승(共承)에서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건도(乾道)는 홀로 이루어질 수 없고, 곤정(壼政)은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으니, 인륜(人倫)의 처음을 근신함이며 감히 궁실(宮室)의 편안함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이장(彝章)을 따라서 욕전(縟典)을 거행하는 것이다. 아! 그대 김씨(金氏)는 세신(世臣)의 집안으로 일컬어졌고, 증사(曾沙)의 상서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유한(幽閑)하고 정정(貞精)한 몸가짐은 훌륭한 자질(資質)로 태어났음이며, 온순하고 혜신(惠信)한 행실은 일찍이 휘음(徽音)을 드러내었다. 중전(中殿)의 결위(缺位)를 이으려면, 마땅히 명문(名門)에서 덕(德)있는 이를 골라야 하는데, 이미 황상(黃裳)의 길함에 적합하니, 적유(翟褕)의 존귀(尊貴)함에 합당하다. 거북점을 참고(參考)하여도 화합하여 복종하고, 경사(卿士)들과 의논하여도 모두 마땅하다 하였다. 한 사람이 가정을 바르게 다스리면 온 천하(天下)가 평정(平定)될 것이니, 이는 옛 성왕(聖王)이 먼저 한 것이며, 열 사람의 어진 신하(十亂臣) 가운데 부인(婦人)이 참여하였으니, 거의 충량(忠良)한 보좌(補佐)를 의뢰하였다. 이에 신하(臣下) 의정부 좌의정 이세백(李世白)과 예조 판서 김진귀(金鎭龜)를 보내, 길일(吉日)을 가려서 의례(儀禮)를 갖추게 하고,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을 주어 그대를 책봉(冊封)하여 왕비(王妃)를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음교(陰校)를 힘써 닦고 외화(外和)를 도와서 선포(宣布)할 것이며, 인사(禋祀)를 받들 때는 숙야(夙夜)의 정성을 다할 것이며, 원량(元良)을 사랑할 때는 고복(顧復)하는 사랑을 이룰 것이다. 주(周)나라 시(詩)에서 갈류(葛藟)를 읊은 것 같이 아랫사람을 은총(恩寵)으로 대할 것이며, 제(齊)나라 침실(寢室)에서 계명(鷄鳴)을 알리는 것 같이 나를 깨우쳐 주는 데 게으름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 오직 공검(恭儉)하여야 부귀(富貴)를 지킬 수 있고, 오직 우로(憂勞)하여야 편안함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상복(象服)이 이에 빛나니 반드시 다복(多福)하여 영원히 편안할 것이고, 보명(寶命)은 쉽사리 얻을 수 없으니 끝까지 명예를 누리도록 힘쓰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교시(校示)하니, 의당 자세히 알라."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이여(李畬)가 지어서 바쳤다.】
- 숙종실록》 37권, 숙종 28년(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10월 3일 [庚辰] 4번째기사.[1]

아버지는 김명원(임진왜란 초기 도원수)의 4대손이며 소론 계열의 경주 김씨 경은부원군 김주신[2], 어머니는 임천 조씨 조경창의 딸로 가림부부인 조씨이다. 참고로 이때 숙종의 나이는 41세였고, 세자는 본인보다 1살 연하인 15세, 연잉군은 9세였다.

그런데 인원왕후의 간택은 당시에도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 아직 노년이 되지 않은 숙종의 나이와 국모의 자리를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성리학(유교)적 명분 때문에, 숙종이 언젠가 새 왕비를 맞는 것 자체는 별 논란 없이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일렀다는 게 문제였다. 사가에서도 정실부인이 죽으면 도의상 3년상은 치르고 새 장가를 드는게 당시 관례였고, 숙종의 조상인 선조인조도 각각 계비를 들일 때 이 원칙은 지켰다. 그런데 숙종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채 1년도 안 됐는데도 새 왕비 간택을 서둘렀는데, 이는 연잉군을 중심으로 날로 세력이 팽창하고있는 숙빈 최씨노론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인원왕후의 집안이 소론인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한듯. 역시 환국정치의 대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원왕후는 숙종의 의도와 다르게 훗날 노론의 지주연잉군과 손을 잡는다.

결국 판윤 이인엽이 이 문제로 '간택을 나중에 하든가 정 지금 간택을 해야겠으면 처자를 별궁에 모셔두었다가 왕비로 책봉시키시든가, 하여튼 인간된 도리로 마누라 상 정도는 제대로 치르고 장가 가시죠?'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발칵 뒤집힌 숙종은 괘씸하다며 그 자리에서 이인엽을 곧바로 파직시켜 버리고 만다. 하여간 성질머리 하고는 그런데 인현왕후인경왕후가 죽고 1년도 안 돼서 왕비가 됐다.[3][4][5]

또한 간택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사실 숙종이 제일 마음에 들어했던 규수는 맹만택[6]의 딸이었다고 한다. 인현왕후, 희빈 장씨, 영빈 김씨, 숙빈 최씨캣파이트(궁중 여성간 암투)에 질려 있었던 숙종은 간택을 하면서 규수의 도덕성과 순종을 특히 강조했는데, 맹만택의 딸은 그런 숙종의 구미에 딱 맞는 규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규수의 외할아버지이자 덕흥대원군의 5대손이었던 이홍일이 평소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과 거만한 언행으로 사람들에게 미움받던 게 결정적인 결함 사유가 되어 결국 맹만택의 딸은 탈락하였다. 그리고 대신 간택된 것이 당시 순안 현감이었던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그녀에 대한 애정이 그리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7] 그리고 인원왕후는 엄격한 궁중 생활, 장난아니게 까다로운 나이 많은 남편, 나이 차이 별로 안 나는 의붓 아들들 사이에서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던 것 같다. 입궁하자마자 1년 만에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종기, 피부병, 전염병 등, 이런 저런 병을 달고 살았다. 그런 탓에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왕비 시절 인원왕후에 대한 기록은 "중궁(中宮)이 무슨 무슨 병을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내가 몹시 기쁘다"라는 숙종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발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숙종과의 사이에 후사는 없었다. 인현왕후야 입궁 당시에 숙종과 사랑이 무르익었던 연적 희빈 장씨가 있었고 5년이란 긴 시간동안 폐비가 되어 궁을 나가 있었으며, 왕비로 복위된 이후에도 폐비 시절 때 얻은 병 때문에 임신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인원왕후는 왕비로 책봉되던 당시에 장희빈같은 연적도 없었고 나이 든 후궁들에 비해 꽃다운 젊은 나이였으며, 심지어 인경왕후[8]인현왕후[9]보다 더 긴 18년이란 긴 시간을 숙종과 함께 했는데도 단 한 번의 임신도 하지 못했다. 이걸 보면 숙종에게 인원왕후는 명목상의 왕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듯. 심지어 숙종은 가장 긴 시간 동안 함께 있었던 인원왕후도, 정비였던데다 본인과 금슬도 좋았던 인경왕후도 아닌 인현왕후의 곁에 역시 쓰레기 묻히길 원했다.[10]
명릉이 다른 왕릉과 다르게 뭔가 이질적인 형태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명릉이 애초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으로만 조성되었다가 이후 인원왕후가 본인도 명릉에 묻히고 싶다고 영조에게 요구해 인원왕후의 능이 우격다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11]실제로 명릉을 보면 사이좋게 붙어있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에 비해 인원왕후만 저 멀리 떨어져 외롭게 있다. 게다가 숙종이 아끼던 고양이인 금손이가 숙종의 묘역 옆에 묻혀있음을 보면 사실상 애완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셈일지도.[12]

2.2. 연잉군 왕세제 책봉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세자가 왕으로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당시 왕실에는 인원왕후보다 윗대의 대비들이 없었기에 34살의 젊은 나이에 왕실 최고 서열이 된 것. 인원왕후는 병약한 경종의 후계로 연잉군, 즉 영조를 지지하였다. 경종 즉위 다음 해인 1721년에는 언문 교지를 내려 영조를 양자를 삼고 왕세제를 책봉을 하였다. 그러나 뒤이은 신임옥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론과 소론의 아귀 다툼이 시작되었다.

1721년 신왕(新王) 경종은 후사가 없었지만 아직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경종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17세의 중전 선의왕후는 숙종의 총애와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세자 시절 경종의 지위를 흔들었던 밉살스러운 시동생 대신 소현세자의 현손이자 밀풍군의 장남이며 경종의 9촌 조카인 관석(觀錫)을 경종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올릴 계획을 세웠다는 말이 있다. 이게 명분이 아예 없는 행동은 아닌 것이, 종법상 장유유서의 원칙에 따라 후사는 가급적 아래 항렬에서 찾았기 때문에 종손에게 아들이 없으면 종손의 남동생에게 종가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종손의 조카이자 종손의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다면 경종 역시 같은 항렬인 연잉군 말고 한 항렬 아래인 관석을 후사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왕위 계승에 있어서는 왕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깝냐도 고려 대상이기 때문에 그냥 조카도 아니고 9촌 조카가 꼭 동생보다 순서가 앞선다고 볼 수도 없다. 동생이라서 안 된다기에는 태종이 형의 양아들이 되어가면서 후사를 잇기도 했고, 명종은 아예 형 인종의 왕위를 동생 자격으로 물려받은 선례도 있었다.

9촌 조카라서 안 된다면 조카를 세우는 것도 방법이다. 당시 영조에게는 후일 진종으로 추봉되는, 미래의 효장세자가 있었으므로 이 조카를 양자로 들이고 연잉군은 대원군호를 내려주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면 경종 사후 연잉군의 아들이자 경종의 아들이 집권하면서 혼란한 가운데 노론이 세력이 꺾이기를 기대해 볼 수도 있고. 그런데 이 아이는 연잉군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으므로 왕의 양자로 삼기에는 격이 떨어졌다.

이를 듣고 몹시 놀란 노론은 선의왕후의 계획이 더 구체화되기 전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선빵을 치기로 결정했다. 정언 이정소의 상소를 시작으로 대계(大計), 즉 후사를 정할 것을 경종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새벽 2시에 김창집, 이건명, 민진원 등 거물급 노론 대신 13명이 창덕궁 시민당으로 몰려와 어서 빨리 국본을 정하자며 왕을 반 윽박지른 것. 연잉군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노론 대신들이 요구하는 '국본'은 물론 연잉군이었다. 그 모든 것을 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경종이 결국 굴복하자 김창집 이하는 더 나아가 대비인 인원왕후에게까지 그 증거로서 직접 손으로 쓴 수필을 받아내자며 경종을 들볶았다.[13] 이 때 청을 받은 인원왕후는 경종에게 수필 2장을 내주었는데, 1장은 한문 해서체로 "연잉군", 다른 1장은 한글로 "효종'' 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어찌 딴 뜻이 있겠소라고 쓰인 것이었다.

날이 밝은 뒤에야 소론은 노론 대신들이 벌인 엄청난 짓을 알고 광분하여 뒤늦게 감히 떼거지로 몰려와 왕을 협박한 노론 대신들을 처벌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되려 총대를 메고 상소를 올린 소론 유봉휘, 그런 유봉휘를 지원 사격한 조태구만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연잉군으로서는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식 왕세제(王世弟)가 된 것이며[14] 연잉군을 후사로 삼는 것에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경종 대신 연잉군이 왕세제로 즉위하는 데 쐐기를 박는 역할을 담당한 게 인원왕후였던 셈.

본인이 왕세제로 점찍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이후 연잉군을 옹호하였다. 박상검 사건이 일어나 경종과 왕세제 이금이 불화가 생겼는데, 이를 안 대비 인원왕후는 자교를 내려 처벌을 감행해 위기에 몰린 연잉군을 구하기도 했다. 연잉군은 이때 박상검에게 단단히 격노하여 훗날 왕이 되고서도 죽을 때까지 툭하면 박상검 이야기를 꺼내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2.3. 영조 즉위 이후

이러한 연유로 영조 등극 이후 대왕대비에 올라, 후한 대접을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영조와는 명목상 모자지간이긴 하나 나이는 고작 7살 차밖에 안 났으니 어찌 보면 누나와 남동생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영조가 즉위한 후에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더불어 영조사도세자의 대립이 극도로 격화될 때 두 사람의 중재를 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 1757년 불과 한 달 사이 인원왕후 및 정성왕후 고부가 모두 사망[15]한 뒤 부자의 관계는 다들 알다시피 막장의 막장으로.

3. 성격

온후(穩厚)하면서도 심지 강한 성격으로 보인다. 인원왕후는 어려서 일찍 궁에 들어와서 그런지 왕실의 법도를 엄하게 가르쳤다. 일례로 대천록(大遷錄)에 따르면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가 역시 영조의 후궁이자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함부로 대들었다. 당시 궁중 예법상으로 세자의 어머니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16] 인원왕후는 이를 알고 크게 노해서, 세자와 영빈 앞에서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고 한다. 이 일화는 나중에 사도에도 그대로 묘사된다.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인원왕후를 "궁중 예법을 잘 지킨 사람"이라고 적었다. 혜경궁 홍씨영조옹주들이 같이 있을 때면, 가장 어른인 인원왕후가 나서서 장차 왕비가 될 혜경궁 홍씨를 늘 상석에 앉혔다고 한다. 당시 궁중 위계질서 중 하나로 윗사람 앞에 앉을 때는 아랫 사람이 정면으로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야 한다는 곡좌(曲坐)라는 예법이 있었는데, 인원왕후는 이를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화유옹주가 좁은 방에서 의도치 않게 법도를 어기자 인원왕후가 엄하게 옹주를 지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궁중의 예법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인원왕후 사후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는 세자의 악화되는 광증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의붓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으며,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사도세자 역시 인원왕후를 잘 따랐다. 인원왕후가 매일 사도세자를 끼고 밥을 먹여서 애가 뚱뚱해졌다고 영조가 투덜거릴 정도였다. 만약 인원왕후가 좀 더 장수했더라면,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심해져서 미치광이가 되지 않고 죽음을 면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믿고 따르던 할머니 인원왕후와 적모 정성왕후가 죽자 정신건강이 크게 나빠졌다.[17] 사도세자는 생의 마지막 순간 인원왕후의 빈소인 통명전(通明殿)의 부속 건물에 머물렀다.

죽기 전에 친정 부모에 대해 회고하고 그리워하는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妣遺事)를 남겼다. 2007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정하영 교수가 발굴해[18] 한국문화연구 11호(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소개했는데 한중록처럼 현존하는 유물이 얼마 없는 왕실 여성의 한글 문집으로 가치가 높다. 분량은 15쪽~17쪽 정도로 많지 않은데, 그녀의 아버지 김주신은 "궐에 드나드실 때마다 신고 있는 신발 코끝만 보고 다니며 곁눈질하시는 법이 없어 10년이나 모셨던 나인조차 얼굴을 못 알아보시더라"거나, 왕비인 딸이 불러서 만나러 와서도 높은 사람 대하듯 어려워하면서 조금 드시라고 다과를 내놓아도 "궁에서 만든 귀한 음식인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입에 댈 수 있겠는가"라며 한사코 거절했다고 하고, 어머니 가림부부인 조씨 역시 딸을 만나러 궁에 들어왔다가 궁 안에서 하루 자게 될 때도 딸보다 먼저 일어나서 침전 밖에서 기다리거나, 이야기할 때도 궁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딸에게 꺼내지 않고 딸을 모시는 상궁이 들어와서 뭔가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깥으로 나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등 궁 안에서 극도로 몸을 사리고 친딸 앞에서도 군신의 예를 차리며 처신에 조심했던 모습이 짠하기 그지없다.#1#2#3 이밖에 <륙아뉵장>이라는 인원왕후 자신이 읽었던 문학 작품을 모은 39쪽 분량의 글도 남겼다.

구한말 조선의 내각을 이끌며 개화 정책을 이끈 김홍집은 인원왕후의 먼 후손이다. 김홍집은 인원왕후의 형제인 김후연(김주신의 장남)의 4대손이기 때문.

4. 미디어에서의 인원왕후

궁중암투의 상징으로 날카로운 이미지로 나오는 희빈 장씨, 인현왕후와는 다르게 인원왕후는 대왕대비를 오래한 인물이다 보니 보통 자애로운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오는 사극이 대부분이다.

[1] 출처.[2] 김주신은 박세당의 문인으로 굳이 따지자면 소론 계열에 가깝다. 외척임에도 일선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근신하였으며 그의 딸 인원왕후가 영조의 즉위를 도왔기 때문에 벌어진 오해인 듯하다.[3] 인현왕후와 혼례를 치른 건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강력한 뜻이었다. 게다가 숙종은 천성적으로 체질이 허약한 편이고, 이 시기에 후사도 없었기에 국왕인 숙종이 쓰러지는 순간 나라에 위기가 닥쳐올 건 뻔한 상황. 그렇기 때문에 모후 명성왕후의 강력한 주장을 신하들이 인정해주면서 인현왕후가 간택된 것이다라고는 하나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가 내려야할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명성왕후가 추진한 일이었다.[4] 물론 숙종 본인도 계비를 빨리 들여야할 명분이 없는건 아니었는데, 세자인 경종이 당시 14~15살로 결혼만 했지,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완전한 성년이 아니었기에 숙종 본인이 급사하면 계유정난 같은 피바람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숙종 본인이 자식이 없을 때는 오히려 왕실 웃어른이 두 명이나 멀쩡히 살아있었기에 3년상도 안치른 채 월권까지 행사하며 계비를 들인 것은 명분이 부족했지만 숙종이 인원왕후를 맞아들일 당시에는 어머니인 대비 명성왕후, 계증조모인 대왕대비 장렬왕후 둘 다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넘은 상태라 왕실 웃어른이 없기에 오히려 명분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계비를 맞아들이는데 문제가 없었다.[5] 실제로 숙종의 직계조상인 세조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주 원인이 바로 아버지 세종, 형 문종이 정비인 현덕왕후-소헌왕후의 3년상을 치르느라 계비를 들이지 않은 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 탓이 컸다. 단종 복위(추존) 작업까지 한 숙종이라면 당연 본 직계조상인 세조가 이러한 이유로 계유정난을 성공시켰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을테니, 더욱 인원왕후를 급하게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6] 세종대왕 때의 명신인 맹사성의 후손. 현종의 장녀 명선공주와 약혼하여 숙종의 매형이 될 뻔했지만, 명선공주가 혼례 직전 급사하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이후 출사하여 대사간에 이르렀다. 송시열의 직계 문하생으로 노론 계열.[7]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간택이 숙종의 정치적 목적이자 선택이었으니.[8] 세자빈과 왕비시절을 합하면 총 9년[9] 폐비시절을 제외하면 총 15년[10]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이라 하고, 능호(陵號)는 그대로 명릉(明陵)이라 칭하였다. 【대개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먼저 명릉(明陵)에 장사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명(遺命)에 따라 같은 영역(塋域)에 장사지냈다.】 12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에 장사지냈다. - 《숙종 46년 6월 13일 무신 3번째기사》[11] 새 능을 명릉(明陵)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자성(慈聖, 인원왕후)이 기필코 명릉 곁으로 뒷날 계책을 삼고자 한 까닭에 미리 간좌(艮坐)의 언덕을 점지하여 산도(山圖)를 임금에게 맡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대신들에게 간심(看審)하도록 명하였다. - 《영조 33년 4월 4일 을축 1번째기사》[12] 하지만 숙종과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는 물론 장희빈까지 모두 서오릉 경내에 가까운 곳에 묻혀있는데, 숙빈 최씨만이 저 멀리 파주에 따로 떨어져 묻혀있는 걸 생각하면 묘하다.[13] 조선 왕실에서 정희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 조씨 등 대비들이 왕실의 어른으로서 왕의 후사를 지명하는 경우는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왕이 별달리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해버리는 바람에 대비 외에 의사 결정권자가 없을 때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왕을 두고 대비에게 허락을 받자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왕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경종은 이를 허용하지만, 이때 노론의 행태를 속에 담아뒀는지 얼마 안가 신임옥사가 터진다.[14] 태종은 형식적이나마 형의 양자로 들어갔기에 정식 칭호는 '왕세자'였다. 이후 순종의 후계자인 영친왕(의민태자)도 태종의 선례를 들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왕의 동생인 후계자 중 '왕세제'로 봉해진 건 연잉군이 유일하다.[15] 고부라고는 하지만 나이는 고작 6살 차이에 불과했다. 즉, 둘이 비슷한 나이에 사망한 것이다.[16] 영빈 이씨는 숙의 문씨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을 뿐더러 세자의 생모인데다, 품계 상의 차이도 있었다. 빈이 정1품, 숙의 는 종2품. 심지어 이 시기 문씨의 품계는 아직 정4품 소원에 지나지 않았다.[17] 인원왕후의 상중에 침방나인인 빙애와 사통을 하고 후궁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무리 궁녀들이 왕의 여자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왕보다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다른 전각의 궁녀, 그것도 상전인 대왕대비의 궁녀를 후궁으로 삼는 건 대단히 눈치보이는 행동이었다.[18] 충주의 개인 소장자로부터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19]제3세대 우뢰매 6》에서 데일리 역을 맡았다.[20] 실제로 소론이 연잉군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1] 27화에 갑자기 상복을 입는데 인원왕후와 정성왕후가 죽고 상을 치르는 것이다.[22]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주인공이다보니 영조를 지지한 노론을 제외한 남인, 소론이 철저한 악역으로 묘사된다. 보통 노론이 악역으로 묘사되는 타 작품과 구별되는 특이점.[23] 심운택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