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繼后황제 또는 자주국왕의 후처를 이르는 말이다. 제후국왕(예. 조선[1])이나 대공(혹은 그보다 낮은 급의 군주)의 후처는 계비(繼妃)라고 한다. 전 황후·왕후가 사망 또는 폐출된 후 새로 들인 황후·왕후. 후처라 해도 엄연한 임금의 정실부인이며 후궁과는 다르다.
나이 어린 임금이 전처와 일찍 사별한 경우 임금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2], 보통 계후는 임금의 나이와 상관없이 혼인 적령기의 여성이기 때문에 임금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다만 유럽권의 경우 여성의 재혼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왕후였던 여인도 딱히 자식이 없이 왕이 죽으면 다른 나라의 왕후로 시집가기도 했다.[3]
계후가 입궁했을 때는 이미 원후 소생의 황자가 후계자로 정해져 계후가 왕자를 낳더라도 후계에는 변동이 없는 경우가 많다.[4] 그러나 원후가 왕자를 낳지 못하고 후궁 소생의 왕자가 태자인 경우 계후가 왕자를 생산하면 후계구도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5]
다만 왕 본인이 매우 늙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자식을 더 낳을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계비를 들이는 경우엔 후계자인 왕자 입장에서 큰 후견인이 생기게 된다.[6] 특히 왕자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 특히 이런데, 이럴때 법적 어머니이자 왕대비가 된 계비가 수렴청정으로 어린 왕을 보호할수 있다. 계비 입장에서도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이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내지 외척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왕을 등에 업어야하기 때문에 왕이 어리지 않더라도 후견인을 자처해서 법적 자식인 왕을 보호해야 한다.[7]
2. 목록
- 일부다처제에 의한 둘째 정실부인[8]은 포함 X
- 자식이 왕이 된 경우 ☆ 표시
2.1. 한국사
2.1.1. 신라
2.1.2. 고려
- 원성왕후☆ - 현종
- 원목왕후 - 현종
- 용의왕후 - 정종
- 용신왕후 - 정종
- 사숙왕후☆ - 선종
- 순덕왕후☆ - 예종
- 문정왕후 - 예종
- 공예왕후☆ - 인종
- 선평왕후☆ - 인종[9]
- 성평왕후 - 희종
- 경창궁주 - 원종
- 조국장공주 - 충숙왕
2.1.3. 조선
- 안순왕후 - 예종
- 폐비 윤씨☆, 정현왕후☆ - 성종
- 장경왕후☆, 문정왕후☆ - 중종
- 인목왕후 - 선조
- 장렬왕후 - 인조
- 인현왕후, 희빈 장씨☆, 인원왕후 - 숙종
- 선의왕후 - 경종
- 정순왕후 - 영조
- 효정왕후 - 헌종
- 순정효황후 - 순종
2.2. 중국사
전한후한
당
송
청
2.3. 세계사
네덜란드-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 ☆ - 빌럼 3세
브라질 제국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제국
잉글랜드 왕국
영국
웨식스
레온 왕국
[1] 갑오개혁으로 제후국 체제를 청산하고 자주국으로 전환. 그때부터 '왕비'는 '왕후'로 격상되었다.[2] 실제로 조선 24대왕 헌종과 그의 계비 효정왕후는 4살 터울인데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16살(당시 헌종은 17살)로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다.[3] 자식이 있어도 재혼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가령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루이 7세와 슬하에 딸이 2명이 있음에도 이혼(혼인무효) 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에게 시집갔으며, 19세기 독일 라이닝겐 후작부인이던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는 남편 라이닝겐 후작 에리히 카를 사후 후임 후작인 아들 카를의 섭정 후 영국의 왕자이던 켄트 공작 에드워드에게 재가하여 후일 영국 여왕이 되는 딸 빅토리아를 낳았다.[4] 다만 권력적인 측면에서 보면 변동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만약 계후의 권력욕이 비인간적으로 강하면 원후의 왕자를 어떻게든 몰래 죽인 다음 자신의 왕자를 후계자로 만들어 왕좌에 올리려는 위험이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성선설을 비웃듯이 그런 위험과 실제 사례가 참 많다는 것(...) 즉, 아무리 원후 소생의 후계자 입장이라도 계후가 아들이 생긴 순간부터는 아무리 정통성과 권력이 있더라도 목숨 자체는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목숨을 안전히 지킬 방법은 본인부터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을 빨리 낳아 그 위험을 분산시키거나 비정하지만 계후나 그녀의 아들을 사전에 폐위 등의 방법으로 제거하는 정도 밖에 없으며 그것도 안 되면 그냥 계후가 권력욕이 없거나 딸만 낳길 빌어야 한다. 한 마디로 정실 소생의 후계자도 이래저래 힘든 것. 문정왕후와 인종이 이런 케이스였다, 인종은 끝내 자식이 없었고 문정왕후는 딸만 3명을 낳다가 아들을 낳고 돌변한다.[5] 후궁 소생인 광해군과 계비 인목왕후의 소생 영창대군이 이런 케이스였다.[6] 유일한 문제는 외척을 끌어들인다는건데 왕조 극초기가 아닌이상 외척은 역성혁명을 일으킬 염려가 별로 없는데다, 사실 왕비 입장에선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외척을 끌어들이는건 어쩔수 없는 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도 신하들과 종친들이 외척을 견제만 해주고 왕 본인이 작정하고 외척을 키워주지 않는 이상 외척이 왕 본인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일은 드물다.[7] 서양이라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서양의 일부 국가들의 대비들은 동아시아와 달리 재혼이 가능했지만 권력을 더 중시한 경우에는 일부러 재혼을 하지 않거나 최소한 정부조차 두지 않을정도로 정식적인 연애 하나 하지 않았다. 만약 정식 재혼 내지 연애라도 하는 순간 선왕의 왕비이자 현왕의 (법적) 어머니인 왕대비라는 신분과 명분이 아예 박탈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허울만 남게 되어 권력에서 멀어지거나 본인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8] 이런 경우는 '차처(次妻)'라는 용어가 있다. 제후왕의 부인이라면 차비(次妃).[9] 연덕궁주와, 복창군주가 폐비가 되고 공예왕후보다 먼저 왕비(계비)가 되었지만, 공예왕후가 제1비 선평왕후는 제2비였다. 이렇다 보니 고려사의 기록을 봐도 선평왕후는 차비로 기록되어 있다.[10] 아들은 생전 황태자였으나, 아들의 후손이 한선제로 즉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