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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17:55:43

알렉산데르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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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알렉산데르 5세.jpg
교황 알렉산데르 5세(Alexander V)
세속명 피에트로 필라르고(Pietro Filargo)
출생지 크레타 네아폴리
사망지 볼로냐
생몰년도 1339년 ~ 1410년 5월 3일
재위기간 1409년 6월 26일 ~ 1410년 5월 3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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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

1339년경 크레타의 네아폴리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된 그는 카푸친 수사에게 거둬져서 그로부터 초등 교육을 받았다. 이후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했고, 1357년 파도바와 노리치에서 공부한 뒤 옥스퍼드 대학교로 건너가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러시아, 보헤미아, 폴란드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381년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380년대 중반에는 밀라노 초대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궁정에 있었다. 이후 비스콘티의 후원을 받으며 파비아에서 신학 교수를 맡았고, 뒤이어 피아첸차, 비첸차, 노바라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1378년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발했을 때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를 확고히 지지했고, 1402년 밀라노 대주교가 된 뒤 1405년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7세로부터 추기경에 발탁되었다. 그는 교황청의 재통합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지만, 그 과정에서 인노첸시오 7세의 뒤를 이어 로마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2세의 불만을 샀다. 특히 잉글랜드 왕국이 두 교황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취하도록 권장하자, 그레고리오 12세는 이를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고 그의 추기경 직위를 해임했다.

1409년,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동시에 물러나고 새 교황을 세워서 교황청을 통합해야 한다고 여긴 추기경들이 피사에 집결해 공의회를 개최했다. 그는 피사 공의회의 주요 조직자 중 한 명이었고, 개회 연설을 직접 작성했다. 공의회는 베네딕토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를 이단자로 선언하고 교황 선거를 벌인 끝에 1409년 6월 26일 피에트로를 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보헤미아,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 제후들, 이탈리아 북부 및 중부 도시 국가들은 그를 지지했지만,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사임을 거부하고 일부 국가들의 지지를 여전히 받았다.

알렉산데르 5세는 교황으로 선임된 후에도 공의회를 계속 개최하면서 교회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여러 성직을 프란치스코회 신자들에게 나눠줬고, 면죄부를 발매할 권리를 포기하고 주요 대성당과 수도원에서 정식 선거 제도를 재구축하는 등 교회 전반의 시스템을 재정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손잡고 그레고리오 12세를 돕고 있는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와 맞서게 했다. 라디슬라오가 토스카나를 침공해 그곳의 군주 게라르도 아피아니로부터 코르토나와 엘바 섬을 빼앗고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를 가에타로 이송시키는 등 세력 확장을 꾀하자, 알렉산데르 5세는 라디슬라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루이지 2세에게 나폴리를 다시 정복하라고 권고했다. 여기에 시에나 공화국과 피렌체 공화국, 그리고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는 라디슬라오의 야심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루이지 2세는 1409년 7월 말 1,500명의 기병과 함께 피사에 도착한 뒤 나폴리 왕관을 썼다. 여기에 무치오 아텐돌로, 브라초 다 몬토네가 이끄는 동맹군이 라디슬라오의 통제 아래 있던 교황령을 침공하고 로마로 이동했다. 라디슬라오는 오르시니 가문에게 2,000명의 병력을 줘서 로마를 지키게 했지만, 그들은 적군이 로마로 접근하자마자 항복했다. 그러나 동맹군은 바티칸과 트라스테베레 구역만 공략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친 나폴리 세력이 여전히 강성했다. 피렌체의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과 루이지 2세는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로마 공략을 맡기고 추가 지원을 얻고자 이탈리아 북부와 프로방스로 이동했다. 1410년, 라디슬라오는 제노바의 반 프랑스 반란을 이용해 제노바의 지지를 얻어냈다. 동맹군은 그해 1월 2일에 로마를 접수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로방스에서 새 병력을 싣고 항해하던 루이지 2세의 함대는 토스카나 해안에서 나폴리 해군의 급습으로 6,000명의 병력과 60만 두카트 가치의 보물을 상실했다.

1410년 5월 3일, 알렉산데르 5세는 볼로냐에서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과 만나 라디슬라오와의 전쟁에 관하여 논의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코사는 그의 뒤를 이어 교황 요한 23세로 등극했지만, 알렉산데르 5세를 독살했다는 세간의 의혹과 비난에 시달렸다.

알렉산데르 5세는 훌륭한 신학자이자 신학교수로서 당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성모의 무염시태에 관하여>, <롬바르드의 피에트로의 사설에 관하여> 등 여러 신학 논문을 기고했으며, 여러 대학에서 우수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교황으로서 추진한 개혁 역시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교황청은 오랫동안 그를 정당하게 선출된 교황으로 보았고, 그레고리오 12세의 치세는 알렉산데르 5세의 등극과 함께 종결된 것으로 간주했다. 1893년 교황 레오 13세는 알렉산데르 5세의 무덤 복원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역대 교황들의 목록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데르 5세의 즉위 과정이 비합법적이라는 지적이 이어졌고,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여 알렉산데르 5세를 대립교황으로 격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