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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1:23

헨리 퍼시(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성명 헨리 퍼시
Henry Percy
생몰년도 1341년 11월 10일 ~ 1408년 2월 19일 또는 2월 20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스카버러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브래햄 무어
아버지 헨리 퍼시
어머니 랭커스터의 메리
형제자매 토머스, 모드
아내 마가렛 네빌, 모드 루시
자녀 헨리, 토머스, 랄프
직위 퍼시 남작, 노섬벌랜드 백작, 가터 기사단 단원,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 칼레 수비대장, 잉글랜드 원수, 잉글랜드 무관장, 맨 섬의 왕
1. 개요2. 생애
2.1. 퍼시 가문2.2. 초년기2.3. 퍼시 남작2.4. 노섬벌랜드 백작2.5. 리처드 2세의 친정 기간의 행적2.6. 헨리 4세의 집권에 기여하다2.7. 퍼시의 반란2.8. 최후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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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스코틀랜드군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고,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헨리 4세를 옹립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헨리 4세에게 제압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

2.1. 퍼시 가문

퍼시 가문은 루뱅 백작 고트프리트 1세의 막내아들인 루뱅의 조슬랭(Jocelin de Louvain, 1121 ~ 1180)에게서 기원한다. 이 인물은 아버지로부터 별다른 유산을 받지 못하고 이복 누이인 아델리자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와 결혼했을 때 누이를 따라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이후 누이의 지원에 힘입어 서식스의 피트워스에 상당한 영지를 구입했고,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에 크게 기여한 윌리엄 1세 퍼시의 마지막 후손이며 요크셔, 링컨셔, 에식스, 햄프셔, 케임브리지셔에 걸쳐 광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던 아그네스 퍼시와 결혼했다. 이후 두 사람의 후손들은 대대로 퍼시를 성으로 삼았다.

초기에 퍼시 가문의 주요 자산은 요크셔에 있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헨리 퍼시가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다수의 토지를 영지로 삼고 노섬벌랜드의 안위크 성을 구입하면서, 퍼시 가문의 중심지는 노섬벌랜드로 넘어갔다. 헨리 퍼시는 초대 퍼시 남작이 되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책임졌고, 그 뒤를 이은 아들 헨리 퍼시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요격해 대승을 거두고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를 사로잡는 대활약을 선보였다. 또한 그는 제드버러 성과 숲, 베릭 세관 및 베릭 성을 추가로 확보했다. 그 결과 퍼시 가문은 노섬벌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가 되었고, 해당 지역에서 독자적인 군사 및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제3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는 조부, 할아버지와는 달리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전투를 딱히 벌이지 않았다. 그 대신, 플랜태저넷 왕조의 일원인 랭커스터의 메리와 결혼해, 잉글랜드 왕실과의 관계를 두텁게 다졌다. 제4대 퍼시 남작이자 이 문서의 주인공인 헨리 퍼시는 1341년 11월 10일 요크셔 스카버러 성에서 제3대 허시 남작 헨리 퍼시와 랭커스터의 메리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토머스 퍼시, 모드 퍼시[1]가 있었다.

2.2. 초년기

안위크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헨리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잉글랜드 궁정에서 보냈거나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연대기는 헨리가 잘 교육받았고 사고능력이 뛰어났으며, 제안된 내용에 현명하고 성숙하며 설득력 있게 반응했기 때문에 존경받았다고 기술했다. 1372년, 곤트의 존은 헨리에게 그가 원하는 만큼 자신의 땅에서 사냥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1373년에는 산림 관리인에게 개 여섯 마리를 주라고 명령했다. 이로 볼 때, 헨리는 곤트의 존과도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헨리는 경력 초기에 공식 문서에서 위원회의 일원으로 자주 언급되었는데, 대부분 순회판사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1368년에서 1376년 사이에 순회판사로서 요크셔에 10번, 노섬벌랜드에 2번 방문했다. 또한 헨리는 다양한 지역 분쟁을 해결하라는 요청을 자주받았다. 1367년 휘트비 수도원의 폐허 상태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가택 침입, 가축 절도, 재산 파괴, 불법 사냥 및 불법 낚시 사건 조사도 맡았다. 1372년과 1374년에는 노섬벌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의 양모 불법 수출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375년 11월에는 뱀보로 성 요새의 상태를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헨리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의 방위 임무에 참여했다. 1362년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 임명되어 스코틀랜드 정부와 협상할 권한을 받았으며, 1366년 1월 29일 가터 기사단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67년 2월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는 모든 성과 요새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버윅 성과 제드버러 성의 보안관을 역임했다. 그해 9월 4일, 그는 아버지와 함께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 글래스고 주교와 합의한 국경 보호 조약에 서명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서 스코틀랜드의 거물인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와 주기적으로 충돌했다. 이에 1374년 8월 29일에 퍼시와 더글러스 사이의 분쟁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후의 협상 결과 양자가 휴전 협상을 맺기로 했다.

2.3. 퍼시 남작

136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헨리는 퍼시 남작 작위와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373년, 3대 스트라스보기 남작 데이비드 스트라스보기(1332 ~ 1369)의 두 딸인 필리파와 엘리자베스의 후견권을 구입했으며, 나중에 두 여인을 자신의 두 아들과 나란히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스트라스보기 가문의 영지가 퍼시 가문에 병합되었다. 1381년 제3대 앵거스 백작 길버트 4세 드 움프라빌이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프라도 성을 비롯한 움브라빌 가문의 영지 상당 부분을 확보했다.

1369년 8월, 헨리는 기사 12명, 종자 47명, 궁수 1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곤트의 존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5일, 프랑스에서 복무한 대가로 중장병 60명, 궁수 100명, 스코틀랜드인 40명에 대한 보수를 받았다. 1372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지만 도중에 함대가 역풍으로 인해 본에 귀환해서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1373년, 헨리는 곤트의 존의 슈보시에 참여했다. 안위크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용감하게 행동하면서 프랑스를 황폐화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도시와 마을을 불태웠으며, 군대를 잘 관리하여 최고의 영예를 안고 영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곤트의 존의 슈보시는 실제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과 정면 대결하길 회피하고 농성에 전념했고, 잉글랜드군은 보르도로 진군하는 동안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1373년 10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헨리를 포함한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교황 특사에 협조해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평화 협정이 이뤄지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1374년에 교황 특사로 파견된 카펜트라의 주교 기욤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헨리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1376년 4월, 일명 "좋은 의회"가 소집되었다. 퍼시도 이 의회에 참여했다. 의회 의장이자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청지기 피터 드 라 마레를 앞세워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재정이 악화된 데에는 국왕의 총신들이 국정을 무능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쇠약해진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고 있던 곤트의 존은 모티머를 비롯한 의회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해 왕실과 의원 및 영주 사이의 소통 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동의했다. 주교 4명, 백작 4명, 남작 4명이 위원회에 구성되었는데, 헨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또한 헨리는 국왕과 왕국의 이익에 반하여 벌어진 범죄를 바로잡기로 예정된 또다른 의회에도 참여했으며, 윌리엄 라티머 남작과 함께 런던 상인 리처드 리온스를 양모를 불법으로 해외에 판매한 혐의로 기소했다. 1376년 12월에는 잉글랜드 원수에 선임되었다.

1377년 1월, 일명 '나쁜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때 헨리는 곤트의 존과 함께 '좋은 의회'가 결의한 안건을 모조리 폐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여기에 더해, 런던 시장직을 폐지하고 대장이 도시를 관리하고, 잉글랜드 원수가 시민을 임의로 체포하는 등 원수의 권한을 런던까지 확장하는 안건을 제기했다. 런던 시민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의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격분했다. 헨리가 이렇게 한 이유는 불분명하나, 수도에 대한 왕실의 영향력을 높이고 런던이 왕실의 뜻에 반하여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줄이고 싶어하는 곤트의 존의 뜻을 받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77년 2월 2일, 런던 주교 윌리엄 코트니는 존 위클리프를 이단자로 고발하고 켄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서드베리와 여러 주교들이 이끄는 법정에 출석시킬 것을 요구했다. 곤트의 존은 이를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자신을 모욕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신학자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주교를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위클리프를 변호하기 위해 신학박사 4명을 임명했다. 재판은 2월 1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이에 존과 잉글랜드 원수 헨리가 원수 지휘봉을 들고 현장에 도착했다.

코트니 주교는 존과 퍼시가 대성당에 온 것에 분노해 퍼시가 자신의 양떼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비난했다. 이에 존은 "주교님이 좋아하시든 아니든, 원수는 원수에 걸맞게 행동할 것"이라고 답했다. 코트니는 이 말에 더욱 분노했고, 존과 코트니간의 언쟁이 벌어지더니 존이 주교의 머리카락을 의자에서 끌어내겠다고 위협한 것에 격분한 런던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존과 헨리는 위클리프를 데리고 대성당에서 도주했고,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얼마 후, 헨리는 런던 시민 한 명을 체포해 런던에 소재한 자신의 집에 구금했다. 이는 런던 치안 판사의 권한을 빼앗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세간에는 존이 런던 시장을 헨리로 교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퍼시의 집을 약탈하고 거기에 갇혀 있던 시민을 석방했다. 이후 폭도들은 사보이 궁전으로 가다가 도중에 존을 변호하던 사람을 죽였다. 코트니 주교가 급히 달려와서 자제를 호소한 덕분에, 사보이 궁전은 약탈당하지 않았다.

당시 부유한 플란데런 상인인 장 디프레의 집에서 존과 함께 식사 중이던 헨리는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존과 함께 뒷문을 통해 탈출하여 배를 타고 켄싱턴 궁전으로 항해했다. 이후 누이 조앤 공주가 3명의 기사를 보내 런던 시민들을 설득해 폭동을 멈추고 귀가하게 했다. 다음날 런던 사람들은 국왕에게 대표단을 보내 자신들이 일으킨 폭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 사태의 책임은 존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런던의 특권이 보존될 것이며 다가오는 황금 희년을 기념하여 일반 사면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의회는 해산되었고, 잉글랜드의 정치 혼란은 겨우 진정되었다. 1377년 5월 8일 칼레 수비대장으로 선임된 헨리는 칼레 시와 인근 요새의 방어를 조사하고 강화했다.

2.4. 노섬벌랜드 백작

1377년 6월 21일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2세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헨리는 1377년 7월 16일에 열린 리처드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해 원수로서의 의식을 수행했다. 이후 4명의 새로운 백작이 임명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노섬벌랜드 백작 칭호를 얻은 헨리였다. 이리하여 헨리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북부 지역은 노섬벌랜드 전체의 권력자가 되었다.

1378년 12월, 제10대 던바 백작 조지 던바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록스버러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다. 그는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서 조지 던바의 영지를 황폐화시켰다. 얼마 후, 스코틀랜드 분견대가 수비대장 로버트 보인턴에게 반감을 품은 하인이 지하 통로를 통해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운 덕분에 베릭 성을 공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헨리는 나중에 '핫스퍼(Hotspur, 무모한 자)'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장남 헨리 퍼시와 함께 베릭 성으로 달려가서 반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그는 곧장 공세를 개시해 2시간도 채 안 되어 성을 탈환하고 스코틀랜드인 중 스코틀랜드로 보내 다시는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자신의 경고를 전달할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를 처형했다.

1380년 여름, 스코틀랜드군이 컴벌랜드를 침공해 펜리스를 약탈하고 칼라일을 위협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최고 권력자인 곤트의 존은 헨리에게 일절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존은 1380년 9월 6일 스코틀랜드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된 뒤 왕과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을 대신해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정을 맺을 권한을 받았다. 이에 헨리는 그가 자기 영지를 파괴하는 스코틀랜드군에 대응하는 것을 막더니 이제는 자기 권한까지 빼앗아버렸다며 강한 불만을 품었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했다. 곤트의 존은 자신을 죽이려 드는 반군을 가까스로 피해 헨리가 있던 안위크 성으로 달아나 자신을 숨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헨리는 이를 거부했고, 존은 그 대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존은 이에 악감정을 품었고, 와트 타일러의 난이 진압된 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8월 4일 레딩에서 열린 회의에서 헨리가 봉기 기간에 자신에 대해 불순종하고, 불충실하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이후 두 사람의 대립이 고조되자, 리처드 2세는 두 사람의 화해를 희망하면서 10월 9일에 열린 버크햄 공의회에 두 사람을 모두 소집했다. 리처드 2세는 그곳에서 헨리를 대신해 곤트의 존에게 사과하면서 분노를 조절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헨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다며, 곤트의 존에게 온갖 모욕을 퍼부었다. 리처드 2세는 침묵하라고 명령했지만, 헨리는 이에 복종하지 않았고, 결국 왕을 능멸한 혐의로 체포되어 일시적으로 구금되었다. 그는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이 자신을 보증하고 의회에 출석해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에 답변할 것이라고 보증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1381년 11월, 곤트의 존과 헨리는 수많은 가신과 함께 런던에 도착했다. 리처드 2세는 그걸 보고 두 사람이 런던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일 것을 우려해 누구든지 무장한 채 의회에 출석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날 의회에서 곤트의 존은 헨리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헨리는 침묵을 지키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 다음날, 퍼시는 곤트의 존이 와트 타일러의 난이 막 발발한 시기인 6월에 보냈던 작은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 4통을 제시함으로써 비난에 답했다.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지침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곤트의 존은 새로운 비난을 했지만, 헨리는 자신을 잘 변호했다. 11월 9일, 헨리는 버크햄에서 했던 행동에 대해 왕과 곤트의 존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 헨리는 잉글랜드 왕실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고 노섬벌랜드 영지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1384년 4월 스코틀랜드와의 휴전이 끝나자, 곤트의 존은 스코틀랜드를 향한 원정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귀환하던 존은 헨리와 협상해 페나인 산맥 양쪽에서의 영역에서 권력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권한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후 헨리는 잉글랜드 북부의 호국경에 공식적으로 선임되었다. 다만 그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던 존은 와트 테일러의 난 때 자신을 도와줬던 존 네빌을 벰버러 성의 수비대장이자 노섬벌랜드의 치안판사로 선임해 그를 견제하게 했다.

1384년 11~12월, 헨리는 의회를 방문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인들은 헨리가 남긴 대리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몇몇 변경 요새를 점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곤트의 존은 헨리가 국경 관리에 소홀했다고 비난했다. 그 결과 12월 14일에 헨리가 요새를 되찾지 못한다면 모든 재산을 압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헨리는 즉시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오랜 공성전을 회피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인들과 협상한 끝에 상당한 돈을 주는 대가로 요새를 돌려받았다. 그 결과, 헨리는 1385년 2월 17일에 리처드 2세로부터 사면받았다. 같은 해 8월에 리처드 2세의 군대가 스코틀랜드로 진군했을 때, 그는 후위대를 이끌었다. 이후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의 직위를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에게 물려줬다.

2.5. 리처드 2세의 친정 기간의 행적

1385년, 18세가 된 리처드 2세가 성인이 되어 독자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후 곤트의 존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 이베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했고, 이에 반발한 귀족들이 청원파를 결성해 총신들과 대결했다. 1387년, 리처드 2세는 헨리에게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피츠앨런은 잘 방어된 라이게이트 성에 있었고, 헨리는 잠시 포위했다가 퇴각했다. 이후 그는 중재자 역할을 맡아 리처드 2세에게 청원파의 불만을 들어달라고 촉구했다.

1388년 여름, 리처드 2세 총신들을 실각시키고 국정을 장악한 청원파는 스코틀랜드군의 침공 위협을 인지하고 헨리와 7명의 다른 북부 잉글랜드 남작들에게 각자의 영지에 남아서 북부 잉글랜드의 안보를 보장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스코틀랜드의 거물인 제2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가 제드버러 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헨리의 아들인 헨리 '핫스퍼' 퍼시가 이를 저지하고자 진군했고, 헨리는 스코틀랜드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안위크 성에 남아있었다. 양군은 곧 오터번 전투를 치렀다. 그 결과 더글러스 백작은 전사했지만 잉글랜드군은 패배했고, 헨리 '핫스퍼' 퍼시와 헨리 퍼시의 또다른 아들인 랄프는 생포되었다.

1389년 카스티야 원정이 실패한 뒤 아키텐에 남아서 행정 조직을 개편하던 곤트의 존이 리처드 2세의 부름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존은 귀족들에게 화합을 이루라고 촉구했고, 헨리와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 본보기를 보였다. 그해 6월 1일,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노팅엄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를 스코틀랜드 동부 국경 감시관으로 선임했다. 헨리는 이에 불만을 품고, 노팅엄 백작이 수행한 스코틀랜드 침공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모브레이의 원정은 실패했고, 스코틀랜드군은 반격을 개시해 노섬벌랜드로 쳐들어와서 타인머스를 파괴했다. 그러다가 역습을 받고 패퇴했지만, 잉글랜드군의 북부에서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1389년 10월 노팅엄 백작이 자신의 임기를 5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하자, 헨리는 다른 북부 영주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했다. 리처드 2세는 모브레이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대신 헨리 '훗스퍼' 퍼시를 서부 국경 감시관으로 5년간 선임하고, 헨리를 칼레의 수비대장으로서 5년간 임명하는 조치를 내렸다. 1389년 여름, 스코틀랜드는 프랑스 왕국의 권고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잉글랜드 북부 지역은 상대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간혹 국경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양측은 대체로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1390년 4월 8일, 헨리는 존 데버루, 더럼 주교 및 5명의 외교관과 함께 프랑스와 평화 협상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권한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프랑스 및 프랑스의 동맹국과 최종 평화를 협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외에도 사법 행정에도 참여했다. 1390년 3월 13일 죄수 헨리 워터빌리프를 함대 감옥 소장으로부터 인도받고 왕의 지시에 따라 죄수를 처리했다. 1391년 6월 1일, 헨리는 노팅엄 백작과 직위를 교환하여 5년간 동부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 선임되었다. 동시에 그의 아들은 서부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 직위를 유지했다. 이리하여 퍼시 가문은 스코틀랜드 국경 전체를 총괄하게 되었다.

1395년 6월, 제4대 보몽 남작 존 보몽이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 감시관에 선임되었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동부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인사들이 잇따라 서부 국경 감시관에 임명되었지만 행정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 1399년 7월 11일, 당시 서부 국경 감시관이었던 제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리처드 2세에게 중간 국경 감시관을 복원하고 노섬벌랜드 백작이 이 자리를 맡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2.6. 헨리 4세의 집권에 기여하다

헨리가 리처드 2세를 상대로 발발한 정변에 가담한 동기는 불분명하다. 그가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에서 물러난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통적으로 제기되었지만, 당시엔 아들이 동부 국경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본인은 아들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었음이 당대 기록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이 때문에 반란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1399년 5월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친히 아일랜드로 향한 리처드 2세는 노섬벌랜드 백작과 헨리 '핫스퍼' 퍼시가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노섬벌랜드 백작에게 아일랜드로 오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순종을 거부하고 당시에 있던 런던을 떠나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교차검증할 다른 기록은 없으며, 헨리가 아일랜드에서 복무하도록 기용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일부 학자들은 리처드 2세가 네빌 가문의 권세를 높이는 것에 대해 헨리가 불안감을 품고 있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1397년 9월, 제4대 네빌 남작이었던 랄프 네빌이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에 취임하면서 노섬벌랜드 인근 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꾸렸다. 여기에 1398년 10월 7일에 아내와 함께 펜리스와 컴블랜드 영지를 받았다. 네빌 가문은 에드워드 3세 통치 초기부터 퍼시 가문과 함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런 만큼 서로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퍼시 가문과 관련이 있는 컴벌랜드를 네빌 가문에 넘긴 것도 헨리가 불만을 품은 요소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399년 7월 리처드 2세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고, 얼마 전에 사망한 곤트의 존의 영지를 상속받지도 못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요크셔에 상륙했을 때, 헨리는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와 함께 제일 먼저 가담했다. 이때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돈캐스터에서 자신의 상속 재산, 즉 렝커스터 공국과 보훈의 영지를 반환받는 데 전념할 뿐이며, 다른 것은 노리지 않는다고 서약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이런 서약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며, 훗날 퍼시 가문이 헨리 4세를 가리켜 "위증에 의지한 찬탈자"라고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하고자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헨리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리처드 2세를 콘위 성으로 몰아붙였다. 이후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특사로 선임되어 콘위 성으로 가 리처드 2세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반란을 일으킨 걸 후회하며,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는 영지를 돌려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리처드 2세 본인이 지지자 5명과 함께 의회에 출두해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를 살해한 혐의에 대해 답변해야 하며, 왕실 재산은 유지될 거라고 덧붙였다. 리처드 2세는 다소 망설이다가 8월 14일에 성을 떠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플린트에서 리처드 2세를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넘겼고,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1399년 9월 29일, 리처드 2세는 갖은 압력에 굴복해 퇴위했다. 이후에 소집된 의회에서, 헨리는 세속 영주들에게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이 되는 데 동의하는지 물었고, 전임 국왕을 어찌 처리할 지를 안건에 올리기도 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헨리 4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그는 랭커스터 가문의 검을 들고 새 왕 옆에 서 있었다. 헨리 4세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한 그에게 많은 선물을 안겼다. 평생동안 잉글랜드 무관장을 역임할 수 있게 했으며, 10년간 서부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 선임했다.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도 10년간 동부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서의 직위를 유지했다. 여기에 맨 섬의 영주로 선임되었으며,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 판사를 포함해 북부 웨일스의 여러 직책을 부여받았다. 또한 헨리의 동생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는 잉글랜드 해군 제독에 선임되었다.

퍼시 가문의 지위는 헨리 4세의 재위 초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그들은 노섬벌랜드에 최소 5개, 요크셔에 8개, 컴벌랜드에 6개의 성을 소유했다.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전체 직함은 다음과 같았다.
"강대한 군주 헨리 퍼시, 노섬벌랜드 백작, 코커머스 경과 펫워스 경, 퍼시 남작, 포잉스, 피츠페인과 브라이언,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는 잉글랜드 동부 및 중부 국경의 호국경이자 가터 기사 훈장."

한편,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가 내전으로 혼란스럽고 퍼시 부자가 국경을 비운 틈을 타 1399년부터 1400년까지 잉글랜드 북부를 5번 습격했다. 이에 헨리 '핫스퍼' 퍼시가 1400년 3월에 스코틀랜드를 급습해 더글러스 가문의 영지를 약탈했고, 그해 8월 잉글랜드 왕실군이 본격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에딘버러를 점령했다. 그러나 적군의 지속적인 유격전에 시달리다가 식량이 고갈되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오와인 글린두르가 반란을 일으키자, 헨리 4세는 11월에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헨리 4세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402년 3월, 헨리 4세는 헨리 '핫스퍼' 퍼시를 대신해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을 록스버러 성의 수비대장으로 선임했다. 이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퍼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노섬벌랜드 백작과 그의 아들은 왕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국경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재정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서 수비가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헨리 4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전념하고 오와인 글린두르와 화해하기를 원했는데, 정작 헨리 4세가 반대로 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중 헨리 '핫스퍼' 퍼시의 처남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생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퍼시 가문이 모티머를 위해 몸값을 협상하려고 했을 때, 헨리 4세는 모티머가 오와인 글린두르와 내통해 패배를 초래한 혐의가 있다며, 몸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퍼시 가문과 모티머 가문의 헨리 4세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었다.

1402년 6월 22일, 조지 던바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헨리 4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네스빗 무어 전투에서 패트릭 햅번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해 사령관을 포함한 240명의 스코틀랜드인을 사살했다.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이를 복수하기 위해 9월에 잉글랜드 북부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총사령관을 맡고, 100명이 넘는 남작과 50명의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이 조성되었다. 당대 연대기에는 40,000명에 달한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7,000 ~ 10,000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헨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창병 12,000명과 궁수 7,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를 별다른 저항 없이 초토화한 뒤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호밀돈 언덕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 조지 던바, 랄프 드 그레이스토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가로막혔다. 1402년 9월 14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80명의 스코틀랜드 영주가 생포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사령관과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단 기사 10명만 잃었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북부 잉글랜드의 도시들에 보내졌다. 이때 헨리 4세는 포로가 된 스코틀랜드 남작들을 런던으로 이송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노섬벌랜드 백작이 답했다.
"그들은 왕의 포로가 아니라 백작의 포로입니다."

그러자 헨리 4세는 퍼시 가문이 포로들의 몸값을 받는 것을 금지했고, 이를 어길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노섬벌랜드 백작은 포로들을 돌려보냈지만, 더글러스 백작을 포로로 둔 그의 아들 헨리 '핫스퍼' 퍼시는 국왕의 요구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이에 헨리 4세가 연이어 질책하자, 퍼시 가문은 헨리 4세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2.7. 퍼시의 반란

1403년 6월 초,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에서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2]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게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글린두르의 포로로 있던 에드먼드 모티머[3]도 호응했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영주들도 자유를 얻는 대가로 그와 동맹을 맺었다.

1403년 7월 21일, 헨리 '핫스퍼' 퍼시와 그의 삼촌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 스코틀랜드군을 지휘한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4세에게 패배했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전사했고, 토머스 퍼시는 생포된 뒤 이틀 후 처형되었다. 더글러스 백작과 다른 스코틀랜드인들은 생포된 뒤 채찍형에 처해진 후 런던으로 호송되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는 군대를 일으킨 뒤 아들과 합세하려고 남하했지만, 도중에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이끄는 군대에 가로막혀서 아들과 합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슈루즈버리 전투 소식을 접하자 급히 워크워스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상황을 살핀 끝에 모든 게 틀렸다는 걸 깨닫고 남쪽으로 말을 타고 내려가 8월 8일 요크에서 헨리 4세에게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헨리 4세는 그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서의 직위를 박탈하고, 영지 일부를 몰수하며, 워크워스 성에 가택 연금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404년 2월 6일, 헨리는 왕실 의회에 출석한 뒤 헨리 4세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 뒤 사면을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복권을 이루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으로서의 직책은 영영 돌려받지 못했고, 잉글랜드 무관장 직책도 박탈당했다. 그리고 버윅 성, 제드버러 성과 제드버러 숲을 왕실에 넘겨야 했다. 여기에 안위크, 워크워스, 프라도, 랭글리 성에 왕실 수비대를 배치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다만 이 4개 성 주민들이 퍼시 가문에게만 충성을 바치겠다며 복종을 거부했기에, 실제로는 수비대가 배치되지 않았다.

이후 노섬벌랜드 백작은 헨리 4세에게 깊은 복수심을 품고, 오와인 글린두르와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반란을 모색했다. 1405년 2월, 그는 오와인 글린두르, 에드먼드 모티머와 삼자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오와인 글린두르는 웨일스 국왕이 되고, 에드먼드 모티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되며, 자신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 잉글랜드 원수 토머스 모브레이,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머스 바르돌프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

헨리는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1405년 5월 초 영지에 머물고 있을 때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랄프 네빌은 사전에 위험을 경고받고 탈출했다. 이후 반란군은 1405년 5월 29일 쉽턴 무어 전투에서 패배했고, 생포된 스크루프 대주교와 모브레이 원수는 처형되었다. 이후 랄프 네빌이 이끄는 왕실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퍼시는 바르톨프 남작 및 헨리 '핫스퍼' 퍼시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헨리 4세는 노섬벌랜드 백작 편에 섰던 몇몇 영주들의 머리를 참수한 뒤 요크 성벽에 전시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의회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의 모든 영지는 압수되었고, 그의 작위는 회수되었다.

2.8. 최후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 측에 망명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스코틀랜드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헨리를 잘 대접했다. 그러나 1406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파이프 백작 머독 스튜어트와 헨리를 교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자, 헨리는 그해 말 웨일스로 달아나 오와인 글린두르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헨리 4세를 타도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할 수 있도록 군대와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시기에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 파 간의 투쟁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1407년 말 잉글랜드로 몰래 돌아온 그는 요크셔의 보안관인 토머스 로크비에게 의지했다.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 바워에 따르면, 그는 헨리 4세와의 오랜 투쟁에 지쳐 자신이 사면을 받을 수 있도록 보안관의 도움을 받길 희망했다고 한다. 반면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그는 보안관을 음모에 끌어들이려 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동일하다. 1408년 2월, 그와 토머스 바르돌프는 퍼시 가문이 이전에 소유했던 요크셔의 태드캐스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2월 19일 또는 20일, 그들은 태드캐스터 인근의 브래햄 무어에서 요크셔 보안관 토머스 로크비의 지령을 받은 장병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두 사람의 머리는 베어져 런던 브리지에 공개 전시되었고, 몸통은 4등분 되었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수집된 뒤 요크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앨리스 페러즈사생아인 존 드 사우더리의 아내.[2]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3] 퍼시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내세운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