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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Philippe II, Duc d'Orléans | |
이름 | 필리프 샤를 도를레앙 (Philippe Charles d'Orléans) |
출생 | 1674년 8월 2일 |
프랑스 왕국 생클루 궁전 | |
사망 | 1723년 12월 2일 (향년 49세)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
배우자 |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1] (1692년 결혼) |
자녀 | 루이즈 엘리자베트, 아델라이드, 샤를로트 아글레, 루이, 엘리자베트, 필리핀 엘리자베트, 루이즈 디얀 |
아버지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
어머니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
형제 |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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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귀족.2. 생애
2.1. 섭정 전의 생애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의 외아들로 루이 14세의 조카이다. 루이 14세의 증손자이자 필리프 본인의 당조카손자[2]가 되는 루이 15세의 섭정이기도 하다.루이 14세의 동생 필리프 1세로부터 시작된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은 부르봉 왕조의 분가들 중 가장 혈통적으로 가까운 왕실의 제 1분가[3]로서 루이 14세의 직계혈통이 끊기게 된다면 살리카법에 따라 프랑스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때문에 오를레앙 가문은 세월이 흐르면서 시시때때로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으며, 필리프 2세의 증손자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가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의 처형을 찬성하기에 이른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공해서 프랑스의 마지막 왕[4] 루이필리프 1세는 필리프 2세의 4대손이다.
따라서 일반 귀족들은 물론 프랑스 방계왕족(Prince du sang)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는 사촌인 루이 왕세자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꽤 가까운 계승 서열이었다. 물론 5촌 조카들이 태어나고 또 여기에 5촌조카들이 자녀를 낳으면서 더이상 왕위 계승은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매우 먼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천연두가 돌아 확정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루이 14세의 아들 그랑 도팽 루이와 장손 프티 도팽 루이과 왕세손비, 증손자 브류타뉴 공작 루이까지 죽었고 루이 14세의 셋째 손자인 베리 공작 샤를까지 사냥 도중 사고로 후사도 없이 사망했다. 이로인해 루이 14세의 둘째 증손자인 루이 15세만이 살아남으면서 그의 계승서열은 순식간에 높아졌다. 이후 루이 15세가 5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촌수가 가장 가까운 1순위 왕족인 필리프 2세가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부르봉-오를레앙 가문과 부르봉 왕조 직계는 가까웠지만 부르봉 왕조는 오를레앙 가문을 상당히 경계했다. 루이 14세는 친동생 필리프 1세 오를레앙 공작이 뛰어난 군인으로서 활약하자 동생을 경계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동생에게 지휘권을 더이상 주지 않았다. 필리프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은 사촌인 루이 왕세자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루이 14세에 의해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에게 시집갔다. 루이 14세는 사생아들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었지만 조카인 필리프 2세가 1693년 뛰어난 군인으로 활약하자 1697년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일시적으로 군대 지휘권을 조카에게 주지 않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토리노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을 이끌었으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명장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패배하고 물러났다.
오를레앙 가의 세력이 커지자 심각하게 후계를 걱정하던 루이 14세는 유언으로 자신의 서자들인 멘 공작과 툴루즈 백작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했고 그들과 조카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해버리고 죽었다. 필리프 2세는 루이 14세가 붕어하자 파리 의회에서 단독으로 섭정을 선언했고 프랑스 고등법원도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훗날 루이 15세의 차녀 앙리에트는 필리프 2세의 손자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와 혼인하고 싶어했다. 루이 15세는 처음에 고려했지만 오를레앙 가문의 세가 커질까봐 거절했다.
2.2. 결혼
1692년 2월 18일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딸로 친사촌인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과 결혼했다. 프랑수아즈는 사생아였지만 1681년 11월 22일 동생 루이 알렉상드르와 함께 적자로 인정받았다.하지만 필리프 2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딸인데다 사생아에 불과한 프랑수아즈 마리가 며느리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고, 아버지 필리프 1세도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 아들이 혼담을 거절하길 바랐으나 당시 어리고 정치적 경험도 없던 필리프 2세는 얼떨결에 이 결혼을 승낙해버렸다.
아들의 선택에 화가 난 샤를로트는 루이 14세가 보는 앞에서 아들의 뺨을 때렸다. 루이 14세한테 절도 하지 않은 채 나가 버렸는데 이는 궁중예법 상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루이 14세는 동생 부부를 달래기 위해 조카이자 사위가 될 필리프 2세에게 무려 2만 리브르나 되는 지참금을 하사하고, 동생인 필리프 1세에게도 허용치 않았던 군대에서의 지위까지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간신히 결혼을 성사시켰다.
아내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5] |
필리프 2세는 결혼 조건으로 루이 14세가 약속한 지참금과 군대 지위를 주는 걸 차일피일 미루자 대신 아내를 '마담 루시퍼'라고 부르거나 대놓고 바람 피우는 식으로 시비를 걸었지만 루이 15세의 섭정이 됐을 때 프랑수아즈 마리의 연금을 엄청나게 올려줬다고 한다.
2.3. 루이 15세의 섭정기
본래 루이 14세는 적장자 루이 왕세자가 장성하여 결혼해서 루이 왕세손을 포함한 세 명의 적손자를 낳은데다, 루이 왕세손도 무사히 성인까지 성장해 결혼하여 훗날의 루이 15세를 포함한 아들을 셋이나 낳으며 후계 구도를 탄탄히 했다. 이렇게 루이 14세가 살아생전 증손자까지 보게 되면서 1711년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왕위는 순탄하고 안정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1711~1712년 프랑스 전역에 갑작스레 퍼진 천연두로 인해 루이 왕세자와 루이 왕세손, 루이 14세의 첫째 증손자인 부르타뉴 공작 루이가 잇따라 요절하자 프랑스 왕실은 큰 위기에 빠졌다.당시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되어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상태였다. 또한 루이 14세가 루이 15세의 섭정으로 내정하였던 셋째 손자인 베리 공작 샤를은 슬하의 자녀들이 모두 요절하고 본인도 사냥터에서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랑 도팽 루이의 아내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와 프티 도팽 루이의 아내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도 모두 사망한 지 오래였다. 결국 루이 14세가 1715년 9월 1일에 승하하자 프랑스에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직계 증손자 루이 15세가 5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루이 15세의 6촌 할아버지뻘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프랑스 내 국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었고 루이 15세의 섭정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필리프 2세가 어린 루이 15세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할 것을 염려했는지, 자신의 사생아였던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와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하여 오를레앙 가문을 견제하고자 하였다.[6] 결국 루이 14세는 최종적으로 오를레앙 공작과 멘 공작을 공동 섭정으로 하는 유언장을 남겼다. 이러한 조치는 필리프 2세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생각하기 충분했고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곧장 파리고등법원에 가서 루이 14세의 유언장을 무효화하고 단독 섭정에 취임하였다. 그 대가로 파리고등법원은 루이 14세에 의해 무력화되었던 거부권 등을 돌려받았다.[7]
2.4. 미시시피회사 거품 사태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기는 루이 15세 치세의 절정기로 평가되며, 프랑스가 18세기에서 가장 강대했던 시기였다. 오를레앙 공에게 주어진 가장 큰 당면과제는 선왕 루이 14세가 안겨준 엄청난 부채였다. 파산을 피하기 위해, 금융과 세율을 조정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우선 화폐의 재주조, 관직의 축소, 기준금리의 인하를 통한 통화량의 늘림 등 일시적인 방편들을 사용했다. 은행과 금융기관에 의존하지 않는 장기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던 오를레앙 공은 스코틀랜드 출신 금융전문가 존 로(John Law)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716년 5월, 로는 '종합은행'(Banque Générale)이라는 사립은행을 설립했다. 이는 여타 은행과는 다른 특별한 기관이었는데, 바로 예금된 돈을 담보로 일정량의 금화/은화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어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지폐였다. 동전보다 뛰어난 실용성 덕분에 이 어음은 점차 동전과 동일한 화폐로 함께 혼용되었고, 정부도 이를 화폐로 인정했다. 이런 새로운 화폐는 한편으로는 돈의 순환을 촉진시켰고, 금과 은의 생산량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재정 관리를 유동적으로 할 수 있게 했다.[8] 또, 과거에는 금화/은화 보유량에 세금을 매겨 소득세의 계산이 복잡했지만, 수명이 제한돼 있는 지폐를 사용함에 따라 소득세를 토지에만 한해 통일할 수 있게 했다.
그 다음해(1717), 로는 '미시시피 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해, 아메리카의 루이지애나 지방을 개간하고 자원을 이용했다.[9] 이렇게, 화폐로 경제를 활성화하는 한편, 식민지 회사로 생산성을 극대화시켜, 오를레앙 공 치하의 프랑스는 어느 정도 부채를 해소하고 재정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훗날, 종합은행은 점차 왕립은행 (Banque royale)이 되었고, 미시시피 회사 (다른 이름: 서양 회사 Compagnie d'Occident)는 다른 식민지 회사들을 인수해 동인도 회사(Compagnie des Indes)로 변모했다.
또 로는 처음으로 증권을 발행, 첫 금융 거래소를 설립했다. 하지만 아직 초창기라 금융 거래에 미숙한 탓이었는지, 동인도 회사의 주가는 500리브르에서 18,000리브르까지 치솟게 되었고, 결국 1720년 2월 버블이 터지면서 대규모 뱅크런 사태가 일어나는 등 프랑스 사회에 유래없는 혼란을(Krach de février 1720) 야기하게 되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 참조. 채무자들을 피해 존 로는 1720년 12월 브뤼셀로 도피했다. 이 사건은 단기적으로는 정부에 큰 손해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프랑스 경제 시스템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투기에 실패한 개인, 기업들이 많은 피해를 받았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졌으며, 국민들의 은행과 지폐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 로의 경제적 정책을 통틀어 '로 시스템'(Law system, Système de Law)이라 칭한다.
2.5. 섭정에서 물러나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으로 인해 오를레앙 공의 인기는 가시적인 경제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오를레앙 공은 1718년부터 집권 초기에 약속했던 고등 법원의 거부권을 축소시켰다. 또 루이 15세에게 건의해, 1723년 수상직을 받는데 성공했는데, 대신들을 등한시하고 권력을 독점하여, 불화를 야기했다. 이후 오를레앙 공은 지속적으로 나빠지는 건강 때문에 1723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왕위 계승서열 1위인 그가 왜 어린 루이 15세의 왕위를 찬탈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기는 하나 사람인 이상 야망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고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도 노리고 있었던데다 어릴 때 사망하는 비중이 높은 그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무리하게 찬탈해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보다 루이 15세가 자연스럽게 죽기를 바랐고 루이 15세가 성인이 되면서 하늘이 자기를 버린 것으로 여기고 그냥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마리 이자벨 공녀 (Princess Marie Isabel) | 1693년 12월 17일 | 1694년 10월 17일 | |
2녀 | 베리 공작부인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Marie Louise Elisabeth, Duchess of Berry) | 1695년 8월 20일 | 1719년 7월 21일 | 베리 공작 샤를[10] 슬하 1남 1녀[11] |
3녀 | 루이즈 아델라이드 공녀 (Princess Louise Adélaïde) | 1698년 8월 13일 | 1743년 2월 10일 | |
4녀 | 모데나 레조 공작부인 카를로타 아글라이아 (Charlotte Aglaé, Duchess of Modena and Reggio) | 1700년 10월 22일 | 1761년 1월 19일 | 모데나 레조 공작 프란체스코 3세 슬하 4남 6녀[12] |
1남 |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Louis, Duke of Orléans) | 1703년 8월 4일 | 1752년 12월 4일 | 바덴바덴의 아우구스테 슬하 1남 1녀 |
5녀 | 스페인의 왕비 루이사 이사벨 (Luisa Isabel, Queen of Spain) | 1709년 12월 9일 | 1742년 6월 16일 | 스페인의 루이스 1세[13] |
6녀 | 필리피네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Philippine Elisabeth) | 1714년 12월 18일 | 1734년 5월 21일 | |
7녀 | 콩티 공비 루이즈 디안 (Louis Diane, Princess of Conti) | 1716년 6월 27일 | 1736년 9월 26일 | 콩티 공 루이 프랑수아 1세[14] 슬하 1남[15] |
4. 기타
- 초상화를 보면 알다시피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사촌형 그랑 도팽 루이와 굉장히 닮았다. 특히 그랑 도팽 루이와는 비만인데다 만 49세에 죽은 것까지 똑같다. 필리프 2세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도 마찬가지로 49세에 죽었다.
- 일설에 따르면 12살 때까지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 여자 취향이 매우 독특했는데 추녀를 주로 찾았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도 이런 아들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어 한번은 이에 대해 꾸짖자 필리프 2세는 "밤이 되면 다 똑같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1] 큰아버지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친사촌이다. 그 몽테스팡 후작부인과 견원지간이었던 어머니 팔츠의 엘리자베트는 몽테스팡의 딸인 며느리 프랑수아즈도 싫어했다.[2] 촌수상으로는 6촌 조카손자지만 나이상으로는 부자지간 뻘이다. 사촌형인 그랑 도팽 루이와 13살 나이차가 나기 때문.[3] 엄밀히 말하면 루이 14세와 가장 가까운 분가는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이나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위가 합쳐지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직계와 가장 가까운 분가가 되었다.[4] 사실 프랑스의 마지막 군주는 나폴레옹 3세이지만 그는 황제였고, 부르봉 왕조 계열의 왕은 루이필리프가 마지막이다.[5] 어머니 몽테스팡 후작부인을 닮은 미녀였다.[6] 당시 프랑스 왕위계승 서열은 루이 15세의 직계 후손, 오를레앙 가문, 부르봉-콩데, 부르봉-콩티 가문 순이었는데 그 뒤에 멘 공작과 툴루즈 백작의 후손에게도 왕위계승권 부여한 것이다.[7] 이후 멘 공작은 이 처사에 반발한 자신의 아내 루이즈 베네딕트 드 부르봉(Louise Bénédicte de Bourbon)의 부추김으로 스페인과 내통하여 루이 15세의 숙부이자, 스페인 국왕이었던 펠리페 5세를 프랑스의 섭정으로 만들려고 군대까지 동원한 반란을 획책했다가 들통나면서 부부가 나란히 감옥에 수감되었고 궁정에서도 추방되었다. 그래도 1720년에 사면되어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고 궁정에도 복귀했지만 루이 14세가 공인한 적자 신분과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일개 사생아로 전락하여 조용히 살아야만 했다. 이 반란 미수는 스페인측 주동자가 셀라마레 공 안토니오 델 주디체(Antonio del Giudice, Prince of Cellamare)이기 때문에 '셀라마레의 음모'라고도 불린다.[8] 단, 이에 대해선 여러 반론들이 존재한다.[9] 미시시피는 프랑스 최초의 식민지 회사가 아니었다. 1614년 설립된 Compagnie de Rouen 를 시조로, 프랑스 식민지 회사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10] 그랑 도팽 루이의 3남이며 친가쪽으로 6촌이고 외가 쪽으로 사촌 지간이다. 아버지 필리프 2세와 그랑 도팽 루이가 친사촌이며, 어머니 프랑수아즈 마리와 그랑 도팽 루이가 이복남매이기 때문.[11] 아들 샤를은 1713년에 생후 한달도 안 돼서 요절했고 딸 마리 루이즈 역시 1714년에 요절한 데다 남편인 베리 공작 샤를 역시 1714년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함으로서 베리 공작 샤를과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직계 후손은 완전히 끊겼다.[12] 모데나 레조 공작 에르콜레 3세 등[13] 둘 다 친가의 직계 조상이 루이 13세이므로 친가쪽으로 서로 7촌간이다. 루이즈 엘리자베트 쪽이 7촌 숙모고 루이스 1세가 7촌 조카다. 루이스 1세의 요절 때문에 둘 사이의 자녀는 없다.[14] 루이즈 디안의 6대조 방돔 공작 샤를(앙리 4세의 친할아버지)의 7대손으로 친가쪽으로 13촌 조카이다.[15] 루이즈 디안은 불과 20세에 출산 중 요절했지만 그녀의 외아들 콩티 공 루이 프랑수아 2세는 1814년 만 79세까지 장수했다. 다만 루이 프랑수아 2세는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부르봉콩티 가문과 부르봉콩티 공위는 그대로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