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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91801><colcolor=#FFF>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레오폴도 2세 Leopoldo II, Granduca di Toscana | ||
이름 | 레오폴도 조반니 주세페 프란체스코 페르디난도 카를로 Leopoldo Giovanni Giuseppe Francesco Ferdinando Carlo | |
출생 | 1797년 10월 3일 | |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 ||
사망 | 1870년 1월 29일 (향년 72세) | |
교황령 로마 | ||
재위 |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 |
1824년 6월 18일 ~ 1859년 7월 21일 | ||
배우자 | 작센의 마리아 안나 공주 (1817년 결혼 / 1832년 사망) |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 (1833년 결혼) | ||
자녀 | 카롤리나, 아우구스타 페르디난다, 마리아 마시밀리아나, 마리아 이사벨라, 페르디난도 4세,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크리스티나, 카를로 살바토레, 마리아 안나, 라니에리, 마리아 루이사, 루이지 살바토레, 조반니 네포무체노 | |
부친 | 페르디난도 3세 | |
모친 | 양시칠리아의 루이사 공주 | |
형제 | 마리아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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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폴도 2세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다.2. 생애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와 나폴리-시칠리아의 루이사 마리아(Luisa Maria di Borbone-Napoli 1773~1802)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이며 큰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프란츠 1세였다. 여동생 마리아 테레사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와 결혼했다.어린 시절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잘츠부르크, 뷔르츠부르크 등 독일어권 도시들을 떠돌아다녔다. 1814년이 되어서야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1824년 부친의 뒤를 이어 토스카나 대공으로 등극했다.
그가 통치한 시기의 초창기 20년 동안의 토스카나 대공국은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였다. 할아버지 레오폴트 2세가 만든 비밀경찰 제도를 폐지했으며 큰아버지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탄압당한 이들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선정적인 통치에도 불구하고 1840년대 들어 혁명의 기운이 감지되었고 1845~1846년에 걸쳐 토스카나에서도 폭동과 반란이 수 차례 발생했다. 레오폴도 2세는 여러 행정개혁을 승인했으나 본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으로 그 이상을 하지는 못했다.
1848년 혁명이 벌어지면서 피렌체도 혼란에 빠졌고, 1849년 2월 18일 토스카나 공화국이 선언되자 피렌체를 빠져나와 양시칠리아 왕국의 가에타(Gaeta)[1]로 피신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도움으로 피렌체에 복귀했으나 이후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아 반동주의로 돌아섰고 초창기 20년 동안 베푼 선정으로 얻은 인기를 모두 잃었다.
1859년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프랑스 제2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벌어지자 토스카나 청년들이 사르데냐-피에몬테군으로 합류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결국 1859년 4월 27일 퇴위하여 볼로냐를 거쳐 빈으로 망명했다. 토스카나 대공국에는 임시 정부가 들어섰고, 7월 21일 그의 퇴위가 발표되어 아들 페르디난도가 즉위했으나 영지가 없는 군주에 불과했다.
토스카나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친척이 다스리는 모데나 레조 공국,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방계가 다스리는 파르마 공국, 교황령의 볼로냐 지역과 함께 중부 이탈리아 연합을 구성했다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류했다. 빈으로 물러난 레오폴도 2세는 이후 보헤미아 왕국으로 이주했다가 1869년 교황령 로마로 건너가 1870년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1817년 드레스덴에서 작센 왕국 출신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von Sachsen 1799–1832)[2]와 결혼했으나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는 딸 셋만 연달아 얻었고, 그 중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아우구스타 페르디난다 뿐이었다. 아우구스타는 바이에른 왕국의 루이트폴트와 결혼했고, 루이트폴트의 아들 루트비히는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 되었다.1832년 피사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 di Borbone-Due Sicilie 1814~1898)[3]와 결혼했다. 마리아 안토니아와의 사이에서는 후계자 페르디난도 4세를 포함해 5남 5녀를 얻었다.
[1] 이곳은 나중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프란체스코 2세가 주세페 가리발디에 맞서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곳이기도 하다.[2]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손녀이자,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여동생인데, 언니 마리아 페르디난다는 레오폴도 2세의 아버지 페르디난도 3세의 후처가 되었다. 자매가 고부관계가 되어버린 셈.[3]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4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