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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8:53:59

브린 글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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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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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02년 6월 22일, 오와인 글린두르가 이끄는 웨일즈 반란군이 에드먼드 모티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전투.

2. 상세

1401년 6월 마이니드 헤드겐 전투에서 토벌대를 궤멸하고 뒤이은 헨리 4세의 토벌 시도를 격퇴한 뒤, 오와인 글린두르의 기세는 갈수록 거세졌다. 1401년 11월 2일, 오와인은 카나본 성을 포위 공격해 거의 함락시킬 뻔했지만, 성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피해가 커지자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오와인 글린두르 반란 토벌을 맡은 헨리 '핫스퍼' 퍼시는 자신이 왕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헨리 4세의 억압적인 정책이 웨일스인들이 반란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만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협상과 타협 만이 오와인의 반란을 종식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강경책을 고수했다. 그는 웨일스에서 잉글랜드의 지배력을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새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웨일스인은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웨일스에서 공직을 맡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이유로도, 심지어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휴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웨일스인 어린이는 잉글랜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웨일스 사람이 잉글랜드 여성과 결혼하면 엄중한 벌금이 부과되고, 잉글랜드 남성이 웨일스 여성과 결혼하면 어떤 공개 집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조치를 통해 웨일스인들이 반란에 가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웨일스인들은 여기에 분노해 오와인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402년 1월, 오와인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인 레지날드 그레이가 루틴에서 오와인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사로잡혔다. 루틴 자체는 오와인에게 점령된 뒤 방화로 파괴되었다. 그레이는 1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헨리 4세가 10,000 마르크의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났다. 그해 6월, 오와인 글린두르는 모티머 가문의 영지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2,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추격했다.

1402년 6월 22일, 양군은 웨일스 포이스 지방의 나이튼과 프레스테인 마을 인근의 브린글라스 언덕에서 조우했다. 당시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던 오와인 글린두르는 병력을 나누기로 했다. 그는 장궁으로 무장한 궁수들을 브린 글라스 언덕의 결사면에 배치했고, 나머지 병력을 언덕 한쪽에 계곡에 숨기고 두꺼운 잎사귀로 몸을 가리도록 했다. 모티머의 부하들이 언덕 위에서 화살을 퍼붓는 적 궁수대를 향해 한창 진군하고 있을 때, 숨어있던 웨일스 병사들이 출격해 모티머군의 측면을 요격했다. 여기에 모티머에게 징집되어 전투에 투입되었던 웨일스 출신 궁수들이 편을 바꾸어 잉글랜드군을 향해 화살을 쐈다. 이들의 이탈이 전투 전에 계획되었는지, 아니면 그저 전투의 진행 상황을 보고 승리하는 편을 따르기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잉글랜드군은 정면과 측면을 요격당한 데다 대열 내부에서 반란이 터지자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웨일스 반란군의 사상자는 200명이었고 잉글랜드군은 800명을 잃었다고 한다. 여기에 잉글랜드군 사령관 에드먼드 모티머가 생포되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웨일스군 숙영지에 있던 여인들이 잉글랜드인들이 헨리 4세를 따라 웨일스로 쳐들어와 잔혹 행위를 벌인 것에 대한 복수로 잉글랜드인 시신을 훼손했다고 한다. 현대의 여러 역사가는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잉글랜드 의회가 웨일스인이 야만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퍼뜨렸을 거라고 추정한다.

오와인 글린두르는 에드먼드 모티머를 란베리스 근처의 돌바단 성에 연금한 뒤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이에 모티머의 친구들, 특히 모티머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헨리 '핫스퍼' 퍼시가 몸값을 모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모티머 가문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지 의심해 에드먼드의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급기야 에드먼드의 영지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이 소식에 격분해 오와인 글린두르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1402년 11월 30일, 에드먼드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 2세의 후계자는 헨리 4세가 아니라 자신의 조카이자 5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 모티머라고 선포했다.

1403년 노섬벌랜드 백작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그의 아들이자 엘리자베스 모티머의 남편인 헨리 '핫스퍼' 퍼시,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가 오와인 글린두르-모티머 연합에 가담해 헨리 4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왕국을 3개로 나누고자 했다. 모티머 가문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고, 오와인 글린두르는 웨일스를 차지하며, 퍼시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주권을 갖기로 했다. 이에 헨리 4세는 이들의 병력이 합세하기 전에 각개 격파하기로 하고, 1403년 7월 21일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와 토머스 퍼시의 반란군과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