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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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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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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2년, 브르타뉴의 도시 반(Vannes)을 놓고 벌어진 4차례의 공방전.

2. 상세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했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그의 여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가 브르타뉴 여공작에 선임되었다. 장 3세는 오래전부터 잔을 후계자로 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친프랑스파 귀족 및 성직자들의 후원을 받게 했다. 그러나 장 3세의 배다른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반발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여자는 공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 공작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게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1341년 6월 1일 장 드 몽포르가 반 시에 이르자, 주민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1341년 10월 샤를 드 블루아가 6,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군해 샹토소 전투에서 장 드 몽포르를 격파하고 생포하면서, 반 시의 운명은 위급해졌다.

1342년 초, 샤를 드 블루아는 반으로 진군해 교회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에 반 시의회는 그에게 귀순하기로 결의했고, 장 드 몽포르를 지지했던 시장 말레트르와의 고프리는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이 농성하고 있는 엔봉으로 달아났다. 그 후 샤를 드 블루아는 1342년 5~6월 엔봉 공방전을 치렀지만 플란데런의 잔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공략에 애를 먹다가 잉글랜드군이 잔을 도우러 오자 철수했다.

1342년 8월,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또다른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브레스트 항구에 상륙한 뒤 브르타뉴 서부 일대를 신속하게 공략했다. 그 해 10월, 아르투아 백작을 자칭하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으로서 활동하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10,0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반으로 진군했다. 플란데런의 잔과 월터 매니도 엔봉에서 100명의 기병과 100명의 궁수와 함께 로베르에 합류했다. 이들은 반 성을 향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지만, 반 성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브르타뉴 마르쉐 영주이자 기사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결사적으로 항전해서 실패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계략을 통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로베르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반 성문 앞에 불을 피워서 수비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동안 월터 매니가 이끄는 소규모 장병들이 수비대가 비워두고 있던 성벽을 기어올라간 뒤 성이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이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매니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 여전히 싸우려 하는 적병들을 압도했다. 플란데런의 잔은 다음날 반에 도착한 뒤 닷새 동안 머물다가 로베르에게 반 성의 권리를 넘기고 월터 매니와 함께 엔봉으로 돌아갔다.

한편, 올리비에 4세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해 12,600명의 병력을 모아서 반으로 향했다. 그 해 11월 올리비에 4세가 들이닥쳤을 때, 이전 공성전 때 파괴되었던 성벽은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잉글랜드군은 렌으로 가버렸기에 조기에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로베르는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뒤 런던으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반은 철저하게 약탈당한 뒤 올리비에에게 재귀속되었다.

이 무렵 잉글랜드 본군을 이끌고 브레스트에 상륙한 에드워드 3세는 반이 재차 함락되었으며 로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르투아 백작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반으로 진격했다. 1342년 12월 5일 반을 포위한 에드워드 3세는 주변 마을을 모조리 약탈했고 성을 수시로 공격했다. 올리비에 4세는 이에 맞서 종종 출격해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생포되었다. 하지만 수비대는 지휘관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스태퍼드 백작 랄프를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수만 병력을 규합하여 브르타뉴로 진군해 플로에르멜 마을 인근에 주둔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수비하기 좋은 지형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터라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고, 갈수록 쌓여가는 재정 적자에 큰 부담을 느꼈다. 에드워드 3세 역시 안토니오 도리아가 이끄는 프랑스-카스티야 함대가 무기와 보급품을 수송하는 모든 잉글랜드 선박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중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사절이 개입해 휴전을 맺으라고 촉구하자, 양자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1343년 1월 19일, 양국은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3년간 휴전을 준수하기로 했고, 반은 클레멘스 6세의 추기경이 임시로 관리하기로 했다. 또한 루브르 감옥에 갇혀 있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는 전임 공작 장 3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딸 잔이 물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 주민과 지역 성직자들은 장 드 몽포르에게 충성했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몇 달 후인 1343년 9월 추기경을 몰아낸 뒤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파일:Exécution_d'Olivier_IV_de_Clisson_(1343).jpg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처형.

반 수비를 맡다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던 올리비에 4세는 잉글랜드로 끌려갔다가 얼마 안가서 반 수비대가 사로잡았던 스태퍼드 백작 랄프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우 낮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로 인해 그가 반 수비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이 프랑스 왕실에서 피어올랐고, 샤를 드 블루아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당장 잡아들이라고 요청했다. 필리프 6세 역시 올리비에 4세를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후, 올리비에 4세와 15명의 브르타뉴 영주들은 프랑스 땅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파리로 이송되었다. 올리비에 4세의 아내 잔 드 벨빌은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올리비에 4세는 1343년 8월 2일 레 알르(Les Halles)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수급을 낭트의 소베투 성문에 내걸고 나머지 시신을 파리 성문에 내거는 조치가 내려졌기에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이후 올리비에 4세의 미망인 잔 드 벨빌은 왕의 하사관에게 뇌물을 주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추방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이에 분노한 그녀는 두 아들 올리비에와 기욤을 거느리고 2척의 배에 탑승한 뒤 프랑스 선박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벌이고 전 재산을 털어 군대를 양성하면서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몇 달 후 프랑스 국왕의 일부 군함이 이들의 배를 나포해버렸고, 잔 드 벨빌은 두 아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탈출했지만 5일간 표류하면서 아들 기욤을 잃었다. 이후 잔과 남은 아들 올리비에는 몽포르 가문 지지자들에게 구조된 뒤 모를레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올리비에는 훗날 잉글랜드-브르타뉴 군대의 수장을 맡아 백년전쟁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