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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23:17:38

루브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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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후브헤 전투.jpg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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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9년 2월 11일, 오를레앙 공방전을 치르던 아군에 물자를 보급하러 가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의 급습을 받았지만 격퇴한 전투. 이들이 수송 마차에 청어를 가득 싣고 있었기 때문에 '청어 전투'로도 일컬어진다.

2. 상세

1428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작 존은 전쟁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도팽 샤를을 끝장내기 위해 오를레앙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를레앙은 파리와 도팽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샤를이 다스리는 영토의 북쪽 경계인 루아르 강의 중요한 교차점이었다. 이곳을 제압한다면, 잉글랜드군은 루아르 강을 순조롭게 건넌 뒤 부르주로 쳐들어가서 샤를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1428년 10월,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가 이끄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이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그 해 11월 솔즈베리 백작이 적이 쏜 포탄에 맞아 사망하자,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오를레앙 포위군을 지휘했다. 그렇게 오를레앙 공방전이 한창 이어지던 1249년 2월,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1,000명의 기마 궁수 및 기사들이 300대의 마차에 식량, 화살, 화약, 대포 등을 싣고 파리에서 출발했다. 화물 중에는 사순절 기간에 병사들에게 먹일 청어가 가득 실려 있었다.

2월 11일, 수송 부대는 루브레(Rouvrey) 마을에 도착해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아침 루브레 마을을 떠나 오를레앙으로 향하던 중 남서쪽에서 클레르몽 백작[1] 샤를 1세와 에브뢰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장군인 단리의 존 스튜어트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 4,000명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진군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적 수송부대를 발견하자 보급품을 탈취하기로 한 것이었다. 존 파스톨프는 적군이 다가오자 호송대를 멈춰세운 뒤 루브레에서 1마일 떨어진 도로에서 마차를 원형으로 세우고 사슬로 묶은 후 전 병력을 마차가 에워싸고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샤를 1세와 존 스튜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마차 대열 주위를 에워싼 뒤, 가지고 온 대포 1문으로 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마차 여러 대가 파손되었고, 청어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하지만 전투를 포병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던 존 스튜어트는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린 뒤 적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명령에 따라 적을 향해 달려들자, 포병대는 아군을 맞출까봐 더 이상 포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적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격퇴했다. 뒤이어 샤를 1세의 기마병들이 돌격을 가했지만, 마차 벽을 뚫을 수 없어서 역시 격퇴되었다.

적이 연이은 패배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걸 확인한 존 파스톨프는 기사들에게 말에서 올라타서 마차 밖으로 나와 적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잉글랜드 기병대는 즉시 적진으로 달려가서 프랑스 포병대를 몰아내고 대포를 파괴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잉글랜드 수송부대는 파손된 마차를 수리한 뒤 이동을 재개해 오를레앙의 포위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는 120명의 기사와 600명의 군인이었다. 존 스튜어트를 비롯한 여러 고위급 장교들이 전사했고, 장 드 뒤누아는 부상을 입었지만 일부 병력을 수습해 오를레앙으로 겨우 들어갔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잔 다르크는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자신이 시농 성에 머무르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그녀의 요청을 번번이 거절했지만,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가던 군대가 패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를 시농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얼마 안 되는 호위대와 함께 435km에 달하는 거리를 주파하여 시농에 도착한 뒤 샤를을 설득해 오를레앙을 구원할 새 군대의 수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그녀는 오를레앙으로 향했고, 반 년 동안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던 도시를 8일만에 구원했다.
[1] 훗날 부르봉 공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