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Tanneguy III du Chastel | |
출생 | 1369년 | |
프랑스 왕국 브르타뉴 샤토 드 트레마장 | ||
사망 | 1449년 | |
프랑스 왕국 프로방스 | ||
아버지 | 에르베 2세 뒤 샤스텔 | |
어머니 | 마리 드 레스코에 | |
형제 | 기욤 2세 뒤 샤스텔 | |
배우자 | 시빌 르 보이에 | |
직위 | 기사, 기옌 원수, 파리 총독, 시종, 프로방스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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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샤를 7세의 측근이었다.2. 생애
1369년경 브르타뉴 샤토 드 트레마장에서 트레마장 영주 에르베 2세 뒤 샤스텔과 마리 드 레스코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4년 저지 섬 원정을 떠났다가 전사한 형 기욤 2세 뒤 샤스텔의 복수를 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다트머스 항구를 습격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 귀환했다. 1410년 로마로 가서 나폴리 국왕을 자치한 루이지 2세의 군대를 이끌고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와 맞서 싸웠다. 프랑스로 귀환한 뒤 기옌 공작 루이를 섬겼고, 기옌 원수에 선임되었다.1413년 5월 파리 폭동이 일어났을 때 도팽 루이를 구출한 뒤 프랑스 왕실의 총애를 얻어 1415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이자 파리 총독으로 선임되었고, 아르마냑파에 가담한 뒤 부르고뉴군을 슈브뢰즈에서 몰아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파리로 피신했다. 1417년 도팽 샤를에 의해 바스티유 원수 겸 총독에 선임되었다.
루이 샤를 오귀스트 쿠더 작, <도팽을 구출하는 타네기 뒤 샤스텔>, 1828년.
1418년 5월 28일 부르고뉴군이 파리로 진격했을 때, 그는 도팽 샤를을 안고 파리에서 탈출한 뒤 앙브루아즈 드 로레의 도움에 힘입어 멜룬으로 피신시켰다. 이후 도팽 샤를을 따르는 아르마냑군을 이끌고 부르고뉴군에 맞섰다. 1419년 9월 10일 몽뜨흐 다리에서 도팽 샤를과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을 때, 여러 기사와 함께 부르고뉴 공작을 기습 공격해 처단했다. 이로 인해 한때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맞서 싸우려 했던 부르고뉴파는 완전히 등을 돌려 잉글랜드와 손잡았고, 프랑스의 운명은 암울해졌다.
1425년부터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자연히 궁정에서 입지를 잃어갔다. 그래도 1429년 도팽 샤를이 잔 다르크를 받아들이고 그녀를 후원하도록 격려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잔 다르크의 활약이 이어지는 데 기여했다. 이후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고 샤를 7세의 곁에 있다가 1446년 궁정을 떠나 보케르로 은퇴한 뒤 프로방스의 주교가 되었다. 1448년 4월 교황 니콜라오 4세와의 협상을 위해 파견된 로마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1449년 프로방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시빌 르 보이에를 아내로 두었으나 자식을 남기지 못했다. 조카 타네기 4세 뒤 샤스텔은 루시옹의 총독이자 프로방스의 대주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