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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er, Duc d'Orléans | |
이름 | 필리프 드 프랑스 (Philippe de France) |
출생 | 1640년 9월 21일 |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궁전 | |
사망 | 1701년 6월 8일 (향년 60세) |
프랑스 왕국 생클루 성 | |
배우자 | 잉글랜드의 헨리에타[1] (1661년 결혼 / 1670년 사망)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1671년 결혼) | |
자녀 | 마리 루이즈[2], 필리프 샤를, 안 마리, 필리프 2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3] |
아버지 | 루이 13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아나 |
형제 | 루이 14세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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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13세의 차남이자 루이 14세의 동생이며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시조이다.어릴 때 앙주 공작이었는데 그의 숙부인 전임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이 후사 없이 죽자 오를레앙 공작위를 승계했다.[4] 우리가 잘 아는 부르봉오를레앙 왕조의 시조이다. 그의 아들 필리프 2세는 어린 루이 15세의 섭정을 맡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장녀 마리 루이즈는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왕비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루이 14세의 동생으로 알려져 '무슈'라고 불렸다. 당시 프랑스에서 귀족의 성을 붙이지 않고 그냥 무슈라고 말하면 왕의 동생을 가리켰다.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였던데다 유럽 제일의 패셔니스타였다고 한다. 게다가 양성애자였고 행동거지도 여성스러워 여장을 즐겨했다. 동성애인 필리프 드 로렌이 오를레앙 공의 첫번째 아내 헨리에타 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온 유럽에 퍼졌을 정도였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와 헨리에타의 사이가 워낙 나빠서, 헨리에타가 루이 14세에게 청원해서 필리프 드 로렌을 로마로 유배보냈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필리프는 프랑스 궁정에서 인기가 높았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프롱드의 난에서 형제가 함께 고생했던 탓인지 루이 14세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 필리프를 몹시 아꼈고, 필리프도 형이자 주군인 루이 14세에게 평생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각별했다. 왕세자조차 왕인 루이 14세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식사 자리나 집무실에서 안락의자에 앉아서는 안됐지만, 유일하게 이 모든 규율에서 자유로웠던 이가 바로 오를레앙 공작이었다. 아무래도 왕권이 불안정했던 어린 시절 국왕의 동생으로서 왕위를 노리는 경쟁자가 되기보다는 왕과 귀족들 간의 왕권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루이 14세의 편에 서며 도움을 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 필리프와 비슷하게 남녀를 불문하고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결투를 자주 벌인 양성애자 크로스드레서 여성 검객이자 파리의 오페라 가수였던 줄리 도비니를 루이 14세가 처벌하지 않은 이유도 동생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성스러웠던 것과 별개로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네덜란드 계승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루이 14세가 이 때문에 동생을 경계해서 전쟁에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했다.
투자와 자산 운용에서 경제적인 재능이 있어 투자로 재산을 크게 불렸다.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자손들을 돌보며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701년에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2. 가족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는 부르봉오를레앙의 가문의 중시조다. 부르봉 왕실 본가와 오를레앙 가문은 프랑스 혁명 전까지 미묘한 긴장 상태에 있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로 프랑스가 완전한 공화국으로 전환하기 전까지 왕위를 다툰다.[6]2.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 Duke of Orléans) | <colbgcolor=#fff3e4,#331c00> 루이 13세 (Louis XIII) | <colbgcolor=#ffffe4,#323300> 앙리 4세 (Henri IV) | |
안토니오 1세 (Antonio I) | |||
호아나 3세 (Joana III) | |||
마리아 데 메디치 (Maria de' Medici) | |||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Grand Duke of Tuscany) | |||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Johanna of Austria) | |||
오스트리아의 아나 (Anne of Austria) | |||
펠리페 3세 (Felipe III) | |||
펠리페 2세 (Felipe II) | |||
오스트리아의 안나 (Anna of Austria) |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Margaret of Austria) | |||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7] (Karl II, Archduke of Inner Austria)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Bavaria) |
2.2. 아내와 자녀
첫번째 아내 잉글랜드의 헨리에타 |
두번째 아내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잉글랜드의 헨리에타 앤 (Henrietta Anne of England)[8] | ||||
1녀 |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 (María Luisa, Queen of Spain) | 1662년 3월 26일 | 1689년 2월 12일 | 카를로스 2세 |
2녀 | 사르데냐의 왕비 안나 마리아 (Anna Maria, Queen of Sardinia) | 1669년 8월 27일 | 1728년 8월 26일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9] 슬하 3남 3녀[10]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von der Pfalz)[11] | ||||
1남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12] (Philippe II, Duc d'Orléans) | 1674년 8월 2일 | 1723년 12월 2일 |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13] 슬하 1남 6녀[14] |
3녀 | 로렌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Duchess of Lorraine) | 1676년 9월 13일 | 1744년 12월 23일 | 로렌 공작 레오폴트 1세 슬하 3남 3녀[15] |
2.3. 후손
가족관계 | 이름 | 생몰년 | 재위기간 | 비고 |
아들 | 필리프 2세 | 1674년 ~ 1723년 | 1701년 ~ 1723년 | 6촌 손자뻘 루이 15세 섭정 |
손자 | 루이 | 1703년 ~ 1752년 | 1723년 ~ 1752년 | |
증손자 | 루이필리프 1세 | 1725년 ~ 1785년 | 1752년 ~ 1785년 | |
고손자 | 루이필리프 2세 | 1747년 ~ 1793년 | 1785년 ~ 1793년 | 프랑스 혁명 주동자 중 하나 단두대에서 처형됨 |
현손 | 루이필리프 3세 (프랑스 국왕 루이필리프 1세) | 1773년 ~ 1850년 | 1793년 ~ 1830년(오를레앙 공작) 1830년 ~ 1848년(프랑스 국왕) | 7월 왕정기 프랑스 국왕 |
[1] 정확히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동군연합의 왕녀이다. 찰스 1세의 딸로 남편인 필리프 1세와는 사촌이다.[2]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첫 왕비[3] 프란츠 1세의 어머니.[4] 오를레앙 공작위는 영국의 요크 공작위처럼 부계로만 계승되며 단절될 경우 왕의 차남(혹은 왕의 손아래동생)이 계승하게 된다.[5] 그러나 그의 현손은 11촌 조카의 왕위를 대놓고 노렸다.[6] 프랑스 혁명 이후로도 전제군주적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왕당파(법통주의)와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오를레앙파 등,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세력이 꽤 남아있었다.[7] 페르디난트 1세의 4남.[8] 필리프 1세의 고모 앙리에트 마리와 영국 찰스 1세의 막내딸로 고종사촌이다.[9] 안 마리의 친할아버지 루이 13세의 여동생 크리스틴 마리의 손자로 육촌 지간이다.[10] 프랑스의 도핀 마리 아델라이드,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등[11]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제임스 1세의 딸)의 손녀이며,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의 딸이다. 잉글랜드과 네덜란드 윌리엄 3세와는 6촌지간이었는데 할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엘리자베트 샤를로트가 윌리엄 3세와 혼인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아버지 카를 1세 루트비히의 정략에 의해,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혼인했고 이를 위해 개신교(칼뱅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했기 때문에, 막내고모였던 하노버 선제후비 조피에게 맡겨졌고 조피의 아들이자 사촌인 조지 1세와도 친했다. 이런 관계로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와 고모였던 조피는 죽을 때까지 서로 많은 양의 서신을 교환했고, 오늘날에도 그 서신이 남아있어 당시 베르사유 궁전의 일상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오빠였던 카를 2세가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에, 루이 14세가 제수였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권리를 주장하며 팔츠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12] 루이 15세의 섭정을 맡았다.[13]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사생아딸로 필리프 2세와는 친사촌이다.[14] 모데나 레조 공작부인 카를로타 아글라이아,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 등[1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공자 등. 그외 자식으로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인 엘리자베트 테레즈가 있다. 또한 프란츠 1세가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아들인만큼 루이 16세의 왕비이자 프란츠의 막내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손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