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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Charles Ier d'Orléans | |
이름 | 샤를 1세 도를레앙 (Charles Ier d'Orléans) |
출생 | 1394년 11월 24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465년 1월 5일 (향년 70세) |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 |
배우자 | 발루아의 이자벨 (1407년 결혼 / 1409년 사망) |
본 다르마냐크 (1410년 결혼 / 1430년에서 1435년 사이에 사망) | |
클레베의 마리 (1440년 결혼) | |
자녀 | 잔, 마리, 루이 12세, 안 |
아버지 | 루이 1세 도를레앙 |
어머니 | 발렌티나 비스콘티 |
형제 | 필리프, 장, 마르그리트, 장 드 뒤누아(이복 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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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제3대 오를레앙 공작. 아르마냑파의 지도자로서 부르고뉴파와 대적하다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사로잡힌 뒤 25년간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지냈다.2. 생애
1394년 11월 24일 제2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필리프[1], 장[2], 마르그리트[3]가 있었으며, 아버지가 정부 마리에트 덩기앙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 형제 장 드 뒤누아도 있었다. 1406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미망인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로, 그에게는 사촌 지간인 이자벨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딸 잔이 태어났지만, 이자벨은 출산 직후인 1409년 9월 13일에 사망했다.1407년 11월 23일, 아버지 루이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사주를 받은 라울 당크통빌 휘하 암살자들에게 파리 시내에서 암살당했다. 이후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르마냑파를 결성해 내전을 단행했던 어머니 발렌티나 비스콘티는 부르고뉴파에게 밀려 블루아로 피신한 지 얼마 후인 1408년 12월 4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샤를은 불과 14살에 오를레앙 공작이자 아르마냑파의 우두머리로서 부르고뉴 파와 대적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 미성년자라서 실제로 군대를 지휘하지는 못했고,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등이 군대를 대신 지휘했다.
1410년 아르마냐크 백작으로서 아르마냑 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의 딸인 본 다르마냐크와 결혼했다. 이후 부르봉 공작 장 1세 드 부르봉, 베리 공작 장 드 베리, 알랑송 백작 장 1세 달랑송을 끌어들여 파리를 사이에 두고 부르고뉴파와 수 년간 치열한 내전을 벌인 끝에 1414년 부르고뉴파를 밀어내고 파리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던 141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는 이를 요격하고자 북상했지만, 그해 10월 25일에 벌어진 아쟁쿠르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로 끌려간 그는 런던 탑, 볼링브로크 성, 폰테프랙트 성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옥고를 치렀다. 다만 감금 조건이 엄격하지는 않아서, 그는 연금지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복 형제 장 드 뒤누아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헨리 5세는 그가 잉글랜드에 대적하는 아르마냑파의 지도자인데다 프랑스 왕위 계승 서열에 있기 때문에 풀어주기엔 너무 중요하다고 여기고 절대로 석방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25년간 잉글랜드에 살면서 여러 시와 노래를 집필해 총 131곡의 노래, 102곡의 발라드, 7곡의 애가, 400곡 이상의 롱도를 창작했다. 훗날 프랑스어와 영어로 쓰여진 시집 2권이 출판되기도 했다.
1440년 11월 3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는 샤를의 정적이었지만 오를레앙 세력과 화해하기를 희망한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포르투갈의 이사벨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 대신, 그는 몸값으로 80,000 크라운를 즉시 납부하고 140,000 크라운을 나중에 분할 납부해야 했고, 지난날 용맹공 장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에 대해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간 뒤 자신의 석방을 주선한 포르투갈의 이사벨을 찾아가서 감사를 표했다. 이후 오를레앙으로 복귀해 화려한 축하 행사를 개최했으며, 클레브 공작 아돌프 1세의 딸이며 선량공 필리프의 조카인 마리 드 클레브와 결혼했다. 1444년에는 그의 형제이며 역시 잉글랜드에 억류되어 있었던 앙굴렘 백작 장 도를레앙도 석방되었다.
이후 샤를은 프랑스 정계에 관심을 끊고 문학에 전념했다. 그는 블루아에서 문학 토너먼트를 조직해 외스타슈 데샹, 크리스틴 드 피장 등 수많은 시인들을 끌어모았고, 우승자에게 발라드와 론도 상을 수여했다. 그러면서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아스티 백국이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주권에 속하니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밀라노 공작은 이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이행하기 전인 1447년에 자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밀라노는 심각한 내란에 휘말렸다가 당대의 저명한 용병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새 공작으로 집권했다. 프란체스코 1세는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샤를은 이에 반발해 무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1448년 10월 18일 보스코 마렝고에서 그가 파견한 프랑스군이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에게 참패하면서,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자기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던 샤를은 1465년 1월 5일 푸아티에에서 영린 봉건 영주들의 모임에 참석한 뒤 돌아오던 중 앙부아즈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블루아의 생세비에르 교회에 안장되었다가, 1505년에 그의 아들인 루이 12세에 의해 파리의 셀레스틴 수녀원으로 이전되었다.
3. 가족
- 발루아의 이자벨(1389 ~ 1409):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미망인.
- 잔 도를레앙(1409 ~ 1432): 제2대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의 부인.
- 본 다르마냐크(1395 ~ 1430년에서 1435년 사이):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의 딸.
- 클레베의 마리(1426 ~ 1487): 클레브 공작 아돌프 1세의 딸.
- 마리 도를레앙(1457 ~ 1493): 나르본 자작이자 에탕프 백작 장 드 푸아의 부인.
- 루이 12세(1462 ~ 1515): 1465년부터 오를레앙 공작, 1498년부터 프랑스 국왕.
- 안(1464 ~ 1491): 퐁트브로의 수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