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e1301, #d91801 20%, #d91801 80%, #ae1301);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메디치 왕조 | ||
코시모 1세 | 프란체스코 1세 | 페르디난도 1세 | |
코시모 2세 | 페르디난도 2세 | 코시모 3세 | |
<rowcolor=#fff> 메디치 왕조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
잔 가스토네 | 프란체스코 2세 | 레오폴도 1세 | |
<rowcolor=#fff>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부르봉파르마 왕조 | ||
페르디난도 3세 | 루도비코 1세 | 루도비코 2세 | |
<rowcolor=#fff>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
페르디난도 3세 | 레오폴도 2세 | 페르디난도 4세 | }}}}}}}}} |
<colbgcolor=#d91801><colcolor=#FFF>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페르디난도 3세 Ferdinando III, Granduca di Toscana | ||
이름 | 독일어 | 요제프 요한 밥티스트 Joseph Johann Baptist |
이탈리아어 | 페르디난도 주세페 조반니 바티스타 Ferdinando Giuseppe Giovanni Battista | |
출생 | 1769년 5월 6일 | |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 ||
사망 | 1824년 6월 18일 (향년 55세) | |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 ||
재위 |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 |
1차 | 1790년 7월 22일 ~ 1801년 8월 3일 | |
2차 | 1814년 4월 27일 ~ 1824년 6월 18일 | |
잘츠부르크 선제후국의 선제후 | ||
1803년 4월 27일 ~ 1805년 12월 26일 | ||
뷔르츠부르크 대공국의 대공 | ||
1805년 12월 26일 ~ 1814년 6월 3일 | ||
배우자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루이사 공주 (1790년 결혼 / 1802년 사망) | |
작센의 마리아 페르디난다 공주 (1821년 결혼) | ||
자녀 | 카롤리나 페르디난다, 프란체스코 레오폴도, 레오폴도 2세, 마리아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 |
아버지 | 레오폴트 2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 |
형제 |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2세, 마리아 안나, 카를, 알렉산더 레오폴트, 요제프, 마리아 클레멘티나, 안톤 빅토어[1], 마리아 아말리아, 요한, 라이너 요제프, 루트비히, 루돌프[2] | |
서명 |
[clearfix]
1. 개요
페르디난도 3세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토스카나 방계의 시조이다.나폴레옹에게 토스카나 대공국을 빼앗긴 1803~1814년 사이에는 잘츠부르크 선제후[3]이자 뷔르츠부르크의 선제후[4] 및 대공[5]이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1814년 토스카나 대공으로 복위하며 주권 군주가 되었다.[6]
2. 생애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에서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가 되는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은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초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이며 동생으로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카를 루트비히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로 유명한 루돌프 등이 있다.어린 시절 독일인-이탈리아인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았다. 아버지 레오폴트 2세가 큰아버지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어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물려받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빈으로 가게되자 맏형 프란츠 대공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후계자로 내정되었고 차남이었던 그가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았다.
1792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한 유럽의 군주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했다.[7] 그러나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대 프랑스 동맹에 참여할 것을 압박했고 이에 마지못해 참여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 1795년 3월 1일, 대 프랑스 동맹에서 제일 빨리 빠져나왔다.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으로 한동안 토스카나 대공국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피렌체에서 공화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본가인 빈으로 도피했으며, 1801년 아란후에스 조약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다. 나폴레옹은 뤼네빌 조약으로 없애버린 파르마 공국에 대한 보상으로 에트루리아 왕국을 만들어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에게 주었고, 그는 보상으로 세속화된 잘츠부르크 선제후국을 받았다. 그러나 1805년 형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게 패전하고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맺어 잘츠부르크도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고, 결국 뷔르츠부르크로 옮겨갔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4년에서야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돌아갔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페르디난도 3세 (Ferdinando III, Granduca di Toscana) | <colbgcolor=#fff3e4,#331c00> 레오폴트 2세 (Kaiser Leopold II.) | <colbgcolor=#ffffe4,#323300> 프란츠 1세 (Kaiser Franz I. Stephan) | |
로렌 공작 레오폴드 (Léopold, Duc de Lorraine) | |||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8] (Élisabeth-Charlotte d'Orléans) | |||
마리아 테레지아 (Kaiserin Maria Theresia) | |||
카를 6세 (Karl VI)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퓌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ía Luisa de España) | |||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
펠리페 5세 (Felipe V) |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ta Farnese)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von Sachsen) | |||
아우구스트 3세 (König August II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9] (Maria Josepha von Österreich)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루이사 공주 (Luisa di Borbone-Due Sicilie) | ||||
1녀 | 오스트리아의 카롤리나 페르디난다 여대공 (Carolina Ferdinanda di Toscana) | 1793년 8월 2일 | 1802년 1월 5일 | |
1남 | 토스카나의 공세자 프란체스코 레오폴도 (Francesco Leopoldo di Toscana) | 1794년 12월 15일 | 1800년 5월 18일 | |
2남 | 레오폴도 2세 (Leopoldo II di Toscana) | 1797년 10월 3일 | 1870년 1월 29일 | 작센의 마리아 안나 공주[10] 슬하 3녀[11]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12] 슬하 5남 5녀[13] | ||||
2녀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루이사 여대공 (Maria Luisa di Toscana) | 1798년 8월 30일 | 1857년 6월 15일 | |
3녀 |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 (Maria Teresa di Toscana, Regina consorte di Sardegna) | 1801년 3월 21일 | 1855년 1월 12일 | 카를로 알베르토 슬하 2남 1녀[14] |
4. 가정사
1790년 나폴리에서 고모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과 외삼촌 페르디난도 4세의 딸로 고종사촌 겸 외사촌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루이사 공주(1773~1802)와 결혼했다.[15] 루이사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얻었는데 장녀 카롤리나 페르디난다(1793~1802)와 장남 프란체스코 레오폴도(1794~1800)는 어릴 때 사망했다. 토스카나 대공국을 이어받은 레오폴도와 차녀 마리아 루이사(1798~1857), 3녀 마리아 테레사(1801~1855)만 성인으로 컸고, 마리아 테레사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와 결혼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16]를 두었다.마리아 루이사는 1802년 출산 중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1821년 5월 작센의 마리아 페르디난다와 재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1] 마지막 쾰른 선제후.[2] 올로모우츠 대주교 겸 추기경이었으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로 유명하다.[3] 1803~1805[4] 1805~1806[5] 1806~1814[6] 그가 2차 재위할 때의 토스카나 대공국은 속령이 아닌 주권국 상태였다.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빈 회의로 북부 이탈리아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왕국이 멸망한 뒤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공국, 공국들이 독립했다.[7]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디난도 3세의 고모였다.[8]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딸.[9] 요제프 1세의 딸이다.[10]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여동생.[11] 바이에른의 루이트폴트 왕자비 아우구스테 페르디난데 등[12] 외삼촌 프란체스코 1세의 4녀.[13] 페르디난도 4세 등[14]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등[15] 형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여동생이기도 하였다. 즉, 사촌간의 겹사돈.[16] 이탈리아 왕국 움베르토 1세의 숙부이자 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