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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7:49:29

이와이의 난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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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의 대외 전쟁
<colcolor=#fff> 이와이의 난
磐井の乱
시기 527년 6월 3일 ~ 528년 11월 11일
장소
츠쿠시국(筑紫國, 현재의 후쿠오카현 일대)
원인 야마토 세력의 정치적 불안정과 이에 따른 구주(九州) 세력의 자립 시도, 가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백제신라 사이의 세력 다툼.
교전국 규슈 ·신라 연맹 긴키
지휘관 규슈 왜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이와이
쿠즈코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신라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법흥왕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최고 지휘관 이와이 전사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규슈 및 신라 패배로 이와이 세력 멸망
영향 고대 일본 통일
가야 멸망 가속화
신라 삼국통일 기반 마련[1]
1. 개요2. 배경3. 한반도 세력들과의 관계4. 결과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6세기 일본에서 있었던 내전. 알고 보면 후술되어있듯 삼국시대 한반도 국가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던 전쟁이었지만 정작 오늘날 현존하는 한국 측 기록에는 없고, 일본의 기록에서만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실제했던 전쟁인지 의문시되기도 했으나, 21세기 고고학적 성과로 인해 현재는 한일 양국 학계에서 대체로 그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 672년에 일어났던 진신의 난(壬申の乱)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일본사 최대 규모의 내전으로 알려져 있다.

2. 배경

오우미노 케나노오미(近江毛野臣)가 군사 6만[2]을 이끌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탁기탄(喙己呑)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때,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 이와이(磐井)가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꾸물거리다가 해를 넘겼다. 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염려하며 늘 틈을 엿보았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이와이의 거소에 뇌물을 보내어 오우미노 케나의 군대를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이와이가 히노쿠니와 도요노쿠니(火豐二國) 두 나라에 세력을 뻗쳐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했다. 밖으로 해로를 끊어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의 나라에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배를 꾀어서 이르게 하고, 안으로는 임나에 파견되는 오우미노 케나의 군대를 막고 무례하게 말하기를 "지금 사자가 된 사람(오우미노 케나)은 전에 나의 동료로서 어깨를 맞대고 팔꿈치를 부딪치며 같은 그릇에 함께 밥먹던 자다. 어찌 별안간 사신이 되어 나(이와이)로 하여금 스스로 엎드리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드디어 싸우고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교만하고 스스로 뽐내었다. 이 때문에 오우미노 케나는 길이 막혀서 중도에 지체했다.

천황은 오토모노오무라지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 모노노베노오무라지 아라카히(物部大連麤鹿火), 코세노오미 오히토(許勢大臣男人) 등에게 "츠쿠시의 이와이가 반란을 일으켜 서융(西戎)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누가 장수가 될 만한가?"라고 조를 내렸다. 오토모노 카나무라 등이 모두 "정직하고 어질고 용감하며 병사에 통한 것은 지금 모노노베노 아라카히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좋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17 게이타이 덴노(継体天皇) 21년 527년 6월 3일#

《일본서기》에 따르면 츠쿠시국(筑紫國, 규슈 북부 지역)의 호족 이와이(磐井)가 야마토 왕권에 반역할 틈을 계속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야마토 정권이 백제신라 사이에 껴서 양측에 점차 흡수 당하던 처지에 놓여 있던 가야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출병을 준비하자 이를 눈치챈 신라가 이와이에게 뇌물을 보내 반란을 부추켜 일으키게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파일:이와이의 세력.png
규슈 지역 이와이 세력의 분포도

그런데 단순 지방 호족 반란이라는 《일본서기》의 내용과는 다르게 《고사기(古事記)》와 《석일본기(釋日本紀)》, 《치쿠고국 풍토기(筑後國風土記)》 등에서 《일본서기》와는 다른 내용의 기록들이 존재하고 당시 야마토 조정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형성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전체 길이 132미터에 달하는 전방후원분인 후쿠오카현 야메시의 이와토야마(岩戸山)가 긴키 지방과는 다른 독자적인 설계를 보여주는 등의 고고학적 근거들에 기초해, 야마토가 규슈 지역에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했다는 데에 학계에선 부정적인 입장이므로 이와이의 난이 단순히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호족의 반란 차원 정도가 아니라 독립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지역국가인 츠쿠시국(筑紫國) 세력과 야마토(大和) 세력 간의 일본 열도를 건 패권 쟁탈전 성격을 띤다고 보고 있다.

또 후술하겠지만 이와이를 도운 신라해변인(新羅海邊人)들이라는 집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북구주(九州)에는 신라계 도래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백제와 신라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신라를 지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이와이는 신라를 지지하는 이들 이주민 집단의 지원을 얻어 거병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야마토가 백제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던 것을 감안하면 묘한 그림이 나온다.

3. 한반도 세력들과의 관계

파일:6세기 초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국제정세.png
6세기 초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국제정세

가야 남부 지역인 고성군송학동 고분군의령군 경산리, 운곡리 고분군 등에서 북규슈계 석실 구조와 대가야 양식의 토기, 마구, 청동주발 등의 부장품을 갖춘 고분들이 나타났으며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구마모토현 등지에서도 고령 양식의 귀걸이와 토기, 고성 양식의 토기 등이 나타나 가야와 규슈 왜 사이의 국지적인 관계가 상정되며 이러한 정황에 근거해 백제의 팽창 위협에 따라 대가야이뇌왕이 신라 왕실에 청혼하여 형성된 대가야와 신라 사이의 동맹 관계는 백제에 상당한 위협을 초래하였다고 여겨진다.

또 고대 한일 외교의 패턴은 '백제 - 가야 - 규슈 왜 - 긴키 왜'를 거치는 형식이었으나 6세기 전반 이후로 '백제 - 긴키 왜'로 직결되는 형식이 우세하게 되어 이로 인해 백제와 야마토 정권이 보다 적극적으로 교류하게 되었지만 이는 곧 가야와 규슈 왜 세력의 반발로 이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이와이의 난은 가야 및 신라의 계책에 의해 백제와 야마토 왕권 사이의 교류 관계를 막으려는 시도의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3]

게다가 이와이 등의 규슈 왜 세력들은 마한제국(馬韓諸國)[4]과도 관련이 깊은데 5세기 말에 이와이 세력이 북규슈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그 지역의 기존 세력자가 밀려나 영산강 유역의 핵심지역인 나주 외곽으로 망명해 왜계 무덤의 일종인 장고분이 형성됐다고 추정하기도 하며, 이보다 약간 뒤 이와이의 세력의 몰락 이후인 6세기 초중반기엔 야마토 세력을 피해 아리아케카이 지역 세력자가 장성군 영천리 지역으로 망명해 히고형 석실 고분이 만들어졌다고 추측되고 있다.[5] 다만 망명하고자 하는 세력이 기존 재지세력의 허가 없이 그 지역에 망명을 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가야나 신라 지역을 제쳐두고 이 지역을 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두 지역 사이의 관계가 깊었다는 의미이며 또 나주 영동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5-6세기대 인골들이 규슈지역 주민들과 상통하는 것은 형질학적으로도 두 지역 사이의 관계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6]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백제는 웅진천도 시기를 전후로 마한 잔여 세력에 대한 경략을 중단하였고 해당 시기의 마한 지역에서도 변변한 성책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미루어 보아 한동안은 백제와 마한 세력 간의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웅진시대에 축조한 전북 정읍 고사부리성과 전주 배매산성을 통해 백제의 압박이 슬슬 마한제국에 가해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마한의 잔여 세력들은 바다 건너의 규슈 왜 세력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이 같은 백제의 팽창에 함께 대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규슈의 이와이가 야마토 세력에게 패배하여 멸망함으로 인해 유력한 조력자를 잃게 되어 고립 당하게 되자 530년경에 영산강 내해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마한제국들은 결국 백제에 스스로 항복하여 성왕의 사비천도 시기를 전후로 백제에 완전히 흡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7]

또한 당시 야마토 세력이 백제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처럼 이와이 세력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앞서의 일본서기 내용상에서도 이와이가 신라의 뇌물을 받고 야마토를 상대한 모습이나 후대에 쓰여졌지만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국조본기(國造本紀)>에서는 신라가 아예 이와이 세력에게 병력까지 파견했다 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파일:御塚・権現塚古墳 출토 신라토기.png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대 시기 사이에 축조된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오츠카・곤겐츠카 고분(御塚・権現塚古墳) 출토 신라토기
이길도조(伊吉嶋造)[8]
계체천황(継体天皇) 때 이와이의 종자(從者)인 신라해변인(新羅海邊人)들을 토벌한 천진수응(天津水凝)의 후예인 상모포(上毛布)가 직조(直造)되었다.
《선대구사본기》 <국조본기>#

국조본기(國造本紀) 기록의 신라해변인(新羅海邊人)들은 이와이의 종자(從者)라 불릴 만큼 이와이 세력 내에서 상당한 핵심 세력이었을 것으로 보여지므로 야마토 세력과의 본격적인 전투에까지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와이의 난의 주요 전투들이 주로 내륙 지역에서 이루어졌기에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주요 거점인 이키 섬에서 이와이의 종자인 신라해변인들이 토벌되었다는 구절의 의미는 이와이를 지원하던 신라인들이 이와이 세력의 패배 직후 신라로 도주하다 이키 섬에까지 이르렀는데 거기서 모종의 이유로 야마토군의 추격을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잡혀 결국 최후를 맞이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이와이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토벌한 공로로 부젠(豊前) 출신의 상모포직(上毛布直)은 이키(壱岐) 지역의 최고 지배자로 등극하게 된다.

4. 결과

528년 11월 11일 츠쿠시미이군(筑紫三井郡)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이 전투에 참전한 이와이의 사망[9]으로 인해 이와이 세력이 최종적으로 패배하는데 이때 이와이의 아들인 쿠즈코는 가스야노미야케(糟屋屯倉)를 야마토에 헌상해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529년 3월, 야마토 조정은 오우미노 케나를 필두로 한 병력을 가야 지역에 파견하나 신라 장군 이사부에 패해 별 활약도 못해보고 쫓겨나게 되는데, 이는 야마토 세력이 앞서 발생한 이와이의 난으로 국력을 상당수 소진한 이유도 있어보인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와이의 난은 단순히 일본서기 내용상의 이미 통합된 왜국(倭國)내에서의 내전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일본열도 내 세력 균형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영토통일전쟁임과 동시에 백제신라 사이의 가야 지역 패권을 놓고 벌어진 주도권 다툼이 일본 열도에까지 번져서 발생한 양국의 대리전 성격을 띤 국제전이자 얼마 뒤에 일어난 가야멸망전의 전초전 격이라고 볼 수 있는 등 상당히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같이보기


[1] 3가지가 맞물려 이어지는데, 고대 일본 열도가 야마토 정권으로 통일된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그로 인한 내상도 상당해 가야 지원에 한계가 있어 가야는 결국 얼마 안가 신라에게 멸망당하고, 남부 지방의 백제·왜 세력 역시 축출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이 마련된다.[2] 당시 야마토의 국력상 과장일 확률이 높다. 게다가 이후 이사부의 3천 군대에 털리기 때문에 오히려 병력이 적은게 자존심이 덜 상한다.(...)[3] 동북아역사재단, 2019,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고대편』[4] 황제국(帝國)이 아니라 나라의 집합이라는 뜻.[5] 임영진, 2009, 「영산강유역 장고분의 정체」[6] 김재현, 2010, 「인골로 본 고대인의 매장의례와 친족」, 『6~7세기 영산강유역과 백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7] 임영진, 2014, 「전남지역 마한 제국의 사회 성격과 백제와의 관계」[8]이키 섬을 다스리던 지방관. 야마토 시대에는 지방 유력자를 그 지역의 국조(國造)로 임명했다.[9] 치쿠고국 풍토기(筑後國風土記)에선 산속으로 달아나 도망치던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