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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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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o IV de Aragón
가문 바르셀로나 왕조
출생지 1319년 9월 5일
아라곤 왕국 발라게르
사망지 1387년 1월 6일 (향년 67세)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재위
기간
아라곤 왕국 국왕 1336년 ~ 1387년
아버지 알리폰소 4세
어머니 에텐사의 테레사
친형제 알폰소, 콘스탄사, 우르헬 백작 하이메 1세, 이사벨, 페데리코, 산초
이복형제 페르난도, 후안
배우자 나바라의 마리아,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 포르티아의 시빌라
자녀 콘스탄사, 후아나, 마리아, 페드로, 추안 1세, 마르틴 1세, 레오노르, 알폰소, 알폰소, 페드로, 이사벨
종교 기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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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14대 국왕.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페드로 4세', 아라곤어로는 '페로 4세'이다.

2. 생애

1319년 9월 5일 아라곤 왕국 빌라게르에서 당시 우르헬 백작이었던 알폰소 4세와 에텐사 영주 곰바우의 딸 테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제로 알폰소, 콘스탄사, 우르헬 백작 하이메 1세, 이사벨, 페데리코, 산초가 있었고, 이복형제로 페르난도, 후안이 있었다. 1327년 아버지가 아라곤 왕위에 오른 뒤 아라곤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1329년 아버지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레오노르와 결혼한 후 문제가 발생했다.

레오노르는 알폰소 4세가 전 아내 테레사에서 낳은 아이들보다 자신의 아이들이 더 많은 영지와 권력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차기 국왕에 자기 아들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알폰소 4세는 레오노르의 거듭된 설득을 받아들여 1329년 12월 28일 레오노르의 아들 페르난도에게 토르토사 후작령과 알바라신, 오리우엘라, 칼로사 단 사리아, 과르다마르, 알리칸테, 몬포르테, 엘다, 라몰라, 노벨다, 아스페 등의 도시들을 하사했다. 여기에 5년 후에 태어난 레오노르의 작은 아들 후안 역시 갓난 아기일 때 엘체, 비엘, 볼사 등지를 수여받았다. 이에 페드로는 강하게 반발했고, 귀족들 역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레오노르 왕비와 그녀의 아들들을 지지했고, 다른 한 쪽은 페드로와 그의 친형제들의 특권을 옹호했다.

1336년 1월 24일 알폰소 4세가 사망하자, 즉시 사라고사에서 왕족들과 귀족, 사제들을 소집하여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는 사라고사 대주교에게 왕관을 씌워지는 관례를 거부하고 스스로 왕관을 썼고, 교황에게 왕국을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이후 발렌시아로 가서 아버지가 계모에게 현혹되어 너무 많은 영지를 이복형제들에게 양도했다고 비판하면서, 레오노르의 아라곤 왕국 내 수입을 박탈하고 그녀를 지지했던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레오노르는 페드로가 자신의 두 아들 페르난도와 후안을 해칠 것을 우려해 자식들을 데리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도주했다. 이때 그녀는 남편이 물려준 많은 양의 금, 은, 보석을 가지고 갔지만, 도중에 페드로 4세가 보낸 부관에 의해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이러한 숙청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은 각지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특히 제리카(Jérica)의 하이메 3세의 세력이 강성해 페드로 4세가 쉽사리 억누를 수 없었다. 게다가 모로코를 평정한 마린 왕조아불 하산 알리알안달루스를 복원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올 준비에 착수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페드로 4세는 제리카 백국과 화해하고 레오노르가 아라곤 왕국에 소유하고 있는 영지의 수입을 받을 수 있게 해줬다.

이후 나바라 공동 왕 필리페 3세호아나 2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고, 1339년 5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와 동맹을 맺고 아불 하산 알리의 영토를 선제 공격하려 했지만 1339년 10월 알헤시라스 부근에서 마린 해군에게 참패하고 조프레 길리베르 제독이 전사했다. 1340년 4월 8일, 아불 하산 알리의 제독 무함마드 알 아자피는 51척의 카스티야 함대 중 35척을 나포하고 적장 알폰소 조프레 테노리오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아불 하산 알리는 공성병기와 조정 전체, 부인들까지 대동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한 뒤 타리파를 포위했다. 하지만 1340년 리오 살라도 전투에서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바다 건너 세우타로 도주했다.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의 활약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된 페드로 4세는 여동생 콘스탄사 의 남편인 마요르카 국왕 하이메 3세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하이메 3세는 봉건 군주인 페드로 3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2번이나 연기했다가 1339년 많은 양보를 받은 뒤에야 경의를 표했고, 이후로도 아라곤 국왕의 지시에 불순종하곤 했다. 그러던 1341년, 하이메 3세는 몽펠리에 백작령의 소유권을 놓고 프랑스 왕국과 갈등을 벌이다가 페드로 4세에게 "프랑스 왕국이 아라곤을 공격할 지도 모르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페드로 4세는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논의하고 싶으니 바르셀로나로 출두하라고 명령했지만, 하이메 3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하이메 3세나 대리인이 올 기미가 없자, 페드로 4세는 자신이 하이메에 대한 군주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하이메 3세가 주조한 마요르카 금화가 후쓸리용(Roussillon), 세르다냐(Cerdagne)에 유통되는 것은 아라곤 국왕의 주화 독점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도시에서 마요르카 금화가 유통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아라곤 국왕이 허용한 관행이었기에 이는 억지였지만, 페드로 4세는 이참에 마요르카 왕국이 독자적으로 주화를 생산하고 프랑스 왕국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부터 무역 특혜를 받는 등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상황을 근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6세가 개입해 마린 왕조와의 전쟁이 한창인데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 싸우지 말라며, 바르셀로나에서 교황 특사가 주관한 바르셀로나 회의에 하이메 3세가 출두하라고 권고했다. 하이메 3세가 이를 따라 바르셀로나로 향하자, 페드로 4세는 일부러 "하이메 왕이 페드로 왕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하이메 3세는 페드로가 이 소문을 빌미삼아 마요르카를 침공하려 들 것을 우려해 섬으로 돌아가 방어에 전념했다. 1343년 2월, 페드로 4세는 교황 특사가 주관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은 하이메 3세를 불충한 가신으로 단죄하며 그의 왕국과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선포했다.

1343년 5월, 알헤시라스를 봉쇄하던 아라곤 함대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마요르카에 상륙한 뒤 뒤이은 산타 폰사 전투에서 하이메 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에 발레아레스 제도 전역이 아라곤 왕국에 복종했고, 페드로 4세는 섬의 특권을 확인했다. 하이메 3세가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고 교황 클레멘스 6세도 중재를 시도했지만, 페드로 4세는 후쏠리용과 세르다냐를 마저 공략하기로 하고 듣지 않았다. 1344년 두 도시가 함락되자, 하이메 3세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마요르카는 아라곤 왕국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 무렵 아불 하산 알리가 재차 군대를 일으켜 알 안달루스로 파견하자, 페드로 4세는 마요르카를 정복한 함대를 지브롤터로 파견했다. 1344년 12월 12일,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은 팔모네스 전투에서 마린군을 격파했고 알헤시라스에 대한 포위망을 굳혔다. 결국 심각한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린 알헤시라스 시가 1345년 3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에게 항복하면서, 21개월간 이어진 알헤시라스 공방전은 종결되었다.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1349년 지브롤터에 대한 공략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격퇴되었다.

이 무렵 페드로 4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형제인 우르헬 백작 하이메 1세가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페드로 4세는 동생 대신 장녀 콘스탄사를 여왕으로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페드로 4세가 하이메 1세의 직위를 해임하자, 형이 자신을 숙청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하이메 1세는 사라고사로 도주한 뒤 추종자들을 결집하여 반 아라곤 연합을 결성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할 기미가 보였고 여러 가신과 성직자들이 자제할 것을 호소하자, 페드로 4세는 동생의 직위를 복원하고 콘스탄사를 차기 후계자로 세우려던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에 하이메 1세는 안전해졌다고 여기고 형과 화해했지만, 1347년 바르셀로나 궁정에서 형을 접견한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페드로 4세가 동생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47년 11월, 하이메 1세가 페드로 4세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접한 발렌시아 연합이 페드로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왕을 여전히 지지하던 샤티바 성을 포위하면서, 레오노르 전 왕비의 아들인 페르난도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페드로 4세는 토벌대를 파견했지만 푸에블라 라르가 전투와 베테라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자 자신이 직접 발렌시아 연합과 협상하기로 하고 바르셀로나에서 발렌시아로 향했다. 1348년 4월 6일 페드로 4세가 왕비와 함께 발렌시아 시에 이른 뒤 연회가 개최되었을 때, 왕의 하인 한 명이 발렌시아 연합을 반역자들의 모임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격분한 사람들은 왕궁에 달려들어 왕의 고문과 하인들을 무차별 구타했다.

페드로 4세는 페르난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할 테니 물러나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하고 모르베드레에 억류되었다. 그러다가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발렌시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탈출했고, 테루엘로 가서 군대를 조직한 뒤 발렌시아 연합에 반격했다. 1348년 에필라 전투와 미슬라타 전투에서 아라곤과 발렌시아 연합을 대파하고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처음에는 발렌시아 전체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리라고 명령했지만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 뜻을 접었다. 그 대신 관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발렌시아 연합이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울렸던 종을 녹인 뒤, 종에서 나오는 녹은 금속을 연합 지도자들의 목구멍에 붓는 방식으로 죽였다고 한다. 이때의 흑사병으로 레오노르 왕비가 사망하자, 그는 시칠리아 국왕 페트루 2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재혼하여 두 아들 후안, 마르틴, 딸 레오노르를 낳았다.

1349년, 마요르카 전 왕 하이메 3세는 마요르카 왕국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칼라데스, 오멜라데스, 몽펠리에 등 옥시타니에 남은 영지들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모조리 양도하고 그 대가로 받아낸 돈을 활용해 용병대를 모집해 마요르카로 출진했다. 그해 10월 25일. 하이메 3세가 이끄는 용병대와 아라곤군이 뤼크마요르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하이메 3세는 전사했고, 그의 아들 하이메 4세는 바르셀로나의 지하 감옥에 억류되었다가 1362년에 석방되었다.

1351년, 제노아가 사르데냐의 반 아라곤 봉기를 선동하자, 페드로 4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제노아와 전쟁을 벌였다. 1354년 아라곤 함대가 사르데냐 내 제노바인 거주지인 아겔로를 공략하고 제노바인들을 모조리 추방했다. 이후 카탈루냐인들이 이 도시로 대거 이주했고, 현재까지도 아겔로 시에서는 카탈루냐 어가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성과는 없었고, 페드로 4세는 사망할 때까지 샤르데냐 섬의 만성적인 반란에 시달렸다.

이 무렵, 카스티야 왕국은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엔리케 2세와 보르고냐 가문의 페드로간의 왕위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페드로 4세는 발렌시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페드로 왕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에 엔리케 2세를 지지했다. 페드로는 이에 대항해 제노아와 손을 잡고 아라곤 왕국을 괴롭했다. 이리하여 양자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다가 1356년부터 일명 '두 페드로의 전쟁'이 발발했다. 카스티야의 페드로는 포르투갈,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아라곤의 페드로 4세는 프랑스 왕국과 손을 잡고 맞섰다.

아라곤 왕국은 이 전쟁에서 많은 패배를 당하고 타라고나, 아리제, 엘체, 모로스, 세티나 등지가 짓밟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페드로 역시 아라곤 왕국의 반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데다 엔리케 2세 지지자들의 준동으로 인해 아라곤과의 전쟁에 전념하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고 가뭄과 메뚜기떼의 습격 등 여러 자연재해가 벌어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교황 사절 장 드 라 그랑주는 두 왕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끝에 1363년 7월 2일 모르베데 평화 협약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양국은 이후에도 전쟁을 이어가며 크고 작은 전투를 연이어 치렀다.

1366년 페드로에게 축출되었던 엔리케 2세가 흑태자 에드워드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 국왕에 복위했다. 페드로는 포르투갈로 망명한 뒤 갈리시아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계속 대항했다. 그라나다 왕국은 카스티야의 페드로를 지원하고자 발렌시아 남부를 침공해 상당한 파괴를 자행했다. 1369년 페드로 왕이 마침내 엔리케 2세에게 제압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엔리케 2세는 지난날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아라곤 왕국에 넘겨주기로 했던 무르시아를 양도하기를 거부했고, 페드로 4세는 이에 분개해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다 1375년 알마잔 평화협약이 맺어지면서 전쟁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카스티야는 몰리나 영주권 등 아라곤 왕국의 통치하에 있던 카스티야 왕국의 영지를 돌려받았고, 페드로 4세의 딸인 레오노르와 엔리케 2세의 후계자인 후안 1세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1378년 가을, 페드로 4세의 맏아들이자 지로나 공작인 후안 왕자의 아내가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들은 마리아를 후안과 결혼시키자고 주장했다. 아라곤 왕국이 언제 시칠리아에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다른 시칠리아 귀족들도 동의했고, 시칠리아 사절단은 1380년 봄에 아라곤 왕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안은 같은 바르셀로나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여기고 바르 공작의 딸과 약혼했다. 페드로 4세는 그 대신에 이제 갓 4살된 손자 마르틴과 마리아를 짝지어주기로 했다. 이 약혼은 1380년 7월 24일 시칠리다 사절단 대표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와 엔리코 로소가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여왕을 대신하여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아라곤 왕 페드로 4세는 마리아와 마르틴 모두 어리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이자 마리아의 남편 마르틴의 아버지인 마르틴의 섭정을 받게 했다.

1387년 1월 6일, 페드로 4세는 67세의 나이로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사후 장남 추안 1세가 아라곤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