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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5:26:09

빅토르 4세(11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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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빅토르 4세(Victor IV)
세속명 오타비아노 데 몬티첼리 (Ottaviano de' Monticelli)
출생 미상
몬티첼리
사망지 1164년 4월 20일 (향년 불명)
루카
재위기간 1159년 9월 7일 ~ 1164년 4월 20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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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대립한 대립교황.

영국, 프랑스, 시칠리아의 지지를 받은 알렉산데르 3세에 비해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로마에서 교황 구실을 한것은 알렉산데르 3세가 아닌 빅토르 4세였다. 그러나 급서하면서 알렉산데르 3세가 승리하게 되었고, 빅토르 4세는 대립교황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2. 행적

투스쿨룸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크레센티 가문의 일원으로, 일찍이 교회에 들어가 성직 활동을 하였고 1137년 5월 베네벤토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138년에는 카르세레에 있는 산 니콜라 성당의 부제이자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1151년 성 체칠리아의 추기경 대주교로 승진했다.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중요한 측근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교황 특사로 활동하면서 신성 로마 황제가 될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와 친분을 맺었다.

1159년 9월 1일 신성 로마 황제가 교황의 밑에 들어간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아 프리드리히 1세와 수시로 마찰을 벌였던 교황 하드리아노 4세가 사망한 후, 교황청 내부에서는 차기 교황을 놓고 2개의 집단이 갈등을 벌였다. 오타비아노 등 소수의 추기경들은 신성 로마 제국과 화해하고 동맹을 유지하기를 희망한 반면, 대다수 추기경들은 황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시칠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 싶어했다. 선거 결과 대다수 추기경들이 롤란도 반디넬리를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 추대했지만, 5명 이하의 추기경들은 이 결과를 거부하고 별도로 선거를 벌여 오타비아노를 교황 빅토르 4세로 추대했다.

급기야 오타비아노를 지지하는 군중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습격해 봉헌식을 거행하려던 알렉산데르 3세를 몰아내고 빅토르 4세의 교황 즉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3세는 다른 성당에서 봉헌식을 거행한 뒤 자신이야말로 정상적으로 선출된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양자는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교황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160년 2월, 프리드리히 1세는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두 교황에게 공의회에 참석해 입장을 밝히라고 요청했다. 이 공의회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성직자들이 배제되었고, 50명 가량의 독일 대주교와 주교가 참석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이것을 보고 황제의 의도를 눈치채고, 자신은 오직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뿐 황제에게 선택될 수 없다며 공의회 참석을 거부했다.

그 후 프리드리히 1세는 공개적으로 빅토르 4세를 교황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했고, 공의회 역시 빅토르 4세를 교황으로 선언하고 알렉산데르 3세를 파문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이에 대응해 프리드리히 1세와 빅토르 4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1세의 조언자들를 모두 파문했다. 1160년 10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 프랑스 국왕 루이 7세, 그리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성직자들이 모여서 공의회를 개최한 뒤 알렉산데르 3세가 정당한 교황이며 빅토르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빅토르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해 알렉산데르 3세와 대립했다. 황제가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기에 그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알렉산데르 3세는 제국군의 압박을 피해 프랑스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3세는 스웨덴,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헝가리, 시칠리아 등 여러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 1162년 프리드리히 1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생장드로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권했다. 루이 7세는 회의장에 가까이 갔지만, 프리드리히 1세가 빅토르 4세를 올리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로비를 많이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프리드리히 1세의 간섭에 반감을 품고 알렉산데르 3세 지지로 선회하면서, 빅토르 4세의 입지는 갈수록 약해졌다.

그러던 1164년 4월 20일, 빅토르 4세는 쾰른 대주교이며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방면 제국 재상을 맡고 있던 다셸의 레이날트와 함께 롬바르드 지방을 여행하며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려 애쓰던 중 루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루카 대성당의 성직자들은 그가 파문당했다는 이유로 그곳에 매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유해는 지역 수도원에 묻혔다. 이후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187년 12월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주민들이 그를 숭배 대상으로 삼을 것을 우려해 무덤을 파괴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