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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5년 10월 21일,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북부의 오베르슈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2. 상세
1345년, 1343년 1월 19일에 체결된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만료되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3개의 전선에서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은 분견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가스코뉴에서 활동하며, 에드워드 3세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은 플란데런 백국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1345년 3월,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2,000명의 병력을 모집한 뒤 가스코뉴로 가서 추가 병력을 모집하기로 했다. 그의 부대는 5월 말 사우샘프턴에서 151척의 함대에 몸을 싣고 출항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몇 주 동안 플리머스 항에 대피했고, 5월 23일에 날이 개자 다시 출발해 7월 9일 보르도에 도착했다. 이후 중장병 500명, 기병 500명, 잉글랜드 및 웨일스 출신 장궁병 1,000명과 함께 랑곤으로 진군하여 스태퍼드 백작 랄프가 이끄는 가스코뉴군과 합류했다. 그는 지금까지 소규모 요새에 대한 포위 공격에 치중했던 스태퍼드와는 달리 적군이 집결을 완료하기 전에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1345년 8월 중순, 헨리는 남부 프랑스군이 집결하고 있던 베르주라크를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보르도와 가론강으로 연결된 베르주라크 시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에서 장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했다.(베르주라크 전투) 이후 2주 동안 주변 지역을 평정하고 병력을 휴식시킨 그는 베르주라크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이 도주한 페리괴로 진군했다. 페리괴의 방어 시설은 낙후되었지만 그곳에 모인 프랑스군 병력이 잉글랜드군과 맞먹었기에 공성전은 불가능했다. 이에 페리괴를 봉쇄하고 도시로 향하는 주요 경로를 지키는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했다.
한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가스코뉴 전선이 위급해졌다는 급보를 전해듣고 노르망디 공작이자 후계자인 장에게 병력을 규합하여 가스코뉴로 향햐게 했다. 여기에 루이 1세 드 푸아티에가 이끄는 남부 프랑스군이 페리괴로 진군하자, 헨리는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리보르네로 철수했다. 페리괴를 구조하는 데 성공한 뒤,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수비대가 주둔한 페리괴 인근의 요새들을 탈환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15세기 판화, 오베르슈를 포위한 프랑스군.
1345년 10월 초,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페리괴 남동쪽 요새인 오베르슈를 포위했다. 당시 오베르슈를 지키고 있던 브라반트 출신의 군인인 프랭크 반 할렌은 헨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오베르슈에서 헨리에게 가려던 전령이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투석기를 통해 오베르슈 성으로 발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전령은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헨리에게 도착했는데, 이때 헨리는 이미 400명의 중장병과 8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오베르슈로 향하고 있었다.
헨리는 펨브로크 백작 로렌스 헤이스팅스가 이끄는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올 기미가 없었다. 헨리는 몰랐지만, 당시 노르망디 공작 장 휘하의 9,000 ~ 10,000명으로 구성된 또다른 프랑스군을 이끌고 헨리의 잉글랜드군이 있는 곳과 40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10월 20일, 헨리는 더 이상 기다리면 프랑스군이 추가로 합류할 거라 여기고 오베르슈로 야간 행군했다. 그의 부대는 도르도뉴 강의 남쪽 지류인 오베르제르 강을 두 번 건넌 뒤 오베르슈에서 1.6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자리잡았다.
헨리는 언덕에 올라가 적진을 살펴봤다. 당시 프랑스군 일부는 오베르슈 북쪽에 작은 진지를 마련했고, 주력군은 성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숲이 우거진 지역을 소리없이 이동한 잉글랜드군은 10월 20일 수목한계선에 도착하자 그곳에 숙영지를 세운 뒤 병사들이 숙영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 적이 근처에 아군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펨브로크 백작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면서 빨리 합류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10월 21일 펨브로크 백작의 군대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헨리는 그날 아침이 끝날 무렵 전쟁 회의를 소집해 어찌할 지를 논의한 끝에, 비록 프랑스군이 7,000명이고 아군은 1200명이니 수적으로 매우 열세하지만 기습의 효과를 잃느니 지금 공격하기로 결의했다.그는 몸소 잉글랜드 정찰병들과 함께 숲에서 빠져나와서 프랑스군 본진에서 수백 야드 이내까지 접근했다. 프랑스군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자, 헨리는 궁수들에게 프랑스 진영의 서쪽 언덕에서 적진을 향해 사격하라고 명령했고, 기마병들에게 남쪽에서 진영으로 돌격하라고 지시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하자, 곤잠에 빠져 있던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무기나 갑옷을 챙기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적 궁수가 쏜 화살에 맞거나 돌격해오는 기마병들에게 사살되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내지르는 함성과 프랑스군 병사들의 비명은 오베르슈 성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이에 성내에 있던 중장병들이 출격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고, 궁수들은 성벽 위에서 적진을 향해 화살을 쐈다. 전면과 후면에서 협공을 받은 프랑스군은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허물어졌고, 북쪽 진영에 있던 프랑스인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급히 후퇴했다. 펨브로크 백작의 군대는 전투가 끝난지 며칠 후에 뒤늦게 도착했다. 헨리는 펨브로크 백작을 아래의 말로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펨브로크 사촌이여, 환영하오. 당신이 할 일은 시신에 성수를 뿌리는 것이오."
오베르슈 전투는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드 푸아티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부상이 악화되면서 얼마 안가 사망했다. 여기에 릴 백작, 7명의 자작, 3명의 남작,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조카 클레르몽, 배너렛 기사 12명, 툴루즈의 세네샬과 클레르몽의 세네샬, 그리고 수백 명의 기사들이 생포되었으며 그 외의 이름없는 병사들이 사살되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했을 것이다. 필리프 6세는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왕실 재무부에서 막대한 금액을 차출해야 했고, 헨리는 최소 5만 파운드에 달하는 몸값을 받아냈다.
오베르슈 인근에 있던 노르망디 공작은 아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그의 군대는 적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월했지만, 적군을 이길 거라는 희망을 접고 앙굴렘으로 철수한 뒤 1345년 11월에 군대를 해산했다. 그 바람에 헨리를 저지할 남부 프랑스군은 6개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헨리는 이 때를 틈타 몽셰귀르, 라 레올, 에귀옹 등 남부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공략해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및 남부 프랑스에 대한 지배력을 성공적으로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