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터번 전투 영어: Battle of Otterburn | ||
시기 | 1388년 8월 5일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오터번 | |
원인 |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경 분쟁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 스코틀랜드 왕국 |
지휘관 | 헨리 퍼시◎ | 제임스 더글러스† |
병력 | 미상 | 2,000 보병, 300 맨앳암즈 |
피해 | 1800명 전사, 1,000명 포로 | 병사 100명 전사, 기사 4명 전사 |
결과 | 스코틀랜드의 승리. | |
영향 |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평화 협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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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88년 8월 5일 노섬벌랜드의 오터번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킨 전투.2. 상세
백년전쟁이 발발한 이래, 스코틀랜드는 프랑스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를 여러 차례 급습했다. 1385년 5월 장 드 비엔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1]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잉글랜드에 대항하던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 해 겨울 스코틀랜드군 4,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렌드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잉글랜드 당국은 이에 대응해 대군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한 로우랜드 지방 대부분을 약탈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프랑스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이후 프랑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여긴 스코틀랜드는 장 드 비엔 등 프랑스 장성들을 강제로 억류한 뒤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길 정도로 격분했지만, 적을 늘릴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보상금을 내주고 프랑스 장성들을 돌려받았다. 그 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1388년, 스코틀랜드 고위 귀족들은 국왕 로버트 2세를 제쳐놓고 체드버그에 모여서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문제를 놓고 열띤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나이가 어려서 측근들에 의지하고 있고, 왕과 의회파 귀족들간의 분쟁이 갈수록 격화되는 등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운 점에 주목하고, 1385년 자국을 침략해 큰 피해를 안긴 자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이에 국경을 넘어 공격하기로 결심한 이들은 그 해 8월 체비엇 힐스의 옛홀름 마을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머레이 백작 존 던버, 파이프 백작 로버트 스튜어트, 기사 제임스 린치 등이 1,200명의 맨앳암즈와 다수의 일반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
얼마 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스파이를 체포했다. 스파이는 고문을 받은 끝에 잉글랜드군이 국경 남쪽에 집결하면서 스코틀랜드군의 침공이 서쪽 경로와 동쪽 경로 중 어느 쪽으로 이뤄지는 지가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만약 스코틀랜드군이 한 쪽을 택한다면, 잉글랜드는 다른 경로를 통해 반격을 가할 터였다. 이에 스코틀랜드군은 두 경로로 동시에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더글러스가 300명의 맨앳암스와 2,000보병을 이끌고 동쪽 경로를 통해 더햄으로 진군하는 동안, 린치 백작은 더 많은 군대를 인솔해 서쪽 경로를 통해 리더데일과 칼라일로 행진하기로 했다.
스코틀랜드군이 두 경로를 통해 노섬벌랜드에 쳐들어오자, 랄프 퍼시의 잉글랜드군은 칼라일로 달려갔고 헨리 퍼시는 뉴캐슬로 이동했다. 그 후 더글러스의 군대가 뉴캐슬을 지나치자, 헨리 퍼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성에서 출격해 적을 공격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더글러스와 헨리 퍼시는 전투 도중 서로 만나서 일기토를 벌였고, 더글러스가 퍼시를 쫓아내고 퍼시의 창과 페넌트를 노획했다고 한다. 더글러스는 퍼시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 여기고 도발했지만, 헨리 퍼시는 증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당국의 엄격한 지시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
그 후 더글러스의 군대는 폰테랜드 성을 파괴한 뒤 오터번 성을 포위했다. 그들은 한쪽에는 습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숲이 우거진 언덕이 있는 강변에 진을 쳤다. 한편 헨리 퍼시는 더글러스의 군대가 스코틀랜드군의 분견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맨앳암스와 보병대를 이끌고 더글러스를 쫓아갔다. 당대의 몇몇 사료에 따르면 퍼시에겐 6,000명의 맨앳암스와 8,000명의 보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그의 군대가 그정도로 클 가능성은 없다고 간주하며, 스코틀랜드군보다 다소 많은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1388년 8월 5일 일몰 무렵, 퍼시의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진영 인근에 도착했다. 주력군이 적 진영으로 접근하는 동안, 리즈데일의 영주인 로버트 4세 드 움프라빌은 북쪽의 숲을 통과하는 우회 경로를 통해 스코틀랜드 진영 후방으로 접근했다. 당시 스코틀랜드군은 공성전을 마친 뒤 저녁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어서, 적이 나타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윽고 잉글랜드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그제야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사전에 숙영지 주변에 둥그렇게 세워둔 마차를 앞에 둔 채 맞섰다. 당시 더글러스는 투구도 쓰지 않은 채 숙소 바깥으로 뛰쳐나와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잉글랜드군은 적 숙영지와 강 사이로 침투하려 했지만 습지대에 가로막혀 꼼짝 못했고, 더글러스는 기병대를 모은 뒤 언덕을 돌아서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이윽고 어둠이 완전히 깔리고 달과 별빛만 가지고 적을 판별해야 할 정도로 시야가 불량했지만, 양측은 개의치 않고 전투를 이어갔다. 도중에 더글러스가 전투용 도끼를 휘두르며 적 대열을 휘젓다가 전사했지만, 존 스윈튼이 그를 대신해 군대를 잘 이끌었고, 스코틀랜드군은 지휘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분전했다.
한편 적의 후방으로 이동하던 로버트 4세 드 움프라빌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적과 맞서 싸우느라 비워진 진영에 들어서서 약탈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왔던 경로로 되돌아갔다. 그 바람에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헨리 퍼시는 머레이 백작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지휘관이 잡혔다는 것을 알게 된 잉글랜드군은 달아났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들을 추격해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았다.이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더글러스 백작 외에 로버트 헤리엇, 존 투리스, 윌리엄 린던 등 기사 몇 명과 병사 100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지며, 잉글랜드군은 1,8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 스코틀랜드군은 그제야 더글러스가 전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본국으로 철수했다. 더글러스의 유해는 멜로즈 수도원에 마련된 조상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서쪽 경로로 간 스코틀랜드군은 노섬벌랜드 서부의 잉글랜드 마을들을 모조리 약탈한 뒤 칼라일에서 버티고 있던 랄프 퍼시를 상대하지 않고 돌아갔다. 당시 잉글랜드는 마게이트 해전 승리에 고무되어 프랑스를 본격적으로 침공하자는 주장이 거셌지만, 이 전투 소식이 전해지자 수그러들었다. 리처드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프랑스와 화해하기로 했고, 1389년 휴전 협약을 체결한 뒤 프랑스와의 완전한 평화를 위한 협상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