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종의 왕후에 대한 내용은 장경왕후(고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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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 章敬王后 | |||
희릉 능침 | |||
출생 | 1491년 8월 19일(음력 7월 6일) | ||
조선 한성부 호현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북창동 일대) | |||
사망 | 1515년 3월 26일(음력 3월 2일) (향년 23세)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능묘 | 희릉(禧陵) | ||
재위기간 | 조선 숙의 | ||
1506년 ~ 1507년 9월 20일 | |||
조선 왕비 | |||
1507년 9월 20일 ~ 1515년 3월 2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파평 윤씨 | |
부모 | 부친 파원부원군 윤여필[1][2] (坡原府院君 尹汝弼, 1466 ~ 1555) 모친 순천부부인 순천 박씨[3] (順天府夫人 順天 朴氏, ? ~ 1498) | ||
형제자매 | 1남 2녀 중 차녀[4] | ||
배우자 | 중종 | ||
자녀 | 1남 1녀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봉작 | 숙의(淑儀) → 왕비(王妃) | ||
전호 | 영경전(永慶殿) | ||
휘호 | 숙신명혜(淑愼明惠) → 선소의숙(宣昭懿淑) | ||
시호 | 장경왕후(章敬王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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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1번째 계비. 인종의 친어머니이며 성종과 정현왕후의 며느리이다.2. 생애
본관은 파평.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이다. 어린 시절 큰이모인 월산대군의 아내 승평부대부인 박씨의 집에서 자랐고 남편 중종이 즉위한 해에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로 책봉되어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중종의 첫 왕비인 신씨는 하필 본인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폐주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터라 친정 전체가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반정 세력의 요구에 따라 7일만에 폐출되었다. 이후 비어진 국모의 자리에 숙의 윤씨가 왕비로 간택되는데 장경왕후의 친정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할 만큼 당대 최고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 가문이고[5] 결정적으로 외삼촌이 중종반정의 1등 공신인 박원종이었으며 월산대군에게는 처조카가 되니 정황상 숙의 윤씨가 중종의 후궁들 중 다음 왕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비가 된 이후 1511년(중종 6년)에는 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6]를 낳았고 1515년(중종 10년)에는 적자인 원자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이튿날 새벽 병세가 매우 중해지자 일어나 앉아 손수 글을 써서 상께 아뢰기를 '어제 첩의 마음이 혼미하여 잊고 깨닫지 못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지난해 여름 꿈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 하므로 써서 벽상에 붙였었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0년(1515) 3월 7일 4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중종 10년(1515) 3월 7일 4번째 기사
죽기 전에 당시 원자였던 인종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렇게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인종은 피휘하기 위해서 '호(峼)'로 이름을 고친다. 장경왕후가 죽은 후 왕비로 책봉된 중종의 셋째 왕비는 장경왕후에게 삼종질(9촌 조카)이 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희릉(禧陵)[7]이다.
3. 기타
-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을 나눌 때 대윤의 우두머리가 되는 윤임이 장경왕후의 친오빠이다. 이 때문에 을사사화 당시 윤임을 비롯한 장경왕후의 친정 가족들은 문정왕후와 소윤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그나마 장경왕후의 친아버지 윤여필은 나이가 많아서 잠시 용인에 유배를 갔다가 문정왕후가 '윤여필은 장경왕후의 지친(아버지)이므로 특별히 방면한다'라고 말하며 풀어주었다.
- 어째 죽고 난 뒤에도 편치 못했다. 첫번째는 본인이 죽고도 20년이 지난 1537년(중종 32년)에 벌어졌는데 김안로 세력은 장경왕후 사후에 능을 조성했을 때 돌이 나왔다며 국모를 매장하는데 좋지 못한 자리를 썼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천장(이장)이 결정되었는데 몇달 뒤 김안로가 몰락해서 실제로 옮겨지진 못한 듯, 두번째는 명종 시기인데 중종이 죽은 후 중종은 장경왕후 곁에 묻혔는데 문정왕후가 어째선지 중종의 능을 멋대로 옮겨버렸다.
- 남편인 중종과 공통 조상을 3명이나 같이 둔 먼 친척지간인데 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을 공통 조상으로 보면 서로 8촌지간[8]이고 조선 3대 왕 태종을 공통 조상으로 보면 10촌지간[9],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공통 조상으로 보면 9촌지간[10]이다. 그리고 시아버지가 이모부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와 유사한 점이 많다, 후궁이었다가 정실이 된 것, 전임자가 모종의 이유로 쫓겨난 것, 딸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것,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한 것, 아들이 자신의 지위에 위협 받은 것, 아들이 왕위에 오른 기간이 짧은 것, 아들이 후사를 보지 못한 것 등이 있다
4. 가계
- 친정(파평 윤씨)
- 시가(전주 이씨)
- 배우자 / 자녀
5. 대중매체에서
- 1996년 KBS 드라마 <조광조>에서는 배우 박주미가 연기했다. 처녀 시절 경빈 박씨, 희빈 홍씨 등과 같이 입궁한 후궁 중 한명으로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경빈과 희빈이 첩지를 받았을 때도 혼자 첩지를 오랫동안 받지 못하는 등 처녀 신분으로 궁에 머무르고 있다 뒤늦게 후궁에 책봉된다.[14] 기본적으로 성품이 매우 어질며 주로 희빈 홍씨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걸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산고로 왕비가 되고나서 인종을 출산하다 사망할 때 희빈 홍씨가 매우 슬퍼해주기까지 한다.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오아랑이 연기했다. 경빈 박씨에게 비상 섞인 잣죽을 받는 등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들의 견제를 받다가 효혜공주와 원자를 낳고 승하한다. 26회에서 경빈이 유산하던 날 밤에 경빈의 꿈에 나타나 과거 원자를 잉태했던 당시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잊었냐며 복중의 태아를 데려가겠다 한다. 58회에서는 정난정이 암자에서 문정왕후 소생의 아들이 태어나서 대통을 잇기를 빌자 꾸짖는 환상으로 등장했다. 그 꿈이 신경쓰였던 정난정은 다음 날 곧바로 하산했고 얼마 후 원자가 세자로 책봉(70회)된다. 문정왕후 소생의 아들 경원대군이 태어나고 명종이 된 건 한참 뒤(135회)의 일이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9년 동안 중궁에 있으면서 스스로는 엄격하면서 아랫사람에게 후덕해 칭송이 많았다고 했다.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고보결이 연기했다. 극중 이름은 명혜로[15] 드라마가 단경왕후의 폐출을 전후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왕후가 된 모습은 등장하지 않으며 남주인공인 이역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여주인공인 신채경과 미묘한 관계가 되지만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중전의 자리에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 네이버웹소설에서 연재되는 유오디아 작가의 <조선공주실록>에서는 윤여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 다만 중종이 진성공주로 여성화되어 등장하므로 왕후로 등극하지는 않고 진성공주의 이복남동생인 영산군과 혼인했다.
- 신비아파트 특별판: 조선퇴마실록의 등장인물 왕비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다만 산후병으로 죽은 실제 역사와 달리, 여기서는 반란을 일으킨 조선각귀로부터 남편을 보호하려다 죽었다.
6. 참고 문서
[1] 효령대군의 증손자.[2] 효령대군 → 영천군 → 윤보의 처 이씨 → 윤여필[3] 박중선의 딸로 박원종의 누이이자 월산대군의 정실인 승평부대부인 박씨의 여동생이다.[4] 장녀는 월산대군의 아들인 덕풍군의 아내이다.[5] 중종의 모후인 자순대비와 같은 집안이다.[6] 효혜공주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와 혼인하면서 사돈 관계가 된다.[7] 이 능은 사연이 참 많은데 처음에 묻힐 때 무덤을 조성하던 과정에 그 자리에 돌이 20수레나 나왔다고 하여서 몇 자 아래에 묻히게 되었다. 자그마치 20년 뒤에 김안로가 언급해서 천장하고 그 때 있던 사람들 벌을 주는데 말이 "왜 국모를 그딴 곳에 묻냐"는 것이지, 사실은 정광필을 벌주기 위함이었다. 또 나중에 중종이 죽으면서 같이 묻혔는데 문정왕후가 대왕대비 시절 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어서 묘소를 옮겼지만 문정왕후 사후 중종이 또 묘소가 현재의 서울 강남구 지역인 선정릉 구역으로 옮겨지면서 중종의 세 왕후 중 어느 쪽과도 먼 곳에 묻히게 되었다.[8] 중종과 장경왕후 모두 윤번의 현손들이다. 중종은 윤번의 막내딸 정희왕후의 증손이고 장경왕후는 윤번의 차남 윤사윤의 증손이다.[9] 중종과 장경왕후 모두 태종의 5대손들이다. 중종은 태종의 3남 세종의 현손이고 장경왕후는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현손이다.[10] 중종은 심온의 5대손이고 장경왕후는 심온의 현손이다. 중종은 심온의 장녀 소헌왕후의 현손이고 장경왕후는 심온의 막내딸 심씨 부인의 증손이다.[11] 조선 중종의 외척, 장경왕후를 위시한 대윤파의 거물급 정치인이다.[12] 세조의 손자인 월산대군의 서자이다. 항렬상으로 보면 남편 중종과는 4촌 관계가 된다.[13] 당대의 권신인 김안로의 아들이다.[14] 아무래도 정난공신 박원종의 외조카이다보니 지나치게 권력이 커진 박원종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오랫동안 후궁 첩지를 내리지 않은 걸로 추정된다.[15] 완전한 장경왕후는 아니고 살짝 가공이 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