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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18:18:16

리스본 공방전(13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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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공방전
포르투갈어: Cerco de Lisboa
스페인어: Sitio de Lisboa
파일:The Siege Of Lisbon 1384.png
시기 1384년 5월 ~ 1384년 9월 3일
장소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원인 포르투갈 왕국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후안 1세의 공세.
교전국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포르투갈 왕국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카스티야 연합 왕국
지휘관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주앙 1세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루이 페헤이라†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후안 1세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페드로 페르난데스 카베자 데 바카☠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페르 아판 데 리베라
병력 알려지지 않음 대규모 병력
피해 높음. 매우 높음.
결과 포르투갈 왕국의 승리.
영향 주앙 1세의 포르투갈 국왕 등극.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clearfix]

1. 개요

1384년 5월 ~ 9월 3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후안 1세가 아내 베아트리스의 왕권을 회복해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주앙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리스본을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주앙 1세는 카스티야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물리친 뒤 포르투갈 국왕에 등극했다.

2. 배경

1382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연합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벌인 전쟁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접촉해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양국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외동딸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한 뒤, 페르난두 1세의 외동딸인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 여왕이 되었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섭정을 맡았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왕이자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후안 1세는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포르투갈 전임 국왕 페드루 1세사생아이자 아비스 기사단장인 주앙은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1383년 12월 6일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 알바로 파이스 등을 포함한 공모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했다. 리스본 시민들은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아녜스의 아들인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했다.

그 후 레오노르는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아내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군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후안 1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카스티야 전역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장차 반란군의 중심지인 리스본을 공략하려 했다. 주앙은 이에 맞서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에게 국경 수비를 맡기는 한편, 사절 2명을 런던으로 파견해 잉글랜드 실권자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384년 4월 6일, 포르투갈군 1,400명을 이끌고 진군하던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끄는 카스티야군 5,000명과 마주쳤다. 이후 벌어진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은 방어 대형을 결성한 적을 얕보고 무작정 돌진했다가 누누의 지휘를 받은 적 창병대의 결사적인 항전과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누누는 적을 온종일 추격해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후안 1세는 갈리시아 대귀족 페드로 루이즈 사르미엔토에게 갈리시아 방면 카스티야군을 소집해 리스본으로 남하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확보한 후안 1세가 1384년 5월 리스본으로 진군하면서, 리스본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1384년 5월, 리스본에 당도한 후안 1세는 리스본을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봉쇄했다. 주앙은 이에 맞서 나오 7척, 갤리선 14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포르투로 보낸 뒤 리스본을 봉쇄한 카스티야 해군을 종종 습격해 약화하는 임무를 맡겼다. 카스티야군은 리스본 인근의 토레스 베드라스, 알렌케르, 오비도스 마을을 점령해 리스본으로 전해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인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가 별동대를 이끌고 포르투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포르투에는 아리아스 고메즈가 이끄는 수비대가 견고하게 수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안 가르시아 만리케는 포르투를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384년 5월 26일, 카스티야군이 성 어거스틴 성문을 공격했지만 수비대에 격퇴되었다. 이후 후안 1세는 리스본 성벽이 매우 강고하고 탑이 77나 되는 등 방어력이 매우 강하니 무력을 공략하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봉쇄를 강화해서 적 수비대와 시민들을 굶겨죽이기로 했다. 육상에서 모든 길목을 차단했으며, 타구스 하구 해안 사이에 사슬을 놓아 리스본으로의 해상 접근을 막았다. 그렇게 카스티야군의 봉새가 강화되면서 식량 공급이 뚝 끊겼고, 며칠 후 식량이 바닥나면서 수비대와 시민들은 기아에 시달렸다. 주앙은 어떻게든 해상 보급을 확보해야 승산이 있다고 여기고, 포르투에 사절을 모내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포르투에 있던 포르투갈 선장 루이 페헤이라는 선박들을 항구에 집결한 뒤 리스본을 향해 출항했다. 당시 포르투갈 함대는 선봉대 5척, 중앙에 보급품을 실은 선박 12척, 후면에 갤리선 17척으로 구성되었다. 카스티야 해군 장성들은 이들을 상대할 방안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함대 최고 사령관 페르 아판 데 리베라는 타구스 강어귀에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요격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는 넓은 바다에서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논쟁은 후안 1세가 개입해 아판 데 리베라를 지지하면서 해결되었다.

1384년 6월 18일, 타구스 강 어귀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카스티야 해군은 적선 4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루이 페헤이라는 전사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포르투갈 수송대가 봉쇄를 돌파하고 리스본에 필요한 식량과 보급품을 전달했다. 그 후 주앙이 반격을 개시해 타구스 강 좌안에 있는 알마다 성을 공략했다. 여기에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팔멜라 성 꼭대기에 큰 불을 피워서 수비대를 격려했고, 적과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한편 보급로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포위망 외곽에 배치된 적군 기지를 꾸준히 공략했다.

1384년 8월 27일, 카스티야군은 최후의 공세를 개시했다. 육군이 성벽을 공격하는 동안, 카스티야 해군 사령관 페르난도는 갤리선 16척을 비롯한 함대를 이끌고 해상에서 리스본을 향한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리스본 수비대는 강력히 저항해 이 공격을 격퇴했다. 그 후 열악한 위생 상태와 높은 여름 기온으로 인해 페스트가 리스본 시내와 외곽에 창궐해 수비대와 주민, 카스티야군 모두에 퍼지면서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결국 후안 1세는 9월 3일 포위를 풀고 숙영지를 불태운 뒤 산타랭으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리스본 공방전은 포르투갈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결과

리스본 공방전은 양자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리스본 시민과 수비대 다수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했으며, 우수한 해군 사령관이었던 루이 페헤이라가 전사했고, 갤리선 17척 중 14척이 해상 봉쇄 돌파를 시도하던 중 파괴되었다. 한편, 카스티야 측에서는 유능한 해군 지휘관이었던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국왕의 수석 시종장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 갈리시아 고위 사령관 페드로 루이즈 사르미엔토, 마요르가 백작 페드로 데 라라, 산티아고 기사단장 3명 등 수많은 고위 장성들이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스페인 역사가 루이스 수아레스 페르난데스(Luis Suárez Fernández, 1924 ~ )는 카스티야군이 리스본 공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절반 가량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카스티야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했지만, 포르투갈 북부의 도시 및 성채에 카스티야군을 배치했다. 하지만 주앙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반격을 준비했다. 우선 곤트의 존이 주앙의 구원 요청에 응해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잉글랜드 병사 600명을 포르투갈에 파견했다. 이들은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1385년 4월 6일, 주앙은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귀족, 성직자, 시민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로 등극했다. 이후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를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고 카스티야군에 넘어간 지역을 모조리 탈환하게 했다. 후안 1세는 주앙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대군을 다시 일으켜 포르투갈로 진격했다. 주앙 1세와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에 대응해 야전에서 승부를 보기로 하면서, 포르투갈 왕위의 향방을 가를 알주바호타 전투가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