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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9:15:10

와트 타일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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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와트 타일러의 난.jpg

1. 개요2. 배경3. 의의4. 같이보기

1. 개요

와트 타일러의 난(Wat Tyler's Rebellion)은 1381년잉글랜드 왕국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단순히 "민란"이라는 뜻의 Peasant's Revolt이라고도 한다.

2. 배경

민란의 배경은 13세기 유럽의 경제성장과 14세기 초반의 정체, 그리고 흑사병으로 전 유럽의 인구가 격감하면서 발생한 사회적 혼란에 백년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착취까지 겹치자 잉글랜드의 민중들이 봉기한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1381년 5월 30일에 왕실 관리인이었던 존 뱀프턴이 에식스 일대에서 인두세 체납을 채근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인두세를 두고 일어난 다툼은 삽시간에 민중 봉기로 이어졌고 잉글랜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성직자 존 볼은 민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봉건제의 해체 및 신분제 폐지 등을 설파하면서 여러차례 수감되었다 풀려났다. 그는 이 민란의 상징과도 같은 연설을 하였고, 이 연설에서 외쳐진 구호는 농민군의 봉기와 함께 삽시간에 잉글랜드 전역으로 펴져나갔다.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대체 귀족은 누구였나?[1][2]
(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존 볼
다른 나라도 흔히 그렇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귀족이 평민에 대해 큰 특권을 가지는 풍속이 있다. 예를 들자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법률에 따라 신사들의 농지를 갈고, 곡식을 거두고, 광으로 가져가고, 도리깨질과 키질을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건초를 거두어 광으로 가져가는 의무도 있다. 성직자와 신사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이 모든 봉사를 요구한다. 특히 켄트, 에식스, 서식스, 베드포드 등의 주에서 왕국 내의 다른 지방에 비해 이런 봉사에 대한 요구가 더 가혹하다.
그런 이유로 하여 이들 지방에 있는 악한 인간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이 세상이 시작될 때는 노예라는 것이 없었으며, 따라서 루시퍼가 하느님에게 행한 것처럼 자기 영주에게 반역죄를 지은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도 노예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평민이란 천사도 정령도 아니고, 자기네를 짐승처럼 부려먹는 영주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빚어진 인간이므로 그런 반역을 저지른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를 더 이상 참지 않겠으며, 앞으로 어떤 노동이든 할 경우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여러 민란 지도자 중 켄트 지역의 민중 지도자가 바로 와트 타일러였다. 잉글랜드 여타 지역에서도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여러 지도자가 있었지만 와트 타일러가 1381년에 일어난 대규모 민란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그가 런던으로 진격했고, 잠시나마 수도 런던을 사실상 점령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와트 타일러를 비롯한 민란 지도자들이 이끄는 농민군들은 쾌속의 진격을 감행해 런던에 입성했고, 리처드 2세를 비롯한 정부 관리들은 런던탑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많은 수의 농민군들이 런던에 입성하여 중과부적임을 깨달은 리처드 2세는 어떻게든 런던 시장인 윌리엄 월워스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고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마일엔드로 협상[3]하기 위해 나아간다. 이곳에서 리처드는 에식스의 농민 봉기군들에게 농노제의 폐지를 약속했고 헌장을 만든다. 이 소식은 급속히 퍼져나가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농민군들은 해산하게 된다.

하지만 강경파 농민군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심지어 리처드가 협상을 위해 런던탑을 비운 사이에 런던탑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때 분노에 찬 농민군들은 여러 귀족들을 잡아 죽였고, 런던 시내 곳곳에서도 이러한 참상이 이어졌다. 런던탑이 농민군들에게 점령되자 리처드는 런던탑 대신 런던 서남부 블랙 프라이어스로 향하게 된다. 다음날 리처드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스미스필드에서 강경파 농민군의 지도자 와트 타일러와 추가적인 협상을 벌이기 위해 나아갔다. 스미스필드에서 와트 타일러를 만난 리처드는 농노제 폐지를 약속했음에도 왜 해산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와트 타일러는 무례한 태도[4]로 왕을 비난하고, 추가적인 요구 사항을 말했다. 어찌 되었든 추가적인 약속이 맺어져 헌장이 작성되었으며, 농민군은 여기에 더해 먹을 것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농민군들의 요청대로 리처드 측에서 음식물을 제공했고, 음식물을 받아든 농민군들은 스미스필드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이 순간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와트 타일러가 떠나려던 와중에 리처드의 수행원과 시비가 붙었는데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가 다툼을 말리기 위해 수행원과 와트 타일러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러자 흥분한 와트 타일러가 왕을 향해 다가가려 했고 군인들이 다급히 왕을 보호하기 위해 타일러를 막아섰다. 이 순간 리처드[5]가 군인들에게 타일러를 체포하라 명령했다. 다급해진 와트 타일러가 월워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월워스가 선수를 쳐서 먼저 와트 타일러를 펄션으로 찍어서 낙마시켰고, 연이어 옆에 있던 향사 랄프 스탠디쉬가 검으로 타일러를 찔러 죽였다. 당장 뒤에는 수천의 농민군이 있었기에 리처드와 수행원들은 끔살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는데 이때 14세에 불과했던 리처드 2세는 유유히 말을 몰고 농민군들 앞으로 나아가 위엄있게 말했다.
너희들은, 그대들의 왕을 죽이려 하는가? 짐이 바로 그대들의 왕이다. 나를 따르라!
리처드 2세

아직은 왕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던 농민군들에게 소년왕의 일갈은 먹혀들었고, 농민군들은 순순히 물러나 흩어지게 된다. 이렇게 런던에서의 봉기는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잉글랜드 곳곳으로 민란이 번져나갔다. 햄프셔, 요크셔, 스카버러 등에서 연이어 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스트 잉글리아 지방에서의 민란 양상은 매우 잔인하게 진행되어 많은 살상과 보복이 행횡했다. 민란이 잔혹성을 띄게 됨에 따라 진압도 매우 무자비하게 진행되었고, 많은 수의 민란 주동자들이 처형당했다. 최종적으로 6월 25일경 노위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가 이스트 잉글리아에서 제프리 리스티의 반란군을 격파함에 따라 농민봉기는 막을 내린다.

3. 의의

농노제 폐지를 요구하며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유명하지만 반란군 중에는 자유민 소작농들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소작농들의 반란(Peasants' Revolt)이라는 명칭과 달리 가난한 도시 노동자나 상공업자들의 비중도 컸다. 반란군 중에는 심지어 젠트리들도 포함돼 있었다. 상당수의 젠트리는 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억지로 참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샘슨 집안처럼 적극적으로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1381년의 민란은 그저 단순한 농민들의 비이성적인 일탈이 아니었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봉건적 질서의 해체가 반란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해석은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4세기 후반에 농노들에게 부과된 부역이 증가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1348년의 대역병 이후 소작농들뿐만 아니라 최하층 임금노동자들의 경제 상황도 호전되는 경향이 보였다.

이 민란의 특징은 반란군들의 투쟁이 항상 개인적인 불만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증언에 의하면 농노제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켄트주의 자유소작농들도 다른 지역 출신의 농노 한 명이 투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했으며, 반란의 하락기였던 9월에도 곤트의 존이 자신의 농노들을 해방시켰다는 루머가 퍼지자 다시 활기를 얻었다고 한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요구를 종합하고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와트 타일러가 스미스필드에서 리처드 2세에게 전달한 유명한 요구 사항들은 대단히 명료했고, 이것이 당시 반란군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급진적인 주장들을 종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일차적인 요구는 임금노동자들이 고용주와의 서면 계약을 통해 자유롭게 고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개인 어장과 수렵 금지 구역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대가 에이커당 몇 펜스로 삭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평등주의에 기반한, 유토피아적이지만 더 야심찬 요구는 국왕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영주권의 폐지, 주교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성직 계급의 폐지, 두 곳을 제외한 모든 수도원 철폐, 교회 재산의 몰수 및 재분배, 교구 사제들에게 합리적인 생계비를 보장할 것, 그리고 모든 법률가를 해임하고 모든 법률제도를 폐지하여 소위 '윈체스터 법'이라 불리는 지역 공동체들에서 시행되는 법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농민 봉기는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었으나 잉글랜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 일례로 작성된 헌장의 이행 할 것을 요구하는 농민 대표에게 리처드 2세가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너희는 농노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농노일 것이다.
리처드 2세

하지만 농노제는 이미 13세기 초부터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고 이후에도 사회적 변화는 조용하고 꾸준하게 이루어졌으며 결국 튜더 왕조 성립 이후 농노제는 공식적으로 철폐된다.

4. 같이보기


[1] 영어 gentleman은 흔히 신사라 번역되는데, 원래는 프랑스어 gentilhomme에서 가져온 말이고, 둘 다 "태생이 고귀한 사람"을 뜻한다. 11세기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 노르만 왕조가 열렸는데 이 때 지배층 언어인 프랑스어가 영어에 많이 유입되었다. 프랑스어 gentilhomme은 세습 혈통 귀족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가져온 영단어 gentleman도 14세기에는 귀족층을 의미했다. 다만, 영국식 귀족제와 대륙식 귀족제 간 차이로 말미암아, 세월이 지나면서 프랑스어와는 그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16세기 쯤부터 의미가 변화했으며 18세기부터는 명백히 신사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자세한 것은 젠트리 문서 참고.[2] 이 문장만 보면 왕후장상 영유종호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체 맥락을 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농민인 내가 대신 왕후장상이 돼서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농민들이 귀족들과 평등한 위치에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3] 협상 대상은 민란의 발원지였던 에식스에서 온 농민군들이 주를 이루었다.[4] 와트 타일러는 리처드를 만나자 마자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지 않고, 형제라 부르며 다가섰다.[5] 기록에 따라서는 월워스가 명령했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