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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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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2대 국왕
후안 1세
Juan I
파일:카스티야후안1세.jpg
<colbgcolor=#AA0044> 19세기 상상화
출생 1358년 8월 24일
아라곤 연합 왕국 에필라
사망 1390년 10월 9일 (향년 32세)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알칼라 데 에나레스
재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
1379년 5월 29일 ~ 1390년 10월 9일
배우자 아라곤의 레오노르 (1375년 결혼 / 1382년 사망)
베아트리스 (1383년 결혼)
자녀 엔리케 3세, 페란도 1세
아버지 엔리케 2세
어머니 후아나 마누엘 데 비예나
형제 레오노르, 후아나 등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3.1. 자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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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2대 국왕. 아내 베아트리스를 앞세워 포르투갈 왕국을 장악하려 했지만 주앙 1세에게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2. 생애

1358년 8월 24일 아라곤 왕국 에필라에서 당시 페드로 왕을 피해 망명 중이던 카스티야 왕자 엔리케와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의 딸 후아나 마누엘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레오노르와 후아나가 있었는데, 후아나는 일찍 죽었고 레오노르는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3세와 결혼했다. 1369년 아버지가 페드로 왕과의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카스티야 국왕이 된 뒤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375년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의 딸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1379년 5월 29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카스티야 국왕에 선임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즉위 직후 비둘기 기사단(Orden de la Paloma)을 설립하고 기사단에 가입한 이들에게 금으로 만든 목걸이를 줬는데, 그 목걸이에는 하얀 에나멜을 입힌 비둘기 모형과 비둘기 깃털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세고비아에서 비둘기 고기를 주 메뉴로 삼은 대규모 연회를 벌이며 왕에게 충성 서약을 맹세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난잡한 생활을 하는 것에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창설된 지 1년만에 해산되었다고 한다. 후안 1세는 갓 태어난 엔리케 왕자를 비둘기 기사단장에 선임했다고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후안 1세는 아버지 엔리케 2세의 유대인 박해 정책을 중단하고 유대인들을 관대하게 대했다. 한 번은 유대인 보석상 아브라함 다비드 타로(אברהם דוד בן שלמה אברהם טארוש)가 보나도나(Bonadona)라는 이름의 아내가 출산 능력이 없어 자손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을 무효화하고 기독교인 여성과 재혼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카스티야 법에 따르면 아내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일반인이 결혼을 무효화하고 재혼하는 것은 불법이며, 유대인이 기독교 여성과 결혼하는 것 역시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후안 1세는 그가 그동안 왕실에 우수한 세공품을 꾸준히 바치고 많은 돈을 빌려준 것을 고려하여 보나도나를 정중하게 대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배려해주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후안 1세는 백년 전쟁에 개입해 프랑스 왕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아버지의 정책을 물려받아 카스티야 제독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에게 해군을 맡겨 프랑스를 돕게 했다. 페르난도 산체스는 프랑스 제독 장 드 비엔과 연합해 1380년 7월 원정에 착수했다. 연합 함대는 윈첼시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고 아르풀레르 항구에서 승무원과 물자를 적절하게 공급받은 뒤 도버 해협을 건너 템스 강을 따라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 런던 인근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이 2척의 갤리선을 강에 가라앉혀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막아놓고 항전하자, 인근의 선박들을 불태우거나 탈취한 뒤 귀환했다. 한편, 후안 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를 설득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있던 누이 레오노르의 남편 카를로스가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줬다.

1382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레븐 5세가 맘루크 왕조의 공세를 피해 카스티야로 망명했다. 후안 1세는 오랜 여정으로 지칠대로 지치고 행색이 남루한 그를 가엾게 여겨 거둬들이고 1383년에 마드리드, 비야레알, 안두하르의 영주로 선임했다. 레븐 5세는 나중에 프랑스로 가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화해시키고 자신이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십자군을 일으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39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382년 아내 레오노르가 사망한 뒤, 후안 1세는 재혼 상대를 물색한 끝에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의 외동딸 베아트리스와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10월 22일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인 레오노르는 사전에 맺은 조약에 근거해 딸과 사위의 이름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여기에 레오노르의 연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가 재상으로 선임되었다. 후안 1세는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몬탈반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383년 12월 6일 아비즈의 영주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동생인 주앙이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하면서 반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알바로 파리스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이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포르투갈 제독 란사로테 페사냐도 베자 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포르투갈 국왕을 자칭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격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4월 6일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장군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와 포르투갈 귀족 페드루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반란군과 처음으로 맞붙었다. 카스티야 기병대는 이 전투에서 정사각형 방진을 세운 적군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1384년 5월, 후안 1세는 군대를 정비한 뒤 리스본으로 진격해 육지와 해상 모두 봉쇄했다.(리스본 공방전) 그러나 리스본 공략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고,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카스티야에 충성하는 도시들을 습격하고 침략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한편, 주앙 왕자는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17세의 리처드 2세를 대신해 국정을 주관하던 랭커스터 1대 공작 곤트의 존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지원한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1384년 7월 18일, 루이스 페헤이라 제독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테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과 격돌했다. 루이스 페헤이라는 이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포르투갈 함대는 적의 해상 봉쇄를 뚫고 리스본에 도착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귀중한 보급품을 전달했다. 후안 1세는 이후에도 리스본을 계속 포위했지만,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보급로를 교란하면서 보급품이 부족해지고 진영에 페스트가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9월 3일에 봉쇄를 풀고 카스티야로 철수했다. 그렇지만 리스본 외 다수의 포르투갈 지역은 카스티야군에게 넘어갔다.

1385년 초, 잉글랜드군 600명이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이들 전원이 백년 전쟁에서 활약한 베테랑으로,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한편 주앙 왕자는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그해 4월 6일에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로 등극했다. 그는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를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고 카스티야군에 넘어간 지역을 모조리 탈환하게 했다.

후안 1세는 이에 분노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비세우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질렀지만, 1385년 5월 29일 트랑코소 전투에서 대패해 지휘관 7명 중 6명이 사망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후안 1세는 6월에 대군을 일으켜 셀로리코 다 베이라에서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이르는 포르투갈 중북부로 진격했다. 원정군 규모는 32,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엔 프랑스 중기병들도 있었다. 주앙 1세와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이에 맞서 6,5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토마르 시에 집결했다. 이후 적을 어찌 맞서 싸울 지 논의한 끝에, 리스본에서 또다시 농성한다면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우니 알주바호타 마을 인근에서 적을 물리치기로 결의했다.

1385년 8월 14일,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매우 느린 속도로 진군하던 카스티야군은 알주바호타 고지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을 발견했다. 후안 1세는 즉각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무더운 날씨에 오래도록 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과 장병들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시원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전면에 마름쇠 등 대기병 방어 구조물을 세우고 장궁병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적 기병대를 물리쳤다. 카스티야군은 축차투입을 반복해봤지만 하루종일 적의 전열을 뚫지 못하다가 제풀에 지쳐 퇴각했다. 이에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카스티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알주바호타 전투는 카스티야군의 재앙이었다.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이 천 명 이하의 손실을 입은 것에 비해, 카스티야군은 5천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카스티야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5,000명을 추가로 상실했다.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여세를 이어가 1385년 10월 카스티야 영토에 있는 메리다를 공격했고, 발베르데 전투에서 카스티야군 2만 명을 격파하고 적장 페드로 무네스 데 고도이 이 산도발을 주살했다. 이러한 연이은 참패로 인해, 후안 1세는 두 번 다시 포르투갈 왕국으로의 원정을 감행하지 못했다.

1372년부터 아내 콘스탄사가 페드로 왕의 딸인 점을 근거삼아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이라고 칭하던 곤트의 존은 카스티야 왕국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지금이야말로 카스티야 국왕이 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1386년 5월 9일 주앙 1세로부터 카스티야 국왕이 되도록 지원해주겠다는 서약을 받아낸 곤트의 존은 그해 7월 아내와 딸 캐서린과 함께 갈리시아에 상륙했다. 그는 대다수 갈리시아 귀족들과 일부 레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오렌세에 궁정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후안 1세는 이에 맞서 세고비아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카스티야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다시 받고 침략자들로부터 맞설 병력을 제공받았다.

1387년, 곤트의 존은 주앙 1세에게 자기 딸 필리파를 시집보낸 뒤 포르투갈군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향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들은 두에로 강을 따라 남하했지만, 카스티야군이 전투를 회피하고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몇몇 요새를 포위하다가 손실만 입었다. 결국 다수의 병사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지고 곤트의 존과 가까운 친구들과 신하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곤트의 존은 어쩔 수 없이 갈리시아로 퇴각했다. 1388년 7월 카스티야군이 갈리시아로 진군해오자, 곤트의 존은 포르투갈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키텐으로 도주했다.

이후 카스티야 국왕이 되는 것을 단념한 곤트의 존과 아내 콘스탄사는 후안 1세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후안 1세의 아들 엔리케와 곤트의 존과 콘스탄사의 딸 캐서린의 결혼이 성사되었고, 엔리케는 아스투리아스 공에 칭해졌다. 이때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은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후안 1세는 1389년 주앙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양측이 점령한 영토를 서로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1390년 10월 9일 부르고스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 궁전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톨레도 대주교 페드로 테노리오는 왕의 유해를 깊숙한 장소에 숨긴 뒤 당시 미성년자였던 엔리케 왕자가 엔리케 3세로서 즉위하고 섭정이 정해질 때까지 "왕은 그저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며 사망 사실을 숨겼다. 이후 후안 1세의 유해는 톨레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아라곤의 레오노르 (1358 ~ 1382)[1]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엔리케 3세
(Henry III)
1379년 10월 4일 1406년 12월 25일 랭커스터의 캐서린[2]
슬하 1남 2녀[3]
2남 페란도 1세
(Ferdinand I)
1380년 11월 27일 1416년 4월 2일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
슬하 5남 2녀[4]

4. 기타

징기스칸 4 pk 챕터4에 카스티야 왕국의 왕족으로 등장한다. 정치 54, 전투 57, 지모 62. 내정 및 전투특기로 농업, 공성을 보유하고 있다. 병과적성으로 보병, 궁병, 기병 세 병과 모두 C이며, 수군은 E다.


[1]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의 딸.[2] 랭커스터 공작 존과 카스티야의 콘스탄사(페드로의 장녀)의 외동딸.[3] 아라곤의 왕비 마리아, 빌레나 공작부인 공작부인 카타리나 인판타, 엔리케 4세[4] 알리폰소 5세, 카스티야의 왕비 마리아, 추안 2세, 빌레나 공작 엔리케, 포르투갈의 왕비 레오노르, 아라곤의 페로, 아라곤의 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