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01:38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아메리코 테소리에레의 역임 직책
{{{#!folding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페드로 칼로미노
(1919~1921)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1922~1923)
페드로 칼로미노
(1923)
페드로 칼로미노
(1923)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1923~1925)
에밀리오 솔라리
(1926)
}}} ||
아메리코 테소리에레의 수상 이력
{{{#!folding ▼
1921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www.martiperarnau.com/Tesoriere-El-Gra%CC%81fico.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1]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Américo Tesoriere
본명 아메리코 미겔 테소리에레
Américo Miguel Tesoriere
출생 1899년 3월 18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망 1977년 12월 30일 (향년 78세)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 체중 75kg
포지션 골키퍼
소속 클럽 CA 보카 주니어스 (1916-1920)
스포르티보 델 노르테 (1921)
CA 보카 주니어스 (1922-1929)
국가대표 32경기(아르헨티나 / 1919~1925)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등번호 -[2]
}}}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5.2. 국가대표5.3. 개인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로 축구 역사상 최초로 주인공이 된 골키퍼다.[3]

2. 생애

2.1. 어린 시절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라 보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 도밍고는 이탈리아 출신의 선원이었고 재봉사였던 어머니 앙헬라 라벤나와의 사이에서 8남매를 두었다. 아메리코는 그 중 첫째였다.

라 보카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답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뼛속까지 보카의 팬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축구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프로의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축구 선수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견습생, 가게 점원 등으로 일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그의 첫 클럽은 커널 브란드슨이었는데 여기서는 스트라이커로 활약을 했었다. 그러다 1916년에 고향팀 보카 주니어스의 리저브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상보다 빠르게 주전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는데 주전 골키퍼였던 파비아니가 부상을 당해 그를 대신하여 경기에 나섰고 곧 대체불가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21년 시즌에 스포르티보 델 노르테에서 2경기를 나선 것을 빼면 모든 커리어를 보카 주니어스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의 실력과 명성은 1925년의 유럽 투어에서 재확인되었다. 여기에서 테소리에레는 감독의 역할까지 수행하였고 주장 알프레도 엘리와 함께 큰 인정을 받았다.

2.2.2. 국가대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서 그는 6번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하였다. 그 중에서 2번을 우승하였는데 특히 1921년 자국 대회에서는 첫 우승이자 1917년 대회와 더불어 대회의 유이한 전승 무실점 우승을 이끌어냈다. 이 대회에서 그의 선방은 대단했고 팀의 5골 중 3골을 넣은 훌리오 리보나티를 제치고 MVP를 차지했다.

1924년 대회에서도 그는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지켰다. 당시 라이벌 우루과이지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의 우승, 올림픽에서도 우승하는 등 남미에서 가장 잘나가는 팀이었고, 최종전은 전통의 라이벌인 그들의 몫이었다. 비록 우승컵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우루과이의 창은 결국 테소리에레를 축으로 한 아르헨티나의 수비를 뚫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도 전 경기 무실점을 이루어냈지만 2득점에 그친 공격력 때문에 팀은 준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훌륭한 기량과 더불어 스포츠맨십으로 우루과이 선수들이 그들의 우승 이후 승리 축하 세레머니에 끼워줄 정도였다고 한다.

테소리에레는 다음 대회의 우승을 마지막으로 26살의 젊은 나이에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용기와 안정감, 본능을 가진 훌륭한 골키퍼였다. 공격수와의 연계에도 신경을 쓰는 그 당시로는 혁신적인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국가대표로 나선 38경기에서 29경기를 주장으로 출전할 정도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범죄자조차 자리에 앉힐만한 훌륭한 골키퍼를 보유하고 있다.
(Tenemos un arquero que es una maravilla, ataja los penales sentado en una silla.)
세네이세스[4]
신이시여. 그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Señor nos este hombre impidió la victoria ante la Selección Argentina.)
마르셀로 토르쿠아토 데 알베아르[5]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1] 아메리코 대신 메리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그는 다른 팀 동료들과 함께 엘 그라피코의 최초 모델 중 한 명이었다.[4] Xeneizes. 보카 주니어스 팬클럽[5]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1924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최종전을 관전한 후 남긴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