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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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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본관 만들기4. 동성동본5. 국가별 양상
5.1. 대한민국5.2. 북한5.3. 일본5.4. 유럽
6. 유사 개념7. 기타8. 관련 문서

1. 개요



시조의 고향. 동아시아에서 성씨와 결부되어 혈연 집단을 구별하는 표지로 쓰인다.

‘관향’(貫鄕)이라고도 하며, 대한민국 법률상 용어는 ‘본’(本)이다.

2. 역사

본관이 처음 생겨난 중국에서는 성(姓)과 씨(氏)가 다른 개념이었기 때문에 본관이 두드러졌다. 은 혈연을 의미하고 씨는 지연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구분하던 풍습은 춘추전국시대에 격동을 겪게 되는데 성은 여자가, 씨는 남자가 물려받는 것으로 변했다가 둘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사실상 성이 씨에 흡수되었다. 중국에서는 가문을 소개할 때 "저는 ○○의 n대손입니다."식으로 자신의 조상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도 종친회의 힘이 강한 집안에서는 씨에 해당하는 본관의 분파까지 해서 ○○파 몇대손 누구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름에 다는 일정한 항렬자라는 게 존재한다.

한국의 본관은 940년 고려 태조당나라의 관습을 모방하여 귀족이나 호족 같은 유력자들의 가문을 구분하기 위해 전국 군현에 본관 및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 이전에는 남북국시대의 경우 왕족 및 귀족층의 주요 성씨를 예로 들자면 발해에는 왕성인 대(大) 및 주요 귀족 성씨인 고(高), 장(張), 양(楊), 두(竇)[1] 오(烏), 이(李), 배(裵), 왕(王)씨가 있었고[2] 신라에서는 왕족 3성씨인 박(朴), 석(昔), 김(金) 및 주요 귀족이었던 6부에 하사된 성씨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가야 금관국 계통 김씨가 확인되었으나 이 중 본관까지 사용된 경우는 확인된 바 없다.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백제 위덕왕의 태자 시절 고구려 장수와의 일기토 사례를 보면 양쪽의 장수가 나와서 각자의 가문과 선조 등에 대한 얘기를 얘기하고 이름을 나누는 것으로 되어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굳이 중국에서 확립된 본관성씨제가 아니라도 가문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삼국시대에도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에 의하면 신라에 편입된 가야계 김씨(김해 김씨)는 신라 사회에서 자신들을 신라계 김씨(경주 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신김씨(新金氏)라는 이름을 써서 구분하는 관념을 찾을 수 있다.[3] 황룡사 찰주본기에 있는 인명 명단을 봐도 김현웅과 김평긍 두 사람은 신김씨라고 따로 표시하고 있어, 한자가 같은 두 김씨의 가문을 명확히 구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후삼국시대의 인물들이 성+이름, 이름으로 표기가 혼용되는 경우가 많아 고위귀족이나 호족, 원래 성씨에 대한 전통이 있던 중국계가 아닌 경우는 성씨가 보편적으로는 쓰이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가문에 대한 개념으로 조상의 이름이나 옛 부족명 등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고구려를 정탐한 중국인의 기록에 성씨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고, 의외로 귀족들도 사서상으로는 성씨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의 후손이라는 식의 이름 대기가 가문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신라, 가야의 초기 금석문을 보면 지명, 부족명, 관직명 등을 이름에 같이 붙이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사자에 대한 설명을 보조하고 있으며, 일본의 사서인 신찬성씨록을 봐도 삼국 유민들에 대한 성씨를 분정할 때 ~의 후손이라는 설명을 꼭 곁들인다.[4] 당장 현대에도 중동아랍어권에서는 이름에 조상의 이름을 나열하는 식으로 붙여 가문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5] 서양에서도 성씨에 붙는 ~의 후손이라는 식의 슨/손(Son) 맥(Mac), 오(O) 등의 흔적이 남아있어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튼 고려시대 초기부터는 한국에서도 본관성씨제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후 고려 문종 대에 과거 제도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관과 성씨를 기입하게끔 하면서 양인 계층(귀족+평민)에 대한 본관성씨제의 보급이 대폭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현대의 본관 개념은 후삼국시대고려 시대를 거치며 가닥이 잡혔기 때문에[6] 현재 대부분의 본관도 고려 초의 영토였던 평안남도-원산 이남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평안북도~함경도의 북한 지역에 본관을 둔 경우가 흔치 않다. 물론 그 지역들에 본관을 두는 경우가 아예 없진 않으나 이러한 경우 대부분 오래 전 성립된 전통적인 가문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도 조선 중후기부터 군역과 조세를 피하기 위해 상민들이 양반계층의 족보를 매매하면서 본관의 통폐합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각종 전란 등의 이유로 양반이 잘 없어서 차별당하던 저 지역들의 본관을 쓸 이유가 없으므로 기피되었던 것도 있다.

고려 대 본관의 기능은 후대와는 달리 단순한 혈통 구분만으로 한정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호족 등의 지역공동체가 연합하여 성립된 고려의 특성상 본관은 어떤 가문의 세력이나 지위, 출신 배경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주지를 함부로 옮기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본관만으로도 가문의 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진 13세기부터는 정부의 통제가 먹히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 전란 중엔 각자가 알아서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이동이 확산된다.

조선 대 본관의 기능은 자신의 혈통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자신과 동일한 혈족 집단끼리의 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동성동본 간의 혼인이 금기시 내지 금지되면서 동족끼리의 혈통이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써 기능했다. 이 개념 때문에 역사적 인물들의 고향에 대한 혼란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시대까지는 사람을 무조건 본관 지역의 사람으로 취급해 실제 출생지나 활동 거점과 괴리가 생기곤 했기 때문이다.[7] 고려에서 조선에 걸쳐 같은 본관이라도 세거지별로 구분되어 아예 본관처럼 사용되곤 했던 것도 이러한 괴리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결같이 본관과 성씨를 가지고 있지만 조선 초중기에는 백정과 천민을 중심으로 무성층이 상당수 비율로 있었다.[8] 하지만 부유한 하층 계급이 족보를 사들이면서 신분제에 대한 동요가 시작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 1950년 6.25 전쟁으로 관습적으로나마 남아있던 신분 계급이 완전하게 파괴된 데다가 1909(융희 2)년 민적법 시행으로 누구나 필수적으로 본관을 갖도록 법제화하면서, 모든 국민이 본관과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9][10]

한국에서 성과 씨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할 때 대개 본관을 씨에 대응하는 경우가 많지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성은 같지만 동계(同系)가 아닌 경우(예컨대 횡성 고씨와 제주 고씨의 관계[11])가 있는가 하면 성이 다르나 동계인 경우(경주 김씨와 경주 최씨의 관계[12])도 있으므로, 한국의 성과 본관은 중국의 성과 씨의 역할을 모두 조금씩은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3. 본관 만들기

한국 가족법에서는 성(姓)과 세트로 취급된다. 대한민국 국민인데 성은 있으나 본관이 없다면 그 사람은 귀화한 사람이거나, 아버지가 외국인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어서 한국 국적을 물려받은 한국 국적자이다. 그런 경우에 한국식으로 성을 바꾸려면 본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어도 고아라서 부모의 성과 본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가족관계등록을 창설하기 전에 성과 본을 먼저 만들거나 동시진행을 하면 된다.

북한이탈주민도 가족관계등록을 창설하면서 대부분 본을 새로 만든다. 북한 주민들도 고유의 성과 본이 있었지만 조선로동당 당국이 호족본이 봉건 잔재라는 이유로 불태우고 본관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북한 주민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13] 본인의 원래 본관을 모른다.[14]
위와 같이 본을 창설할 경우에 자기가 거주했거나 거주 중인 지역의 이름을 따서 본관을 창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본관으로 본을 창설하는 것은 해당 문중에서 반발이 있을 수 있기에 대개 불허된다. 미국 출신 귀화 방송인 로버트 할리가 창설한 영도 하씨가 이런 식이다. 귀화 1세대 본인이 부산광역시 영도구에서 살았고 해당 지역에 애착이 있으며, 기존에 영도 하씨라는 본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4. 동성동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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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고대 중국에서 성과 씨가 분류된 뒤 다시 거기서 갈라져 나오는 씨족을 묶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관이 같고 성이 같은 사람은 아무리 먼 친척이라 해도 혼인을 금지하여 같은 혈통끼리 피가 섞이는 것을 방지해 왔다. 이를 동성동본(同姓同本)이라고 부른다.

동성동본 간의 혼인은 고려 시대에는 가능했으나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금기시되었고 1997년 7월 16일헌법재판소로부터 동성동본의 금혼제도의 헌법불합치 결정 선고(헌재결, 1997.7.16. 선고, 95헌가6,13(병합) / 1999년 1월 1일 0시에 효력 상실)가 있기 전까지는 동성동본 간의 혼인은 금지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전까지는 본관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위 헌재 결정으로 인해 동성동본 사이의 금혼은 현재는 폐지되었다. 이후 동성동본 금혼제도는 '근친간 금혼제도'로 대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동성동본 문서를 참조 바람.

5. 국가별 양상

5.1.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본관이 현대에까지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며, 국가에서 가족관계등록부에 전 국민의 본관을 등록해 관리한다.

외국인이 대한민국에 귀화하여 한국식 성을 창설하는 경우에는 본관도 함께 정해야 하며, 북한이탈주민도 자기 본을 잊었다면 새로 정해야 한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이 조선에 창씨개명을 강제할 때에도 조선인의 원래 성과 본은 완전히 폐지하지 않고 호적에 따로 적어 관리하였을 정도였다. 조선인들에게 성과 본이 지니는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을 일본도 알았다는 뜻이다.[17] 아무튼 이 덕에 광복 후 조선성명복구령을 통해 한국인들이 한국식 성과 본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인들이 본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국인의 성이 200여 개에 불과할 만큼 적은 탓도 있다. 실제로 같은 글자를 쓰는 성을 쓰는 사람을 만나면 본관을 물어 집안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

1960년대1970년대 이후 산업사회에 접어들고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 전근대적인 가족 관계보다는 직장, 학교 등 현대적인 사회 관계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특히 2005년 대한민국 민법동성동본의 금혼(禁婚) 조문이 삭제되면서, 본관의 의미가 축소되기는 하였다. 즉, 더 이상 성과 본이 같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법률상 혼인을 하지 못하는 일은 없게 된 것이다.[18] 다만, 법률상 동성동본 혼인이 가능하게 된 것과 별론으로 동성동본 간 혼인을 금기시하는 문화 자체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차츰 유교 문화가 붕괴되고 개인주의가 확산하여 젊은 세대들은 본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어느 파, 몇대 손인지 정도는 몰라도 자기 본관이 어디인지 정도는 대체로 숙지하고 있는 편이다. 상술했듯 성씨의 가짓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적고 그마저도 김이박최로 대표되는 소수의 성씨들이 사실상 인구수를 독점하고 있는 모양새라 본관을 나름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한국에 처음부터 뿌리가 다른 외국인 인구가 유입되면서 한참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본관의 중요성이 다시 부활할 여지가 생겼다.

5.2. 북한

북한대한민국, 일본, 중국과 다르게 본관 및 족보를 강제로 못 쓰게 되어 현재는 공식적으로 쓰이지는 않으며, 다만 2000년대 이후로는 보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기 조상의 본관에 대해 알아내는 경우는 많다.#[19]

물론 공식적으로 본관이 철폐되었다고 해도 북한 주민들이 자신의 본관을 싹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을 정도에는 자신의 본관이 어디인지 아는 경우 정도는 많았다. 부여간첩 김동식은 1980년대에 훈련차 강원도를 방문했을 때 황해도 집성촌 출신 사람들에게 같은 집성촌의 아들뻘 향렬인양 가명을 대서 잘 대접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대가 교체될수록 본관에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서 자기의 본관이 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가령 경수로 작업차 북한에서 체류했던 오영진은 오씨 성을 지닌 북한 주민에게 어디 오씨냐고 물었는데 주민이 그런 거 모른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자신의 본관이 어디인지 모를 경우에는 본관을 알려면 우선 조상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본 다음에 1950년대 이전의 문서들을 뒤져 봐야 하는데 관련 업무자가 아닌 이상 문서고를 열람할 권한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설사 문서를 열람할 권한이 되어서 당대의 문서를 찾더라도 6.25 전쟁 때 미리 대피했거나 평양지하수장고등을 제외하면 많은 문서자료들도 날아갔기 때문에 못 찾을 가능성이 높다.[20] 다만 북한 당국이 주민의 계급을 설정하기 위해 매우 상세하게 조상까지 인적 사항을 정리해두고는 있다고 하는데 이 자료와 남한의 자료를 대조해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2000년대 이후로는 북한에서 광명망휴대전화가 보급되어 보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본관이 어디인지 알아내는 경우는 늘어났지만 이것도 취미가 있는 사람들의 얘기이다.

이렇게 자기 본관을 모르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으로 오게 되어 주민등록상 본관을 신고해야 할 때는 그 성씨에 해당하는 여러 본관들을 보여주고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고 한다. 본관이 실질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데도 굳이 남한 주민등록상에 반드시 본관을 등록하게 하는데, 이는 위에서도 서술되어 있듯 대한민국 국민인데 성은 있으나 본관이 없다면 위화감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5.3. 일본

일본에서는 701년 다이호 율령 제정과 함께 호적제도가 도입되면서 본관 개념이 함께 도입되었다.[21] 이 때에는 각각 지정된 본관지(本貫地)가 있었고, 이 본관지의 호적에 실려 함부로 본관지를 떠날 수 없었다. 도망치다 걸린 경우 도망지에 편입되는 당소편부(当所編附), 본관지로 강제 송환되는 본관환부(本貫還附)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겐페이토키츠로 대표되는 일본의 우지(氏)·카바네(姓) 등 본성(本姓)이 헤이안 시대 동안 소수의 성씨가 너무 흔하게 퍼져 서로를 구분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 이후에는 실질적으로는 이 본관지에서 따온 묘지(苗字, 名字)가 본성 대신에 서로를 구분하는 실질적인 성씨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막부의 무사들은 잇쇼켄메이, 즉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영지를 분봉받았고, 이 영지의 이름(名)에서 딴 가명(仮名)으로써 묘지라는 새로운 성씨를 개창하고 서로를 구분하였다. 이 영지를 일컬어 본관(本貫), 본관지(本貫地, 本貫の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과정에서 시조의 출생지라는 개념과 조상신·토지신 신앙이 합쳐지면서, 본관을 지칭하는 단어가 토지신을 뜻하는 우부스나(本貫·産土)로 읽히게 되었다.

이러한 분봉받은 본관, 본관지 개념에서 나온 名字는 점차 분할 상속에 따라 그 수가 많아졌으며[22], 에도 시대 말기가 되면 사실상 우지와 카바네를 완전히 대체하여 이들은 공문서에서나 쓰이고 실질적으로 묘지가 쓰이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에서 성씨를 묘지로 일원화함과 함께 우지·가바네 등을 모두 폐지하여 현대에까지 이른다.

일본에서는 고대 씨족에서 갈라져 나온 유력 인물들의 후손(특히 무가의 경우가 많다)들이 시조의 영지나 거주지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경우가 많은데, 한국·중국과 다른 점은 본관과 성씨를 함께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본관 자체가 씨(氏)로 쓰였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였던 마츠바라 사다모토(松原貞基)의 경우, 마츠바라(松原)는 본관지인 하리마노쿠니 마츠바라장(播磨国松原荘)[23]을 뜻하는 것이며, 실제 은 미나모토(源)였다. 이렇듯 일본의 본관은 사용 형태가 달랐는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기재할 때는 본관(씨)-관직-성(+카바네)-이름의 순서로 쓰곤 했다. 그리고 성을 쓸 때는 성-본관의 순으로 한국·중국과는 반대로 썼다. 앞에서 예를 든 마츠바라씨의 경우에는 무라카미겐지 아카마츠씨류 마츠바라씨(村上 源氏 赤松氏流 松原氏)로 표기한다.

다만 본관 대신 새로운 성을 만들어 쓰는 인물도 있었는데, 1566년 조정의 허가를 받고 도쿠가와씨(徳川氏)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1566년 개성 이전까지 이에야스의 성은 마츠다이라(松平)로, 본관은 미카와노쿠니 마츠다이라촌(三河国松平村)이었다. 마츠다이라씨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전쟁에서 패해 몰락한 세라다 가문의 후예, 무사 치카우지는 아버지와 함께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환속해서 미카와 지역의 마츠다이라라는 마을에 정착하였고, 그 곳의 영주의 딸과 결혼했다. 이것이 바로 마츠다이라 가문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무장 가문들처럼 내놓을 만한 족보 수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미카와의 지배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게 되자, 조정에 상소를 올려 황족 출신 무가인 세이와겐지(清和源氏) 닛타시류(新田氏流)의 후손을 자처하며 성을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주청했다. 조정은 이를 수락했고, 이에야스는 곧바로 본관이자 성이었던 마츠다이라를 버리고 도쿠가와씨로 개성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씨는 씨와 본관이 다른 몇 안 되는 무가 중 한 가문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버린 마츠다이라 종가의 종손 자리는 그의 아들이 넘겨 받는다.

5.4. 유럽

유럽 귀족들에게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본래 가문명이 따로 있고 자기의 작위가 있는 지역을 따 와서 붙인 성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왕가는 가문명은 카페이지만 발루아, 오를레앙, 부르봉 등등 근거지에 따라 이름이 명칭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필리프 6세는 카페 가문에 속하므로 본명은 필리프 카페가 된다. 하지만 발루아 백작이기도 하기에 발루아의 필리프라고 불린다.

6. 유사 개념

7. 기타

과거 일제 시절 창씨개명이 시행됐을 때는 본관을 그대로 따서 독음만 일본식으로 바꾸는 식으로 창씨하기도 했다.[24] 아무래도 지명이다 보니 일본어로 읽었을 때도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25] 일부는 본관에서 한 자를 따서 기존 성의 글자와 합치거나[26], 본관의 앞 글자를 따서 일본에 흔한 성씨로 창씨하는 경우[27]도 있었다. 지금도 일본으로 귀화하는 재일교포 중 일부는 본관을 그대로 따거나 기존 성의 한자는 두고 본관에서 한 글자를 덧붙여서 일본식 이름을 만들기도 한다.

북한은 본관을 없앴기 때문에 남북통일이 될 경우 민법,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서도 본관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한국에서 가족관계등록신고서는 본관을 적는 란이 혼인신고서는 성명 아래 쪽에 있고, 출생신고서는 성명 오른쪽에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생긴 차이는 아니고, 전자는 신고사건 본인이 두 명(남편, 아내)이기 때문에 서식 디자인상 그렇게 한 것뿐이다.

대한민국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본관을 물으면 본관에 성까지 붙여 말하는 형태('OO + O씨')로 자신의 본관을 밝힌다. 그러나 본관이란 성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조의 고향을 뜻하므로, 본관을 물으면 성을 빼고 말하는 것이 본래 그 취지에 맞는다. 예를 들어 전주 이씨의 경우 "제 본관은 전주입니다.", 경주 김씨의 경우 "제 본관은 경주입니다."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다.

본관은 옛 지명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라 현재는 다른 행정구역에 통합되어 폐지된 행정구역명이 종종 나타난다. 특히 부군면 통폐합으로 폐지된 군의 명칭을 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크게 상관은 없지만 기본증명서나 가족관계 증명서 등의 민원문서를 일본어로 번역하거나 일본어 번역판을 작성할 시, 부분은 本貫(본관)이라고 해야 일본인들이 이해한다.

한 성에 본관이 하나뿐인 경우에는 단본이라고 한다.

8. 관련 문서


[1] 하(賀)의 오기인 쪽을 거의 정설로 본다.[2] 발해인 인명 중 김, 박, 배씨는 신라계 귀화인일 가능성이 높다. 김씨나 박씨는 신라계라는 유래가 명확한 편이지만 배씨는 당나라에도 이미 많았기 때문에 중국계였을 가능성도 높다. 어느 쪽이든 배씨는 귀화계였을 가능성이 높은 게 발해사에서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특정 시점부터 갑자기 늘어난다. 김씨도 중국에 많진 않아도 김일제 등 이미 사용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신라계일 경우보다 가능성은 낮지만 중국계였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다.[3] 비슷한 구분으로 조선시대에 가야계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 신라계 김해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구분했던 사례가 있다. 후김은 이후 김해의 다른 이름인 김녕 김씨를 쓰고 있다.[4] 즉, 그 집단은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었단 얘기.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게 누군가의 후손이라 할 때 시조를 가리키진 않았는데, 조상들 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나 처음으로 본가에서 분적한 인물을 가문이 분기되는 시작점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러시아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집어넣는다.[6] 본관의 기원을 남북국시대로 소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는 성씨 자체가 거의 중앙귀족 혹은 일부 호족만의 극히 한정된 관습이었기 때문에 따로 본관을 사용하진 않았다. 본관 자체가 후삼국시대 각지의 호족들의 등급 매기기용이기도 했기 때문에(XX 출신이다 하면 대호족인지 중소호족인지가 대략 드러났다) 고려가 성립되고 난 뒤에야 출현한다.[7] 예를 들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본관이 전주전주 이씨지만, 실제 출생 및 활동지는 함경도 함흥이었다.[8] 다만 천민이라도 성씨를 가지는 경우는 있었기는 했다. 그야말로 케이 바이스 케이스였다는 것.[9] 한국계 외국인도 한국계인 이상 무조건 본관을 성씨를 함께 가지게 된다.[10] 그러므로 "나는 조선 왕조의 후손이다"라든가 "나는 신라 왕조의 후손이다"와 같은 주장은 종가, 가족이나 친척이 종친회에 연관됐거나 집성촌에 살지 않는다면 거의 의미가 없다. 특히 수 차례의 역사상 격변기(각각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 조선 후기 혼란기, 개화기,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를 겪으면서 제사를 주재하는 장자(長子), 장손(長孫)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누가 누구의 진짜 혈통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11] 전자는 고구려의 국성이고 후자는 제주의 토성(土姓)이라 서로 관련이 없다.[12] 알천의 성이 (진골이니) 김씨라고도 하고 (소벌공의 후손이니) 최씨 혹은 소씨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두 성씨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3] 남북 분단 이전에 청년으로 성장한 노년세대가 살아있어서 본관 및 직계 계보를 기억하거나, 해당 세대가 전한 지식이 구전된 경우[14] 정작 김일성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가문 본관을 매우 신경썼다.[15] 1998년 6월 14일 생부터 아버지가 외국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인 자녀는 한국 국적을 부여받는다.[16] 8촌 이내의 혈족, 4촌 이내의 인척, 배우자[17] 실제 창씨개명 당시 일본의 선전내용은 ‘조선식 성과 본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일본식 씨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다!’였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18] 단, 민법 상 '성씨가 같은 8촌 이내 혈족'은 혼인이 금지되어 있다.[19] 다만 북한 당국이 주민의 계급을 설정하기 위해 매우 상세하게 조상까지 인적 사항을 정리해 두고는 있다고 하는데 이 자료와 남한의 자료를 대조해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20] 평양만 해도 6.25 전쟁 때는 김일성이 건물 두 채만이 남아 있다고 평할 정도로 60~70%가 파괴될 정도로 정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원산도 원산폭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파괴의 정도가 심한데 문서들이 성할 리는 없다.[21] 이 때의 名字는 중국에서 (아자나)를 들여와서 名字(나아자나)로 불렸고, 기존의 겐페이토키츠와 같은 우지(본성)에서 집안 혈통과 가계가 중요해지면서 서로의 집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것 뿐이었다. 코노에, 쿠죠고셋케 가문이 이러한 경우였다. 실질적으로 본관지가 名字를 이루는 것은 이러한 헤이안 시대의 나아자나와 가마쿠라 막부 시대 공가들에서 영향을 받은 무가들이 名字를 만들기 시작하면서이다.[22] 이로 인하여 묘지(名字)의 수는 늘어났으나 주의할 점은 이들의 본성(우지, 氏)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의 남동생은 묘지가 다른 와키야 요시스케(脇屋義助)이지만, 본성인 우지로 표현할 시 모두 미나모토노 요시사다, 요시스케(源義貞, 源義助)가 된다.[23] 현재의 효고현 히메지-아리마 일대[24] 김해 김씨는 카네우미([ruby(金, ruby=かね)][ruby(海, ruby=うみ)])로, 안동 권씨는 안도([ruby(安, ruby=あん)][ruby(東, ruby=どう)])로, 하동 정씨는 카와히가시([ruby(河, ruby=かわ)][ruby(東, ruby=ひがし)])로, 달성 서씨는 타츠시로([ruby(達, ruby=たつ)][ruby(城, ruby=しろ)])로 창씨하는 식.[25] 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씨인 묘지(苗字) 자체가 본래 막부 사무라이 혹은 공가들의 본관지에서 따 오다가 점차 방위, 지형, 직업 등 다른 형태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일단 본관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묘지(≒본관), 우지+카바네(≒성씨) 등등 다양한 성씨들을 섞어 쓰다가 메이지 유신 때에 묘자만 남기게 된 것이기 때문에, 1대1 대응은 어렵지만 한국의 성씨 체계에 대입하면 본관을 성씨로 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26] 안동 권씨는 안켄(安權), 의성 김씨는 카네시로(金城)로 창씨하는 식.[27] 풍양 조씨는 토요타(豊田), 청송 심씨는 아오키(靑木)로 창씨하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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