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돈 힐 전투 영어: Battle of Halidon Hill | ||
시기 | 1333년 7월 19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베릭 성 북쪽의 할리돈 언덕 | |
원인 | 에드워드 발리올을 복위시켜 스코틀랜드 왕국을 잉글랜드에 복종시키려는 에드워드 3세와 이를 막으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대결 | |
교전국 | 스코틀랜드 왕국 | 잉글랜드 왕국 |
지휘관 | 리데스데일 기사 아치볼드 더글러스†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로지스의 제임스 스튜어트 로스 백작 휴 드 로스† |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발리올 에드워드 드 보훈 |
병력 | 15,000명 | 6,000명 |
피해 | 수천 명 | 수백 명 |
결과 | 잉글랜드군의 승리 | |
영향 | 에드워드 발리올의 스코틀랜드 국왕 복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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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33년 7월 19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데이비드 2세를 추종하는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베릭 성 인근 할리돈 언덕에서 맞붙은 전투. 에드워드 3세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에 복위시켰다.
2. 배경
1332년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잉글랜드 장성들의 맹활약 덕분에 대승을 거둔 에드워드 발리올은 그해 9월 24일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한 장소인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1332년 12월 16일 아난에서 겨울을 보내던 중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 호국경을 맡은 리데스데일 기사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기습 공격을 받고 아난 전투에서 완패한 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칼라일로 도주했다.1333년 2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주권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그가 가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며, 스코틀랜드 남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3월 에드워드 발리올이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칼라일에서 출진해 스코틀랜드로 진입했고, 그해 4월엔 에드워드 3세가 뉴캐슬에서 본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6,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국경의 요충지인 베릭 성 앞에 집결한 뒤 그곳을 포위했다. 에드워드 3세는 투석기 수십 대를 제작한 뒤 거대한 바위를 여러 차례 퍼부어 베릭 마을 대부분을 파괴하고 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지하 파이프 4개를 끊고 베릭 인근의 모든 촌락을 파괴하고 농작물을 약탈해 수비대가 굶주리게 만들었다. 또한 잉글랜드 해군은 트위드머스라는 작은 항구를 통해 군수 물자를 원정군에 공급했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대거 동원했다. 당시의 연대기에는 그 수가 14,629명, 30,000명, 40,000명, 80,000명, 90,000명, 100,000명 이상이거나 잉글랜드인보다 5대 1로 많았다고 다양하게 추정했다. 학계에서는 약 15,000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코틀랜드군은 컴벌랜드에 소규모 습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더글러스는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잉글랜드군에 바로 도전하기 보다는 좀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베릭 성은 육지와 바다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수비대는 지쳐갔다.
베릭 성 수비대장 알락산더르 세튼은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1333년 7월 11일까지 스코틀랜드군이 구호하지 않으면 도시를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합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인질을 잉글랜드 측에 넘겨줬는데, 인질 중에는 알락산더르 서튼의 아들인 토머스도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베릭 성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이때 윌리엄 키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분견대가 트위드 강의 북쪽 제방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다리의 불에 탄 폐허를 가까스로 건넌 뒤 베릭 마을에 들어섰다. 그리고 또다른 분견대는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있는 벰버그 성을 공격했지만, 공성 장비가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33년 7월 11일,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 수비대에게 약속했던 대로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수비대는 윌리엄 키스가 분견대를 이끌고 베릭 마을에 들어서면서 자기들이 구호받았으므로, 그 계약은 더이상 수비대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알락산더르 세튼의 아들 토머스를 수비대가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이후로 하루에 두 명씩 스코틀랜드 인질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 후 추가 항복 조건이 합의되었다. 이번에는 스코틀랜드군이 베릭 외곽에서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거나, 1333년 7월 20일까지 200명의 병력을 마을에 투입함으로써 구호 조치를 취하지 못할 경우, 베릭은 항복하고 주민과 수비대는 베릭 성을 떠나기로 했다. 윌리엄 키스는 이 항복 조건을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전달했고, 더글러스는 정면 대결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군과 스코틀랜드군의 대규모 전투가 임박했다.
3. 전개
1333년 7월 19일,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트위드 강을 건너 북서쪽에서 베릭으로 접근했다. 당시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은 베릭에서 북서쪽으로 2마일 떨어진 할리돈 힐에 숙영지를 세우고 500명의 후방 경비대를 남겨 베릭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자, 그들은 즉시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잉글랜드군은 3개 대열로 구성되었다. 각 대열은 하마기사와 맨앳암즈로 구성되었으며, 각 대열의 양쪽 측면에는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에드워드 발리올이 왼쪽 대열을 지휘했고, 에드워드 3세는 중앙 대열을 맡았으며, 기사 에드워드 드 보훈이 오른쪽 대열을 지휘했다.스코틀랜드군은 4개의 쉴트론[1]으로 구성되었다.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가 첫번째 부대를 지휘했고, 로지스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두번째 부대를 지휘했으며,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세번째 부대를 지휘했고, 로스 백작 휴 드 로스가 제번째 부대를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이 언덕 근처에 이른 뒤, 양자는 상대방이 공격을 시작하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그러다가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다음날인 7월 20일에 베릭 성이 항복하는 걸 막기 위해 전투를 서두르기로 하고 전투를 개시하기로 결정하면서, 스코틀랜드군이 선제 공격에 착수했다. 그들은 고지 중간에 있는 습지 계곡을 건너 잉글랜드군 숙영지를 향해 할리돈 힐 측면으로 전진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전진하는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스코틀랜드 전사들은 일반적으로 투구를 착용하지 않았거나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없는 투구를 착용했기 때문에, 머리가 화살에 취약했다. 이 때문에 많은 스코틀랜드 장병들이 화살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고, 늪지대를 강제로 통과하고 고지에 올라가야 해서 속도가 느려졌고 대형도 흐트러졌다. 이윽고 스코틀랜드 선두 부대가 잉글랜드군 전선에 도착했을 때, 잉글랜드군 맨앳암즈들은 전열을 유지하고 긴밀한 대형을 갖춰서 흩어지고 지친 스코틀랜드군을 쉽게 격퇴했다.
짧은 백병전 끝에 스코틀랜드군이 허물어져 후방으로 도주하자, 발리올과 에드워드 휘하 하마 기사들이 후방에 있던 말에 올라타서 그들을 추격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이때 로스 백작의 네번째 쉴트론은 전장을 우회해 베릭 성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다른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잉글랜드군이 사방에서 에워싸면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잉글랜드군은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스코틀랜드군을 맹렬하게 추격해 학살을 자행했다. 스코틀랜드군은 8마일(13km) 동안 추격당해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에드워드 3세는 포로를 잡지 말고 전부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그의 명령에 반하여 포로로 잡힌 약 100명의 스코틀랜드인들은 다음날인 7월 20일 아침 참수형에 처해졌다. 베릭 성 주민과 수비대는 스코틀랜드군이 완패했다는 걸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도시를 떠났다.
4. 결과
잉글랜드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는 35,000 ~ 6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연대기에는 10,000명이 사망했다고 기술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수천 명이 전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스코틀랜드군 총사령관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로스 백작 휴 드 로스는 전사했고, 그 외의 여러 스코틀랜드 기사들도 전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잉글랜드 연대기에서는 14명으로 기술되었지만, 학자들은 수백명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전투가 끝난 뒤 스코틀랜드 백작 6인의 유해를 몸소 매장했다고 한다.할리돈 힐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에드워드 3세는 베릭 성의 항복을 받아낸 뒤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의 복종 서약을 받아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남쪽으로 떠났고, 에드워드 발리올과 그의 추종자들은 북쪽으로 나아가 1333년 10월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에서 의회를 개최한 뒤 자신이 왕좌에 오르도록 도왔던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스코틀랜드 내 재산을 돌려줬다. 1334년 6월 19일, 발리올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8개 카운티를 잉글랜드에 양도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와 결혼했던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약혼했다.
그러나 발리올의 입지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았다.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다가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복귀한 귀족들과 브루스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에이셔의 로버트 스튜어트와 리데스데일의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데이비드 2세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존은 1334년 8월 반란군을 피해 베릭 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1334년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겨울 추위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13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재차 침공해 로우랜드를 휩쓸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이 산악 지대에 숨어서 농성하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이후 1335년 11월 30일, 데이비드 2세를 추종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컬블린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에 잔존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