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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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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이지 2세.jpg
Louis II
Luigi II
가문 발루아 앙주 왕조
생몰년도 1377년 10월 5일 ~ 1417년 4월 29일
출생지 앙주 공국 툴루즈
사망지 앙주 공국 앙제 성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389년 - 1399년
앙주 공작 1384년 - 1417년
아버지 앙주 공작 루이 1세
어머니 블루아의 마리
형제 마리, 샤를
배우자 아라곤의 비올란테
자녀 앙주 공작 루이 3세, 레나토, 샤를, 마리, 욜랑드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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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8대 국왕. 라디슬라오와 대립왕이었다.

프랑스어 이름은 '루이', 이탈리아어 이름은 '루이지'이다. 앙주 공작으로서는 '루이 2세'이고, 나폴리 왕으로서는 '루이지 2세'지만 대립왕이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못했다.[1]

2. 생애

1377년 10월 5일 앙주 공국 툴루즈에서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브르타뉴 공작 샤를 드 블루아의 딸 마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1370년 ~ 1383년), 샤를(1380년 ~ 1404년)[2]이 있었다. 아버지 루이 1세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아들로,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로 패한 뒤 잉글랜드에 끌려갔다가 1360년 프랑스로 돌아갈 때 잉글랜드로 대신 보내진 인질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다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을 조국으로 보내주면 막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잉글랜드에서 극비리에 탈출했다. 장 2세는 아들이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고, 스스로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그곳에 지내다 사망했다.

1382년, 나폴리 국왕 조반나 1세헝가리 왕국의 국왕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루이 1세를 양자로 삼고 그동안 나폴리 국왕이 겸임했던 프로방스와 포르칼퀴에 백작을 양도하면서 자신을 도우라고 요청했다. 루이 1세는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사보이아 공국아메데오 6세, 밀라노의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지원을 받고 앙주 가문의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수만 병력을 동원한 뒤 조반나 1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카를로 3세와 대적했다. 그러나 군사적 역량을 갖춘 카를로 3세에게 고전하다가 1384년 9월 20일 바리에서 사망했다.

아버지가 허망하게 사망한 뒤 새 앙주 공작이 된 루이 2세는 7살에 불과했기에, 어머니 마리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남편이 이루지 못한 나폴리 왕위를 아들이 거머쥐게 만들기로 마음먹고, 남편의 친척들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베리 공작 장을 설득해 나폴리를 향한 새 원정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두 공작 모두 실패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거절했다. 그러던 1386년 2월, 헝가리 왕위에 오른 카를로 3세(헝가리 왕으로는 '카로이 2세')가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이 나폴리에 전해지자, 많은 나폴리 귀족들은 헝가리 왕가 출신의 카를로 3세의 아들 라디슬라오를 왕으로 받들기보다는 나폴리 왕국의 본류인 앙주 공국에서 새 왕을 세워야 한다고 여겼다. 여기에 클레멘스 7세 역시 루이 2세를 나폴리 왕으로 세움으로써 로마 교황을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압박하려 했다.

1387년 7월, 친 앙주 파가 조반나 1세의 네번째 남편으로 카를로 3세와 맞서다가 패배한 뒤 숨어지냈던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를 앞세워 나폴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라디슬라오는 누나 조반나, 어머니 마르게리타와 함께 가에타 요새로 도주했고, 나폴리는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오토는 앙주 공작 루이 2세를 나폴리 국왕 '루이지 2세'로 받들었고, 앙주 공국에서는 총독을 파견해 나폴리 왕국을 대리 통치하게 했다.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는 레이몬트 오르시니에게 나폴리를 라디슬라오의 지배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했지만, 레이몬트의 공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직 가에타, 아베르사, 카푸아만이 라디슬라오를 지지했고, 일부 도시는 아예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던 1389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하고 피에로 토마첼리 추기경이 보니파시오 9세로서 새 교황에 즉위했다. 그는 나폴리 왕국을 교황청의 수중에 온전히 돌려놓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라디슬라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마르게리타는 시칠리아의 유력 귀족인 만프레디 치아라몬테의 딸 코스탄차를 며느리로 삼음으로써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앙주 세력 역시 치아라몬테 가문에 루이지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만프레디는 라디슬라오를 택하기로 하고 1389년 9월 초 4척의 갤리선을 가에타로 파견해 라디슬라오를 지원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이에 맞서 루이지 2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고 30만 플로린을 군자금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389년 11월 1일, 클레멘스 7세는 루이지 2세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1390년 봄, 보니파시오 9세는 피렌체의 수석 추기경 안젤로 아치아올리에게 라디슬라오를 시칠리아, 예루살렘, 헝가리의 왕으로 즉위시키라고 지시했다. 안젤로 아치아올리는 가에타에 도착한 뒤 1390년 5월 29일 라디슬라오의 대관식을 거행했고, 마르게리타와 함께 라디슬라오 왕의 후견인이 되었다. 1390년 7월, 당시 13세였던 루이지 2세는 나폴리로 향했다.

이후 라디슬라오 세력과 루이지 2세 세력은 나폴리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루이지 2세가 내전에서 승기를 잡는 듯했다. 앙주 가문의 대규모 함대는 나폴리로 향해하면서 산텔모 성, 누오보 성 등 여러 해안 요새들을 공략했다. 1392년 아말피와 라벨로를 추가로 점령했고, 대부분의 칼라브리아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런데 루이지 2세를 물신양면으로 돕던 샤를 6세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국정운영이 불가능해지고 아우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가 프랑스의 최고 권력을 놓고 심한 갈등을 벌이면서, 프랑스 왕국의 지원이 끊어졌다.

게다가 1394년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면서 아비뇽 역시 지원을 꾸준히 보내기 힘들어졌다. 프랑스 측은 클레멘스 7세를 따랐던 추기경들에게 새 교황을 선출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베네딕토 13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루이지 2세는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왕실과 그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여기에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정치 공세에 넘어간 귀족들이 라디슬라오 편을 든 데다 치아라몬테 가문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라디슬라오 세력이 용병을 대거 고용해 반격해오자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393년 즈음에 이르러 친 앙주 세력은 나폴리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1399년, 라디슬라오는 오르시니 가문의 지원에 힘입어 나폴리를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봉쇄했다. 결국 나폴리는 항복했고, 루이지 2세는 앙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라디슬라오는 나폴리 왕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이후 앙주에서 조용히 지내던 루이지 2세는 1409년 라디슬라오의 북부 이탈리아 침공을 막으려는 피사의 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부터 나폴리 왕이 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는 1409년 7월 말 1,500명의 기병과 함께 피사에 도착한 뒤 나폴리 왕관을 썼다. 여기에 무치오 아텐돌로, 브라초 다 몬토네가 이끄는 동맹군이 라디슬라오의 통제 아래 있던 교황령을 침공하고 로마로 이동했다. 라디슬라오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2,000명의 병력을 줘서 로마를 지키게 했지만, 그들은 적군이 로마로 접근하자마자 항복했다. 그러나 동맹군은 바티칸과 트라스테베레 구역만 공략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친 나폴리 세력이 여전히 강성했다. 코사 추기경과 루이지 2세는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로마 공략을 맡기고 추가 지원을 얻고자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로 이동했다.

1410년, 라디슬라오는 제노바의 반 프랑스 반란을 이용해 제노바의 지지를 얻어냈다. 동맹군은 그해 1월 2일에 로마를 접수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로방스에서 새 병력을 싣고 항해하던 루이지 2세의 함대는 토스카나 해안에서 나폴리 해군의 급습으로 6,000명의 병력과 60만 두카트 가치의 보물을 상실했다. 그 동안 알렉산데르 5세는 사망했고, 발다사레 코사가 요한 23세로서 교황에 즉위했다. 요한 23세는 라디슬라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이를 위한 군자금 마련을 승인했다.

라디슬라오는 적이 주춤한 사이 피렌체, 시에나와 평화 협약을 맺고 병력을 집결시켰다. 1411년 5월 19일 무치오 아텐돌로가 이끄는 군대와 로카세카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나폴리군이 패배했지만, 무치오는 라디슬라오가 산게르마노에 설치한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병력과 물자가 소진된 루이지 2세는 앙주로 돌아갔다. 141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침공에 맞서기 위한 왕국군 소집령에 응해 북상했지만, 도중에 병에 걸려서 아쟁쿠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프랑스군이 궤멸되어 수많은 귀족이 잉글랜드군에게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1417년 4월 29일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사후 장남 루이 3세가 새 앙주 공작으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1] 앙주 공국과 나폴리 왕국 두곳 다 선대에 이름이 같은 군주가 한명씩 있어서(앙주 공작 루이 1세, 나폴리 공동 왕 루이지 1세) 양국에서 모두 군주명에 '2세'가 붙었다.[2] 타란토 공작, 루시, 에탐페, 기엔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