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31 16:46:04

생잠 요새 공방전


백년전쟁의 전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킹혼 전투 더플린 무어 전투 아난 전투 할리돈 힐 전투 컬블린 전투
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던바 공방전 네빌스 크로스 전투 네스빗 무어 전투 베릭 공방전
번트 캔들마스
제1기
카잔트 전투 아르네뮤이덴 해전 영국 해협 전역 캉브레 공방전 슬로이스 해전
생오메르 전투 투르네 공방전 베르주라크 전투 오베르슈 전투 에기용 공방전
1차 캉 공방전 블랑슈타크 전투 크레시 전투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 1차 칼레 공방전
루나롱주 전투 칼레 전투 윈첼시 해전 생장당젤리 공방전 아르드르 전투
긴 공방전 흑태자의 슈보시 브레퇴유 공방전 푸아티에 전투 자크리의 난
샤르트르 공방전
브르타뉴 내전
샹토소 전투 엔봉 공방전 반 공방전 브레스트 해전 모를레 전투
생폴드레옹 전투 라 로슈데리앙 전투 30인의 결투 모롱 전투 렌 공방전
오레 전투
제2기
브리네 전투 코르슈렐 전투 나헤라 전투 몬티엘 전투 리모주 공방전
퐁발랭 전투 라 로셸 해전 시세 전투 곤트의 존의 슈보시 와트 타일러의 난
루즈베케 전투 이프르 공방전 브레스트 공방전 마게이트 해전 오터번 전투
포르투갈 공위기
아톨레이로스 전투 리스본 공방전 알주바호타 전투 발베르데 전투
글린두르의 난
마이니드 헤드겐 전투 브린 글라스 전투 슈루즈버리 전투 스톨링 다운 전투 푸울 멜린 전투
제3기
아르플뢰르 공방전 아쟁쿠르 전투 발몽 전투 셰프드코 해전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보제 전투 모 공방전 크라방 전투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생잠 요새 공방전 몽타르지 공방전 오를레앙 공방전 루브레 전투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1차 파리 공방전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
콩피에뉴 공방전 안통 전투
제4기
푸앙세 공방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제르베로이 전투 생드니 공방전 2차 파리 공방전
2차 칼레 공방전 타르타 공방전 퐁투아즈 공방전 디에프 공방전 포미니 전투
잭 케이드의 난 블랑크포르 전투 카스티용 전투 }}}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6년 2월 27일 ~ 3월 6일, 프랑스 왕국의 브르타뉴 공국군이 생잠 요새를 공격했다가 패퇴한 공방전.

2. 상세

장 5세 드 브르타뉴는 1399년 브르타뉴 공작위에 오른 뒤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국과의 사이에서 충성 대상을 이리저리 바꾸기로 악명 높았다. 1420년 5월 21일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헨리 5세가 잉글랜드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이 되는 게 확실시되자 헨리 5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다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에게 궤멸되자 헨리 5세에 대항하여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도팽 샤를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전세가 잉글랜드쪽으로 기울자 1423년 아미앵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잉글랜드 쪽으로 전향했다.

1425년 동생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도팽 샤를에게 귀순한 뒤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자, 그 역시 도팽을 따르기로 마음먹고 그 해 10월 7일 소뮈르 조약에 서명해 샤를을 프랑스 국왕으로 받들었다. 이에 토머스 램프스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600명이 1426년 1월 브르타뉴를 침공하여 여러 마을을 약탈하다가 브르타뉴군이 대규모 역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노르망디-브르타뉴 국경 지대에 있는 생잠 요새로 후퇴했다. 2월 27일, 장 5세의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 민병대 16,000명이 생잠 요새로 접근했다. 그들은 정찰을 위해 나선 잉글랜드 병사들을 성안으로 몰아낸 뒤 도시를 포위했다.

리슈몽은 수적으로 절대 우세하지만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열악한 민병대로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 여기고, 강력한 포병대를 동원해 여러 방향에서 요새를 포격하게 했다. 포격은 7일간 이어졌고, 수비대가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출격했지만 모두 격퇴되었다. 급기야 성벽에 2개의 큰 구멍이 생기자, 리슈몽은 전령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 시기 급료가 미지급되어 일부 병력이 탈영하자, 리슈몽은 장교들과 논의한 끝에 지체했다가 군대가 붕괴되는 꼴을 보느니 지금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3월 6일, 브르타뉴군은 생잠 요새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램프스턴과 잉글랜드 병사들은 온종일 격전을 치른 끝에 가까스로 물리쳤지만, 리슈몽이 재차 공세를 가해오자 점차 밀렸다. 이때 리슈몽이 요새 반대편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맡겼던 부대가 귀환했는데, 브르타뉴 민병대는 이들이 요새를 구하러 오는 잉글랜드군이라고 착각하고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호기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고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가 큰 손실을 입혔다. 수백 명의 민병대가 인근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고, 많은 이들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리슈몽은 잔여 병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다들 도망쳐버려서 성공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숙영지를 불태운 뒤 퇴각했다. 기록에 따르면, 민병대 60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생포되었으며, 18개의 군기가 잉글랜드군에 노획되었다고 한다.

이틀 후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생잠 요새에 당도했다. 그는 브르타뉴군이 형편없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브르타뉴로 침입해 공국의 수도인 렌을 압박하다가 장 5세로부터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이후 장 5세는 1427년 9월 8일 트루아 조약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고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서 받들기로 했다. 여기에 아들 질 드 브르타뉴를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