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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나폴리 왕국 제4대 여왕 조반나 1세 Giovanna I di Napoli | ||
Giovanna I | ||
가문 | 앙주 왕조 | |
출생 | 1325년 | |
나폴리 왕국 나폴리 | ||
사망 | 1382년 7월 27일 (향년 56~57세) | |
나폴리 왕국 산필레 | ||
재위 기간 | 나폴리 왕국 국왕 | 1343년 ~ 1382년 |
프로방스와 포르칼퀴에 백작 | 1343년 ~ 1382년 | |
배우자 | 헝가리의 언드라시[1] (1333년 결혼/1345년 사망) | |
루이지 1세 (1347년 결혼/1362년 사망) | ||
하이메 4세 (1363년 결혼/1375년 사망) | ||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 (1376년 결혼) | ||
자녀 | 카를로 마르텔, 카타리네, 프랑수아즈 | |
아버지 |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 |
어머니 | 발루아의 마리 | |
형제자매 | 엘로이사, 카를로 마르텔, 마리아[2] | |
종교 | 로마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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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제4대 여왕.2. 생애
1325년경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와 발루아의 마리[3]의 넷째로 출생했다. 형제로 엘로이사(1325년 1월 ~ 12월), 카를로 마르텔(1327년 4월 13일 ~ 21일), 마리아(1329년 ~ 1366년)가 있었다. 아버지 카를로는 나폴리 3대 국왕 로베르토의 유일하게 장성한 아들로 일찌감치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1328년 11월 9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렸다. 어머니 발루아의 마리 역시 1331년 10월 23일 바리 순례 도중 사망했다.로베르토 왕은 카를로 사망 후 큰손녀 조반나와 헝가리 국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카로이 로베르트 중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를 두고 고심한 끝에 조반나를 택했다. 조반나는 1330년 11월 4일에 왕위 계승자로 공식 지명되었고, 1333년 9월 26일에 칼라브리아 여공작으로, 1334년 6월 26일에는 살레르노 여공작으로 선포되었다.[4] 로베르토는 카로이 로베르트가 반발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 카로이 로베르트의 차남인 언드라시를 조반나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조반나와 언드라시는 1332년 11월 8일 약혼했고, 1333년 9월 26일 산타 키아라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언드라시는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선임되어 나폴리에서 살았다.
1343년 1월 20일 로베르토 왕이 사망했다. 로베르토는 유언장에서 손녀 조반나의 왕위 계승을 명시하면서 언드라시가 나폴리 왕이 될 자격을 박탈하고 그 대신 살레르노 공작에 선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조반나가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조반나의 여동생 마리아와 마리아의 합법적인 후손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이리하여 조반나가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로서 왕위에 올랐고, 계모인 마요르카의 산치아, 카비용 주교 필리포 드 카바솔레스, 장관 대리 필리포 드 상가네토, 프로방스 로베르토 왕의 사생아이자 궁정 관료였던 카를로 아르투아 등이 섭정했다. 여기에 교황청에서 특사 아이메리 드 샤텔루스를 파견해 나폴리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반나가 왕위를 계승받은 후, 로베르토의 유언을 전해들은 헝가리 왕실은 분개했다. 언드라시의 형이자 헝가리 국왕인 러요시 1세는 동생이 상속권을 되찾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모라비아의 카렐에게 사절을 보내 나폴리 왕국을 공동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또한 러요시의 어머니인 엘즈비에타는 1343년 여름에 막대한 금과 은을 가지고 나폴리로 가서 7개월 동안 조반나 1세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언드라시가 나폴리의 공동 왕이 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교황은 중재에 나섰고, 1344년 8월 28일 조반나 1세가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언드라시가 이에 참석하여 왕의 칭호를 받게 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이후에도 정치에 일절 관여할 수 없었다.
언드라시는 이에 불만을 품은 데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엘즈비에타에게 "나폴리에서 도망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엘즈비에타는 교황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며 "언드라시 역시 별도의 대관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클레멘스 6세는 조반나 1세에게 "언드라시의 대관식을 거행하라"고 권고했다. 다만 언드라시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그녀의 대관식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거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폴리의 단독 국왕이 되고 싶었던 조반나 1세는 언드라시의 대관식 거행을 차일피일 미뤘다.
1344년,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2세는 여왕의 즉위로 나폴리 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알렉산드리아, 아스티, 트리토나, 브라, 알바를 공략했다. 조반나 1세는 롬바르디아의 앙주 가문 영지 관료였던 레포르체 다굴트에게 몬페라토를 응징하게 했다. 그러나 레포르체는 1345년 4월 23일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조반니 2세에게 참패하고 전사했다. 이후 조반니 2세는 조반나 1세를 지지했던 피에몬테의 자코모의 영지 내에 있는 키에리를 공략했다.
1345년 여름 조반나가 병에 걸렸을 때, 언드라시는 그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피피니 형제를 석방했다. 그들은 살인, 강간, 약탈, 반역 등 여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로베르토 왕에 의해 감금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다른 귀족들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언드라시가 피피니 형제를 풀어주고 빼앗은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귀족들은 자연히 언드라시에게 적의를 품었다. 그들은 곧 언드라시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345년 9월 18~19일, 조반나 1세와 언드라시 부부는 아베르사에서 사냥했다. 그날 밤, 언드라시는 한방중에 음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방에서 뛰쳐나와 궁궐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하인이 문을 걸어잠가서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여왕에게 구원을 호소하고자 그녀의 침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중에 음모자들에게 다시 습격을 받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여왕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조반나 1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언드라시는 끝내 제압당한 뒤 밧줄로 목이 졸려 죽은 뒤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언드라시의 헝가리 간호사였던 이졸데는 언드라시의 비명 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와서 그의 시신을 수습해 수도원 성당으로 가져갔다. 다음날 헝가리 기사들이 도착하자, 그녀는 헝가리어로 이 사실을 알렸다. 기사들은 언드라시의 유해를 가지고 헝가리로 돌아가 러요시 1세에게 보고했다. 조반나 1세는 사건 후 교황과 유럽의 군주들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그녀가 이 암살을 직접 지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건 당시 남편을 구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후 조반나 1세는 1345년 12월 25일 언드라시의 유복자인 카를로 마르텔을 낳았다. 카를로 마르텔은 1346년 12월 11일에 나폴리 왕국의 후계자로서 칼라브리아 공작과 살레르노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타란토 공작 필리포 1세의 차남인 루이지와 재혼하기로 했다. 그런데 루이지는 언드라시 살해에 깊이 관여한 데다 조반나 1세와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세간의 시선이 매우 좋지 않았고 교황도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조반나 1세와 루이지는 이를 무시하고 1347년 8월 22일 결혼식을 거행했고, 루이지는 두라초 공작 카를로[5]와 함께 왕국의 공동 수호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반나 1세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외세는 조반나 1세가 이대로 자리잡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347년 7월, 피에몬테의 자코모는 사촌이자 사보이아 백작인 아메데오 6세와 손잡고 몬페라토를 공격하여 잃어버렸던 영지를 상당수 회복했다. 이에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2세는 살루초 후작 토마소 2세와 비엔 공작 윔베르 2세와 연합해 다시 공세를 개시하여 롬바르디아 일대의 나폴리 왕국 영토를 거의 빼앗았다. 한편, 언드라시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접한 러요시 1세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남편을 살해한 여왕을 폐위시키고 언드라시의 아들(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마르텔)을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조카의 섭정을 맡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이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자, 러요시는 나폴리 왕국의 본토인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군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1347년 4월 24일 바사리 미클로시(Vásári Miklós ?~1358)가 지휘하는 선봉대를 이탈리아로 파견하고, 여러 분견대를 잇따라 파견했다. 헝가리군은 연전연승하며 우디네, 베로나, 모데나, 볼로냐, 우르비노, 페루자를 거쳐 라퀼라까지 진격했다.
조반나 1세는 헝가리군과의 전쟁에 온 힘을 집중하고 싶었기에 선왕 로베르토 시절부터 이어져온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고 여겼다. 시칠리아 왕국 역시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고 흉흉한 민심을 달래야 했다. 그리하여 양자는 수년간 평화 협상을 가졌고, 1347년 11월 7일 카타니아에서 평화협약을 맺었다. 시칠리아 왕국의 독립은 유지되었지만, 루이지는 시칠리아 왕이 아니라 시칠리아의 고대 이름인 트리나크리아(Trinacria)의 왕을 칭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황청과 여러번 갈등을 벌인 시칠리아 왕국을 이대로 끝장내고 싶었기에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시칠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전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헝가리군은 조반나 1세가 파견한 군대를 모조리 격파하고 1348년 1월 11일 베네벤토에 입성했다. 이에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15일 몇몇 측근과 함께 갤리선 2척을 타고 마르세유로 도주했다. 루이지는 다음날 다른 갤리선을 타고 아내를 따라갔다. 조반나 1세의 친척인 타란토 공작 로베르트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는 러요시를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 러요시는 이들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들의 형제이며 여전히 헝가리에 맞서고 있는 타란토의 필리포와 두라초의 루도비코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시키는 대로 형제들을 설득한 뒤 함께 귀순하자, 러요시는 태도를 싹 바꿨다. 그는 남동생 언드라시가 살해된 일에 대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현장에서 체포했다. 다음날인 1348년 1월 23일, 두라초 공작 카를로는 러요시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되었다. 다른 인사들은 러요시의 어린 조카 카를로 마르텔과 함께 헝가리로 이송되었다.
1348년 2월, 러요시는 나폴리로 진격했다. 나폴리 시민들이 공물을 바치겠으니 군대를 입성시키지 말고 그와 수행원들만 도시에 들어와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공물을 더 바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병사들이 도시를 철저히 약탈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거절했다. 그는 역대 나폴리 왕들의 칭호인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 풀리아 공작과 카푸아 공작"을 왕호에 덧붙였고, 여러 요충지에 용병들을 주둔시키는 등 남부 이탈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여기에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모든 공범을 잡기 위해 의심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처음에 러요시에게 복종했던 이탈리아 귀족들은 그의 이같은 강압 정책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헝가리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해버리면 너무 강해져서 교황령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해 그가 나폴리를 통치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러요시 1세는 더 많은 병력을 이탈리아에 상륙시켜서 이탈리아 귀족들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때마침 중세 흑사병이 돌면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1348년 5월 헝가리로 철수했다.
한편,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20일 마르세유에 도착한 뒤 마르세유 시의 특권을 지키겠다고 맹세해 주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았다. 이후 프로방스로 가서 지지를 호소한 뒤 3월 15일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6세와 면담했다. 교황은 언드라시 살인 사건에 아무 관련이 없다는 조반나 1세의 호소를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하고, 언드라시 살인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을 조사할 위원회를 설립했으며, 조반나 1세와 타란토의 루이지의 결혼을 허가했다. 그 대가로, 아비뇽을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8만 플로린에 사들였다.
러요시 1세가 나폴리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반나 1세는 7월 21일 아비뇽을 떠나 마르세유에 잠시 머물다가 7월 30일 사나리수르메르, 7월 31일 브레간송 요새로 이동한 후 1348년 8월 17일 나폴리로 향했다. 러요시 1세는 떠나기 전에 울리히 볼프하르트(Ulrich Wolfhardt)를 나폴리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울리히는 조반나 1세가 9월에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폴리에 돌아온 그녀의 권력은 이전보다 훨씬 약화되었다. 1349년 초부터 나폴리 왕국의 모든 문서에는 그녀와 남편 루이지의 이름이 동시에 새겨졌으며, 모든 군사 요새와 군대는 루이지의 통제를 받았다. 왕국에서 발행된 동전들 역시 루이지의 이름이 조반나의 이름보다 우선적으로 새겨졌다. 이렇듯 권세가 갈수록 강해진 루이지는 조반나 1세의 지지자들을 궁정에서 축출했다. 특히 조반나 1세가 마르세유로 망명했을 때 함께 따라가는 등 여왕의 곁에 항상 함께 있어서 여왕의 애인이란 소문에 휩싸였던 엔리코 카라촐로를 처형했다.
1350년 4월, 러요시 1세가 또다시 이탈리아로 친정했다. 그는 바를레타(Barletta)에서 용병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각지를 진군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해 누구도 감히 원정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은 이에 두려움을 품긴커녕 격렬하게 저항했고, 원정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고, 요새를 공략할 때 친히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갈 정도로 분투했다. 8월 3일 나폴리 왕국의 핵심 요새인 아베르사가 함락되자, 조반나 1세는 또다시 나폴리에서 마르세유로 망명했다. 그러나 아베르사를 공략하던 중 왼쪽 다리에 화살이 박혀 중상을 입은 데다,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군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었던 러요시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 후 러요시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나폴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교황은 러요시에게 조반나 1세가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얼만큼 관여했는지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헝가리로 끌고 갔던 공작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30만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러요시 1세는 여전히 자신을 살레르노의 공작이자 산탄젤로의 영주라고 칭하며, 조부인 카로이 마르텔 이래로 나폴리 왕국에 지분이 있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교황의 언드라시 암살사건 조사는 얼마 안가 흐지부지되었다.
1352년 3월 23일, 루이지는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나폴리의 공동 왕이라는 인정을 받은 뒤 5월 27일 브라가 대주교의 주관하에 루이지 1세로서 조반나 1세와 함께 나폴리 왕관을 썼다. 1356년 루이지 1세와 조반나 1세는 시칠리아 탈환 전쟁을 단행했다. 루이지 1세가 이끄는 나폴리군은 메시나에 상륙해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카타니아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나폴리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였다. 얼마 후 카탈루냐 출신 귀족들이 동원한 용병대가 나폴리군을 격파했고, 아시레알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나폴리 함대가 시칠리아 함대에게 참패했다. 결국 루이지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나폴리로 철수했다. 1357년 7월 13일, 아르노 드 세르볼의 용병부대가 두랑 강을 건너 프로방스를 약탈했다. 루이지의 동생이자 조반나 1세의 여동생 마리아의 세번째 남편인 타란토의 필리포 2세는 프로방스 총대리로서 이들과 맞섰다. 그는 아르마냐크 백작의 지원을 토대로 이들을 몰아붙인 끝에 격퇴했다.
1362년 4월, 루이지 1세는 목욕하던 중 감기에 걸렸다. 그의 병세는 1달간 악화되다가 1362년 5월 25일에 병사했다. 그리하여 권력을 되찾은 조반나 1세는 남편의 심복들을 궁정에서 내쫓고 자신의 사람들을 선임했다. 이후 1362년 12월 14일 마요르카의 명목상 왕인 하이메 4세와 3번째로 결혼했다. 결혼식은 1363년 5월 카스텔누오보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하이메 4세는 과거에 아라곤 왕 페로 4세에 의해 철창에 14년간 갇혀 지내야 했던 일이 있었기에 정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여기에 조반나 1세가 루이지 1세에게 권력을 철저하게 박탈당했던 일을 교훈삼아 어떤 권력도 남편에게 주지 않자, 하이메 4세는 환멸을 느끼고 1366년 1월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마요르카 탈환을 시도했으나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에게 체포된 뒤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넘겨져 몽필리에에 연금되었다. 1370년 조반나 1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갔지만 얼마 후 그녀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다시 떠나 1375년 루시용과 체르다냐를 공략하려 했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소리아로 도피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365년 6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카를 4세가 아비뇽으로 가서 아를의 왕으로 즉위해 옛 아를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프로방스에 대한 조반나 1세의 권리를 보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동생인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프로방스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손잡고 공세를 개시해 아를과 타라스콘을 포위 공격했다. 아를은 곧 함락되었지만, 타라스콘은 프로방스 군대에 의해 19일 만에 구출되었다. 나폴리 궁정 관료 레몽 2세 달굴트가 반격에 나섰지만 세레스테에서 패배했다.
1368년,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인근까지 약탈을 자행하는 앙주 공작과 게클랭에게 분노해 파문을 선언했다. 여기에 샤를 5세가 게클랭을 소환하면서 믿었던 아군이 사라지자, 루이 1세는 1370년 1월 조반나 1세와 평화협약을 맺었고 1371년 4월 타라스콘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조반나 1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용병대장 오토[6]의 활약 덕분에 피에몬테의 영지를 회복했다.
이 무렵, 조반나 1세의 여동생인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의 막내딸인 두라초의 마르게리타와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의 아들 카를로의 결혼이 논의되었다. 조반나 1세는 두라초 공작 루도비코를 반역 혐의로 처형한 적이 있었기에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러요시 1세가 강하게 추진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 결혼은 사촌간의 결혼이었기에 교황청의 관면이 필요했는데, 1369년 6월 15일 교황 우르바노 6세의 관면이 내려지면서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1370년 1월 24일, 카를로와 마르게리타는 나폴리에서 결혼식을 거행한 뒤 9월 16일 자다르로 떠났다.
1373년 3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아베르사에서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자신을 교황과 조반나 1세의 가신으로 칭하면서도 트리나크리아(Trinacria)[7]의 왕으로서 시칠리아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용인되었으며, 자기가 죽으면 유일한 자식인 마리아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가문의 왕족과 결혼하도록 하겠다고 약조했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 4세와 화해하고 1321년부터 바르셀로나 왕조에 가해지던 파문을 해제했다.
그리하여 모든 전쟁을 종식하고 안정을 되찾은 후, 조반나 1세는 왕국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의 승인없이 어떤 법이나 칙령을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은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결재서류를 처리했다. 지역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왕국의 수도인 나폴리의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건축사업을 단행했다. 조반나 1세의 통치 하에서 사회는 안정되었고, 범죄는 크게 줄어들었다.
1375년 12월 25일, 조반나 1세는 피에몬테의 영지 확보에 큰 공을 세운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와 4번째로 결혼했다. 결혼식은 3개월 후인 1376년 3월 25일 카스텔누오보에서 거행되었다. 이번에도 오토의 정치참여는 배제되었고, 조반나 1세는 나폴리의 유일한 군주로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오토 사이에 후계자가 태어나면 왕국을 그 아이에게 넘기고, 자식을 끝내 보지 못하면 오토가 왕권을 행사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1378년 9월 20일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들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우면서 서방교회 대분열 시대가 개막했다. 러요시 1세는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그런데 조반나 1세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고, 우르바노 6세는 그녀를 파문에 처한 뒤 러요시의 궁정에 머물고 있던 카를로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아들은 없고 딸만 있던 러요시 1세는 카를로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웠다가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헝가리 국왕으로까지 즉위하려 할 것을 걱정했다. 이에 카를로는 러요시 1세가 죽더라도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으며 그의 딸이 헝가리 국왕이 되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는 1380년 여름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호르바트 야노시가 이끄는 9,000명의 헝가리군과 이탈리아 용병대가 그와 함께 했다. 1380년 11월 11일 로마에 도착한 그는 1381년 6월 2일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반나 1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피렌체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그들은 중재할 의사는 있지만 헝가리 국왕과 교황이 지원하는 인물을 대적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카를로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용병대를 고용한 뒤 나폴리 왕국으로 행진했다.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는 그를 막기 위해 출진했지만 아리엔초 인근에서 참패했다. 이후 카를로는 나폴리를 포위해 1달간 공성전을 치른 끝에 1281년 8월 25일 조반나 1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조반나 1세는 처음에는 카스텔 누오보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는 노체라 요새로 보내졌다. 조반나 1세는 순순히 퇴위하기로 했지만 비밀리에 추종자들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 카를로는 이 사실을 적발한 뒤 1382년 5월 22일 무로 로카노 인근의 산필레 요새에서 조반나 1세를 살해했다.
조반나 1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교황 우르바노 6세의 비서인 니엠의 토마스는 "조반나가 개인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중, 헝가리 병사들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고 기술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아내인 블루아의 마리는 "조반나가 헝가리인으로 추정되는 4명의 남자에게 손발이 묶인 채 매트리스에 깔려 질식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유해는 나폴리로 옮겨진 뒤 며칠 동안 대중에 공개했다. 조반나 1세는 파문당한 처지였던 터라 교회 묘지 안장이 거부되었고, 나폴리의 산타 키아라 성당의 깊은 우물에 던져졌다. 이후 카를로가 나폴리 국왕 카를로 3세로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 언드라시(1327년 ~ 1345년):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의 차남.
- 카를로 마르텔(1345년 ~ 1348년): 헝가리 비셰그라드에서 2살의 나이로 요절함.
- 루이지 1세(1320년 ~ 1362년): 타란토 공자, 나폴리 국왕.
- 카타리네(1348년 ~ 1349년): 요절.
- 프랑수아즈(1351년 10월 ~ 1352년 6월 2일): 요절.
- 하이메 4세(1336년 ~ 1375년): 마요르카 왕 하이메 3세의 아들.
-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1320년 ~ 1398년):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장남. 카를로 3세와의 전쟁에서 패해 아내가 포로로 붙잡혀 처형된 뒤 은거했다. 1387년 7월, 친 앙주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카를로 3세의 아들 라디슬라오를 축출했을 때 그들의 지도자로 받들어졌지만, 얼마 후 라디슬라오의 반격으로 패배한 뒤 그루벤하겐으로 도주했다. 이후 재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내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