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C9C7><colcolor=#000000> 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Edmund Mortimer, 5th Earl of March | ||
이름 | 에드먼드 모티머 (Edmund Mortimer) | |
출생 | 1391년 11월 6일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뉴 포레스트 | |
사망 | 1425년 1월 18일 아일랜드 메스 트림 성(향년 33세) | |
배우자 | 안나 스태퍼드 | |
아버지 | 로저 모티머 | |
어머니 | 엘리노어 홀랜드[2] | |
형제 | 앤, 로저, 엘리노어 | |
직위 | 제7대 위그모어 남작, 제5대 마치 백작, 제8대 얼스터 백작, 아일랜드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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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헨리 4세 시기 반란군에 의해 잉글랜드 왕으로 추대된 뒤 런던 탑에 장기간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헨리 5세에 의해 풀려난 뒤 헨리 5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헨리 5세의 원정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고, 잉글랜드 왕국에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치의 모티머 가문은 그의 대에 단절되었다.2. 생애
1391년 11월 6일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뉴 포레스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이자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였다. 어머니 엘리노어 홀랜드는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어머니인 켄트의 조앤의 손녀였다. 형제로 앤[3], 로저, 엘리노어[4]가 있었다.1398년 7월 20일, 아버지 로저 모티머가 아일랜드 청지기를 맡고 있던 중 아일랜드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에드먼드는 겨우 6살이었기 때문에 그가 물려받은 거대한 모티머 영지는 리처드 2세의 보호 아래 놓였고, 삼촌인 마치 기사 에드먼드 모티머의 후견을 받았다. 1399년 여름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나있을 때, 지난날 리처드 2세에게 추방된 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비밀리에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성공했고, 리처드 2세는 폐위되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세번째 아들인 곤트의 존의 아들이었고,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3세의 두번째 아들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였다. 따라서 원칙상으로는 에드먼드가 볼링브로크의 헨리보다 왕위 계승에 근접했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삼촌인 에드먼드 모티머는 대다수 귀족이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달리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1399년 8월 2일 해리퍼드에서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복종하겠다고 서약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1399년 10월 13일 헨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헨리 4세는 에드먼드 모티머와 로저 모티머 형제가 자신의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가 될 것임을 인식하고, 그들을 윈저 성으로 데려와서 긴밀한 통제를 받게 했으며, 모티머 영지를 퍼시 가문의 통제하에 두게 했다.
1402년,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스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4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기 전에 에드먼드와 로저를 버크햄스테드 성으로 옮기고 랭커스터 기사 휴 워터튼의 감시를 받게 했다. 그해 6월 22일, 에드먼드의 삼촌인 마치 기사 에드먼드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린 글라스 전투에서 오와인 글린두르에게 참패하고 사로잡혔다. 이후 모티머의 친구들, 특히 모티머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헨리 '핫스퍼' 퍼시가 몸값을 모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모티머 가문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지 의심해 에드먼드의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급기야 에드먼드의 영지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삼촌 에드먼드 모티머는 격분해 오와인 글린두르 편으로 돌아섰다.
1402년 11월 30일, 삼촌 에드먼드 모티머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 2세의 후계자는 헨리 4세가 아니라 자신의 조카이자 5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라고 선포했다. 1403년에는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그의 아들이자 엘리자베스 모티머의 남편인 헨리 '핫스퍼' 퍼시,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가 오와인 글린두르-모티머 연합에 가담했다. 이들은 잉글랜드 왕국을 3개로 나누고자 했다. 모티머 가문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고, 오와인 글린두르는 웨일스를 차지하며, 퍼시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주권을 갖기로 했다.
헨리 4세는 이들의 병력이 합세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했다. 1403년 7월 21일, 헨리 4세가 이끄는 토벌군이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를 전사시키고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를 체포해 처형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반란에 미처 가담하기 전에 아들과 동생이 모조리 죽자 헨리 4세에게 항복했고, 반역죄를 모면했지만 잉글랜드 원수직을 상실하고 여러 영지를 빼앗겼다. 하지만 노섬벌랜드 백작은 이후에도 반군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에드먼드는 반란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동생 로저와 함께 윈저 성으로 끌려갔다.
1405년 2월, 삼촌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먼드와 로저 형제를 윈저 성에서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글로스터 백작이었으며 1400년 헨리 4세를 모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토머스 디스펜서의 미망인 콘스탄스, 콘스탄스의 형제이자 요크 공작인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이에 협력하기로 했다. 콘스탄스는 두 소년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챌튼엄 인근에서 헨리 4세의 추종자들에게 따라잡혔다. 콘스탄스와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감옥에 감금되었고, 에드먼드와 로저는 윈저 성으로 보내졌다. 1406년, 헨리 4세는 소년들을 페번시 성으로 감금했다가 다시 런던 탑으로 이송했다. 1409년 형제 로저가 장기간의 옥고를 버티지 못하고 옥사했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후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 5세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에드먼드를 석방했다. 대관식 전날인 1413년 4월 9일, 에드먼드는 헨리 5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해 6월 의회에서, 에드먼드는 자신의 직함과 재산을 돌려받았다. 11월 18일, 그는 충성심을 보장하기 위해 헨리 5세에게 10,000 파운드의 채권을 지불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영지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오크니 백작이 이끄는 반란군이 아일랜드 내 모티머 가문 영지였던 얼스터를 초토화했고, 웨일스 영지 역시 오와인 글린두르의 대규모 반란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빚더미에 짓눌렸다. 1415년 2월, 에드먼드는 제5대 스태퍼드 백작 에드먼드 드 스태퍼드의 앤 스태퍼드와 결혼했고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헨리 5세의 허락 없이 결혼했기 때문에 1만 마르크의 벌금을 내야 했고, 이로 인해 빚은 더욱 늘어났다.
1415년 7월,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때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누이인 앤 모티머의 남편이자 케임브리지 백작인 코니스버러의 리처드가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와 함께 사우샘프턴에서 헨리 5세와 그의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에드먼드를 잉글랜드 국왕에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7월 21일에 에드먼드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소개하고 가담할 것을 권했다. 에드먼드는 열흘 동안 어찌할지 고심하다가, 7월 31일 포트체스터 성으로 달려가서 헨리 5세에게 이실직고했다. 에드먼드가 음모를 고발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자신을 복권시켜 준 헨리 5세에게 감사했을 수도 있고, 음모가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결국 세 음모가는 즉결 처형되었다. 이후 헨리 5세의 여러 측근은 에드먼드가 음모가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될 에정이었으며, 음모 계획을 전해들은 뒤 즉시 알리지 않고 열흘간 시간을 끌었다는 점을 들어 에드먼드 역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에드먼드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후 에드먼드는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고, 1415년 8월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이질에 걸려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416년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휘하에 프랑스군에 포위된 아르플뢰르 구원전에 참여했다. 1417년 프랑스 해안을 순찰하는 함대에 참여했으며, 1418년 6월 노르망디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코탕탱, 돈프론트, 캉을 점령한 뒤 왕실군에 합류해 루앙 공방전에 참여해 승리에 기여했다.
1421년 2월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 부부가 잉글랜드로 떠날 때 그들과 동행했으며, 카트린의 잉글랜드 왕비 대관식 때 왕비의 홀을 들고 다녔다. 이후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해 모 공방전에 참여했다. 1422년 8월 31일 이질에 시달리던 헨리 5세가 사망하고 갓난아기였던 헨리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된 뒤, 에드먼드는 헨리 6세를 대신해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될 18명의 섭정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1423년 3월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가기를 꺼리다가 미스의 주교인 에드워드 댄시에게 아일랜드 관리를 맡겼다.
1424년, 가까운 친척인 존 모티머가 반역을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그는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1424년 가을 아일랜드로 부임했다. 이후 아일랜드 내 가문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원정에 나섰으나, 1425년 1월 18일 메스 카운티의 트림 성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사후 잉글랜드로 옮겨져서 모티머 가문의 후원을 받은 클레어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에드먼드는 생전에 제5대 스태퍼드 백작 에드먼드 드 스태퍼드의 딸 안나 스태퍼드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안나 스태퍼드는 그가 사망한 뒤 제2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와 재혼했다. 에드먼드의 유일한 상속인은 여동생인 앤 모티머와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부부의 아들인 요크의 리처드였다. 1432년, 섭정 의회는 요크의 리처드가 모티머 가문의 모든 작위와 영지를 상속받는 걸 허락했다. 요크의 리처드는 모티머 가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았고, 이는 장미 전쟁 발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450년, 잭 케이드라는 인물이 자신을 에드먼드의 사생아인 '존 모티머'로 사칭하며 켄트에서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잭 케이드는 한때 험프리 스태퍼드와 윌리엄 스태퍼드가 이끄는 토벌대 10,000명을 격파하고 런던에 입성한 뒤 자신을 "런던의 제왕(Lord of London)"이라고 선포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반란군이 런던 시내를 약탈하는 걸 저지하지 못해 민심을 잃고 결국 토벌대에게 진압되어 목숨을 잃었다.
[1] 영국 노샘프턴셔주 이스트 노샘프턴셔 자치구 나싱턴의 성 처녀 메리와 모든 성인 성당에 새겨진 스테인글라스. 좌측 인물은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이고, 우측 인물은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다.[2]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3] 1390 ~ 1411,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의 부인. 요크의 리처드의 어머니.[4] 1395 ~ 1414, 기사 에드워드 코트니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