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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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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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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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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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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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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5대 국왕
에드워드 1세
Edward I
<nopad> 파일:에드워드 1세(웨스트민스터 사원).jpg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려진 초상화(추정)[1]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에드워드 1세
(Edward I)
출생 1239년 6월 17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사망 1307년 7월 7일 (향년 68세)
잉글랜드 왕국 컴벌랜드 브러프 바이 샌즈[2]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272년 11월 20일 ~ 1307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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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배우자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1254년 결혼 / 1290년 사망)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1299년 결혼)
자녀 헨리, 엘리너, 조앤, 알폰소, 마거릿,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2세, 토머스, 에드먼드
아버지 헨리 3세
어머니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형제 마거릿, 베아트리스, 에드먼드, 캐서린
종교 가톨릭
문장 파일:잉글랜드 국장(-1340).svg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아버지와의 대립과 화해2.3. 제2차 남작 전쟁2.4. 십자군 원정2.5.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치세
2.5.1. 내치
2.5.1.1. 행정 및 법률 정책2.5.1.2. 재정 관리2.5.1.3. 유대인 추방령
2.5.2. 외치
2.5.2.1. 웨일스 정복 전쟁2.5.2.2. 외교 정책과 프랑스와의 전쟁2.5.2.3. 1297년 위기2.5.2.4.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
2.5.2.4.1. 스코틀랜드 왕위 분쟁과 에드워드 1세의 개입2.5.2.4.2. 1296년 스코틀랜드 원정2.5.2.4.3.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의 봉기2.5.2.4.4. 1298년 스코틀랜드 원정2.5.2.4.5. 1299년 스코틀랜드 원정2.5.2.4.6. 1300년 스코틀랜드 원정2.5.2.4.7. 1301년 스코틀랜드 원정2.5.2.4.8. 1303~1304년 스코틀랜드 원정2.5.2.4.9. 전쟁 수습과 로버트 브루스의 반란2.5.2.4.10. 로버트 1세의 끈질긴 투쟁과 에드워드 1세의 죽음
3. 평가4. 가족 관계
4.1. 자녀
5. 여담6. 대중매체에서7. 같이보기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인 헨리 3세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로, 잉글랜드 중앙집권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의회를 창설하여 그 기초를 닦은 명군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 치세 때 잉글랜드에게 침략당한 웨일스스코틀랜드에서는 잔혹한 침략자이며 학살자라는 악평을 받는다.

2. 생애

2.1. 초년기

1239년 6월 17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앵글로색슨족의 이름인 '에드워드'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래 잉글랜드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헨리 3세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참회왕 에드워드를 본따서 장남의 이름을 지었다. 헨리 3세는 아들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축하 행사를 열었고,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기부하면서 하느님이 어린 아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아기 에드워드는 3일 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 에드워드는 병약한 아이었다. 왕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246년, 1247년, 1251년에 중병에 걸려 며칠간 앓아누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힘 세고 운동 신경이 좋고,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키는 6피트 2인치(188cm)에 달했는데,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들보다 키가 컸다. 그래서 그는 '롱생크스'(Longshanks: 긴 다리 또는 긴 정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에드워드의 양육에 대한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장남으로서 군사 기술을 포함한 고급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1254년, 헨리 3세는 잉글랜드가 점유한 가스코뉴 지방을 노리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15세가 된 장남 에드워드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이복 누이인 13세의 레오노르 사이의 결혼을 주선했다. 두 사람은 1254년 11월 1일 카스티야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에서 결혼했다. 이후 에드워드는 1년에 15,000 마크 상당의 수입을 내는 토지를 받았다. 1279년 레오노르가 퐁티외를 상속받으면서, 잉글랜드 왕실은 퐁티외를 확보했다. 한편, 헨리 3세는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 아일랜드 영지, 웨일스 변경지대와 체스터 백작령을 포함한 잉글랜드의 상당한 영지를 수여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기 영지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펼치지 못했다. 아버지 헨리 3세가 그의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으며, 그 땅에서 나오는 수입 대부분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일랜드 영지는 1254년에서 1272년 사이에 보안관 11명이 잇달아 부임하면서 주민들을 수탈하고 부정부패를 저질렀기에 민심이 흉흉했고, 현지 게일인들의 꾸준한 반란과 습격으로 통제가 잘 되지 않았다. 가스코뉴 역시 제6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1253년 왕실의 부관으로 선임된 뒤 그곳을 다스리면서 수입을 온전히 가졌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가스코뉴에서도 별다른 통치를 하지 못했고 수입도 얻지 못했다. 1254년 11월 말, 에드워드는 아내 레오노르와 함께 가스코뉴에 입성했을 때 대중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헌장을 발표하면서, 자신을 "가스코뉴를 통치하는 군주"라고 칭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그가 독자적으로 자기 영지를 다스리고 싶은 열망을 드러내는 첫번째 순간이라고 본다.

2.2. 아버지와의 대립과 화해

에드워드는 초기엔 사보이아 백국 출신인 모계 친척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특히 어머니의 삼촌인 피에트로 2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1257년 이후에는 푸아투에서 잉글랜드로 건너온 뤼지냥 가문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특히 아버지의 이부 형제인 기욤 드 발랑스와 친밀하게 지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뤼지냥 가문 인사들의 어수룩하고 급한 성격을 물려받았고, 많은 이들은 에드워드의 인격적 자질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1255년 초부터 정계에서 독립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스코뉴에서 발생한 솔레르 가문과 콜롬 가문 간의 대립에서 솔레르 가문의 편에 섰다. 이는 귀족들과의 분쟁에서 가급적 중립을 지키려 애썼던 아버지 헨리 3세의 의중과 어긋나는 행보였다. 1258년 4월, 시몽 드 몽포르, 로저 비고드, 존 피츠조프리, 피에르 드 몽포르, 피에트로 2세, 리처드 드 클레어 등 대영주 7명이 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뤼지냥 가문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헨리 3세는 이들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왕실의 재정 지출과 인사 정책 등을 개혁하는 위원회 설치를 규정한, 소위 <옥스퍼드 조례>에 서명했다.

이때 에드워드는 뤼지냥 가문의 편에 서서 옥스퍼드 조례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뤼지냥 가문의 영향력은 축소되었고, 에드워드는 정치적 입장을 점차 바꿨다. 1259년 3월, 에드워드는 개혁을 주장한 주요 귀족 중 한 명인 제6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와 동맹을 맺었다. 1259년 10월 15일, 에드워드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시몽 드 몽포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는 이를 통해 시몽의 호의를 얻음으로써 가스코뉴에서의 수입을 받고 통치를 행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259년 11월 헨리 3세가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에드워드는 가스코뉴에서 공공연히 아버지에게 불복종했다. 그는 개혁을 주장한 귀족들과 여러 차례 회동을 가졌고, 그들의 대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헨리 3세는 아들이 자기를 폐위하고 왕이 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아들과 만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콘월의 리처드와 캔터베리 대주교 보니파시오의 설득으로, 두 부자는 화해하기로 했다.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잉글랜드로 돌아갔을 때 프랑스에 그대로 남았고, 1260년 11월 프랑스로 추방된 뤼지냥 가문과 다시 연합했다.

1262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는 재정 문제로 인해 뤼지냥 가문과 사이가 틀어졌다. 이듬해, 헨리 3세는 웨일스 대공 허월린 압 그루퍼드를 상대로 원정을 떠났다. 이때 에드워드는 분견대를 이끌고 웨일스 북부로 진군했지만, 산지에 숨어서 유격전으로 일관하는 적을 상대로 제한적인 성과만 거두었다. 이후 1261년 헨리 3세와 갈등을 벌인 끝에 프랑스로 망명했던 시몽 드 몽포르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귀족 개혁 운동을 다시 일으켰다. 시몽은 옥스퍼드에서 왕실에 대항하는 귀족 의회를 소집한 후 푸아투 인사를 추방하는 안건을 제시했다.

헨리 3세가 받아들이지 않자, 시몽 드 몽포르는 왕이 푸아투 출신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국정을 잘못 이끌었으니,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선언하고,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등 급진파 인사들과 함께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1263년 7월 15일, 시몽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고,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 왕비는 억류되었다. 이에 에드워드는 왕실을 겁박하는 시몽에게 반감을 품고,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시몽과 단호히 맞섰다. 그는 윈저에 군대를 주둔해 시몽을 따르는 귀족 사병대와 대치했으며,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워렌, 알메인의 헨리를 비롯한 여러 인사와 동맹을 맺었다.

2.3. 제2차 남작 전쟁

1264년, 헨리 3세와 시몽 등 급진파 귀족들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다. 그 해 2월,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아들 앙리시몽이 웨일스 변경지대에 있는 왕당파 귀족 로저 모티머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당시 파리에서 루이 9세와 회담을 가졌던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 소식을 접하자 엘레오노르 왕비를 파리에 남겨둬서 용병 지원군을 추가로 모집하게 한 뒤, 본인은 잉글랜드로 급히 귀환했다. 이후 4월 3일 옥스퍼드에 왕의 깃발을 계양한 뒤 부하들을 소집했는데, 에드워드 왕자도 여기에 가담했다.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왕실군은 노샘프턴으로 진군하여 4월 5일 노샘프턴 공방전을 하룻동안 치른 끝에 함락하고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인 소 시몽 드 몽포르를 생포했다. 헨리 3세는 노샘프턴을 공략한 뒤 프랑스로 가는 잉글랜드 남동부의 5개 항구를 점거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진군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우스터, 런던, 캔터베리 및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후 로체스터 성을 포위했지만 8일 만에 왕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1264년 5월 초, 헨리 3세의 군대는 서식스의 루이스에 도착한 뒤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국왕은 보병대와 함께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고,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500야드(460m) 떨어진 루이스 성에서 기병대와 함께 휴식을 취했다. 얼마 후 시몽 드 몽포르가 사절을 보내 옥스퍼드 조례를 왕에게 좀더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할 의사가 있으니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헨리 3세는 시몽의 반역을 용납할 수 없다고 봤기에 거부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런던에서 파견한 시민 의용대와 합세한 뒤 왕과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1264년 5월 14일, 잉글랜드 왕실군과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 의회파는 루이스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때 에드워드 왕자는 왕실 기병대를 이끌고, 적군 좌익 기병대를 향해 강력한 돌격을 가해 패주시켰다. 이후 런던 의용병 부대가 앞을 가로막자, 그는 지난해에 어머니가 런던에서 자기와 만나려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런던 시민들에게 추격당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던 일 때문에 그들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다. 그는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런던 의용병대를 몰아붙였고, 런던 의용병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전장에서 달아났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들을 몰살시키기로 작정하고, 3마일이나 추격하여 런던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후 전장으로 돌아오다가 반군이 후방에 쌓아놓은 짐과 수레를 약탈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는 사이, 반란군 중앙과 우익부대는 몇 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왕실군의 중앙과 좌익부대를 완전히 제압했고, 헨리 3세, 콘월의 리처드 등 주요 인사들이 생포되었다. 뒤늦게 전장으로 돌아온 에드워드 왕자는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에게 에워싸이고 병사들이 대거 달아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이후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협의한 끝에 루이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사면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복원해야 했으며, 왕으로서 군림하는 걸 보장받는 대가로 에드워드 왕자가 시몽 드 몽포르의 인질이 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에드워드는 1265년 3월까지 성채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1265년 3월 31일, 웨스트민스터 홀에 열린 의회에 출석해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협의한 끝에 루이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사면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복원해야 했으며, 왕으로서 군림하는 걸 보장받는 대가로 에드워드 왕자가 시몽 드 몽포르의 인질이 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석방되기는 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 부하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1265년 4월, 시몽 드 몽포르의 동지였던 길버트 드 클레어가 권력을 독점하는 시몽에게 반감을 품고 잉글랜드-웨일스 국경지대에서 반기를 들었고, 서리 백작 존 드 워렌과 펨브로크 백작 기욤 드 발랑스가 즉각 가담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에게 동맹을 제의했고, 허웰린은 웨일스 대공이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고, 군사적으로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는 대가로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그해 5월 28일, 케닐워스에서 인질로 지내던 에드워드 왕자는 말을 훈련시겠다는 핑계를 대고 헤리퍼드로 갔다가 도중에 말을 급히 몰아서 호위병의 추격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위그모어 성으로 가서 그곳의 성주인 로저 모티머의 영접을 받았다.

그 후 에드워드 왕자는 글로스터 백작이 이끄는 군대와 합류했고, 체셔와 헤리퍼드셔 귀족들은 에드워드 왕자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세번 강의 모든 교차로를 재빨리 확보해, 시몽 드 몽포르가 헤리퍼드셔로 쳐들어오는 길목을 틀어막았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군대를 이끌고 뉴포트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브리스톨에서 파견한 함대를 타고 세번 강 어귀를 건너서 에드워드 왕자와 대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 배들은 글로스터에서 파견된 왕실 함대에 의해 침몰했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헤리퍼드로 진군해 1265년 7월 말에 도착했다.

이 무렵,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도 잉글랜드 남부와 중부 전역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뒤 워릭 인근의 케닐워스 성으로 진군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 소식을 접하자 우스터에 군대를 집결한 뒤 1265년 8월 1일 이름 아침 케닐워스로 진군했다. 시몽의 군대는 곧 에드워드 왕자를 따르는 부하들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유력 귀족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왕실군은 주요 반군 지도자들의 군기를 확보했고, 이제 막 케닐워스에 도착했던 반군의 물자 운송용 수레들을 탈취했다. 시몽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케닐워스 성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가 케닐워스에서 성공을 거둔 후 우스터로 돌아올 때, 시몽 드 몽포르는 세번 강 건널목을 지키는 적 경비병이 더 이상 없다는 걸 눈치채고 우스터에서 남쪽으로 4마일 떨어진 켐프 시 교두보를 건넌 뒤 케닐워스에서 아들이 모은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1265년 8월 3일 이브샴으로 진군했다. 같은 날 저녁, 에드워드 왕자는 우스터에 도착했다가 시몽 드 몽포르가 이브샴으로 향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출진해 밤새도록 행군한 끝에 이브샴에서 케닐워스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 에드워드 왕자는 이브샴을 향해 에이번 강을 따라 곧장 진군했고, 길버트 드 클레어는 분견대를 이끌고 에이번 강을 건넌 뒤 에드워드 왕자와 평행하게 진군했다. 그리고 로저 모티머는 에이번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내려가서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 후방으로 은밀히 진군했다.

이후 벌어진 이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의 군대가 완승을 거두었고 시몽 드 몽포르는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많은 기사들에게 공격받아 머리, 손, 발, 고환이 잘려나갔다. 한편,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진영에 인질로 끌려왔다가, 전투가 끝난 뒤 진영을 약탈하는 에드워드 측 병사들과 마주쳤다. 그는 빌린 갑옷을 입고 있다가 하마터면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에드워드의 장병들에게 사살될 뻔했지만, 그를 감시하던 반군 측 기사 로저 드 레이본이 그의 정체를 밝힌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에드워드 왕자 앞으로 모셔졌다.

에드워드는 이후에도 반란 잔당 토벌에 협력했다. 1265년 크리스마스에 링컨셔의 엑스홀름 성에서 소 시몽 드 몽포르와 그의 추종자들과 평화 협상했고, 1266년 3월에는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일부 반군은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케닐워스 성에 농성했고, 에드워드는 왕실군이 케닐워스 공방전을 벌일 때 참여했다. 1266년 12월 13일 케닐워스 공방전이 종결되면서 내전이 마무리된 뒤, 에드워드는 신체적으로 허약해진 아버지 헨리 3세를 대신해 국정을 다스렸다.

2.4. 십자군 원정

1268년 6월 24일, 에드워드는 동생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와 사촌인 알메인의 헨리와 함께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십자군에 참가한다고 선언했다. 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은 일명 '제8차 십자군'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십자군은 원정 비용 마련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좀처럼 개시되지 않았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17,500 파운드의 대출금을 제공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잉글랜드 백성들에게 부과한 세금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1270년 5월, 의회는 동산의 20분의 1에 해당하는 세금을 승인했고, 헨리 3세는 이에 대한 대가로 마그나 카르타를 확정하고 유대인이 제공하는 대출에 제한을 가하는 걸 받아들였다.

1270년 8월 20일, 에드워드는 도버에서 프랑스로 항해해 루이 9세와 합류했다. 그가 이끌고 간 군대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략 1,000명도 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십자군은 포위된 기독교 거점인 아크레를 구원할 계획이었지만, 루이 9세와 그의 동생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카를루 1세는 북아프리카에 전초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튀니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튀니지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전염병에 시달렸고, 루이 9세는 전염병에 걸려 8월 25일 병사했다. 에드워드는 며칠 후 튀니지에 도착했지만, 카를루 1세는 이미 튀니지의 에미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에드워드는 혼자서 성지를 향해 가기로 마음먹고, 1271년 5월 9일 아크레에 상륙했다.

에드워드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크레에 도착했을 당시, 아크레는 바이바르스의 지휘하에 몰려오는 맘루크 왕조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장병들을 이끌고 적군의 습격을 막아내는 데 일조했지만, 군세가 미약했기에 바이바르스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하면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이에 아크레 측은 일 칸국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일 칸국은 알레포를 공격해 바이바르스 군대의 주의를 돌리는 데 도움을 줬다. 1271년 11월, 에드워드는 카쿤에 대한 약탈전을 개시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거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러나 바이바르스가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상황은 악화했고, 명목상 예루살렘의 왕을 겸임한 키프로스 국왕 위그 3세는 바이바르스와 10년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

에드워드는 휴전 협약을 무시하고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1272년 6월 아사신이 파견한 암살자의 습격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암살자를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암살자가 휘두른 독이 묻은 단검에 팔에 상처를 입었고, 이로 인해 몇 달 동안 중병을 않았다. 그 후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9월 24일 아크레를 떠났고, 시칠리아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아버지가 그 해 11월 16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지만,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대신 북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의 건강은 여전히 허약했고,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은 제2차 남작 전쟁 이후 로버트 버넬이 이끄는 왕립 의회의 관리하에 안정을 유지했기 때문에, 서둘러야 할 필요성은 없었다. 에드워드는 로마에 들러 교황을 알현했고, 뒤이어 가스코뉴로 가서 소규모 반란을 진압한 뒤, 1274년 8월 2일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했고, 1274년 8월 19일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2.5.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치세

2.5.1. 내치

2.5.1.1. 행정 및 법률 정책
에드워드 1세는 대관식을 마무리한 직후 행정 업무에 착수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나라에 닥친 내전 이후 질서와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행정 직원에 대한 광범위한 변경을 시작했는데, 가장 중요한 조치는 로버트 버넬을 법무장관으로 선임한 것이었다. 버넬은 1292년까지 이 직책을 맡으면서, 왕의 중요한 고문으로서 활약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보안관과 세금 징수관 등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를 철저히 조사해, 문제가 있는 자들을 모조리 교체했다.

한편, 그는 '백서(Hundred Rolls)'라고 불리는 일련의 인구 조사 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이것은 윌리엄 1세가 반포했던 둠즈데이 북과 유사하며, 나중에 '특권 보증 절차'(Quo warranto)로 불리는 법적 조사의 기초를 형성했다. 이 법적 조사의 목적은 현지 귀족이 누리는 특권이 왕실의 승인을 받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만약 귀족이 특권 부여를 증명할 왕실 허가서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에드워드 1세는 그동안 그가 누렸던 특권을 몰수했다. 이후 1275년 웨스트민스터 법령이 반포되었고, 1285년에 웨스트민스터 법령이 재차 반포되었는데, 두 법령 모두 잉글랜드의 기존 법률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1278년, 에드워드 1세는 글로스터 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령은 왕실 판사가 전국을 순회하는 제도를 부활시키고, 이러한 법률에서 심리하는 '특권 보증 절차' 건수를 크게 늘려서 영주의 권력을 억눌렀다.

에드워드 1세의 이러한 정책에, 많은 대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왕실 허가서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특권을 장기간 누렸다면 그것 자체로 왕실의 인가를 받은 거라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런 그들과 장기간 대립하다가, 1290년 타협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1189년 리처드 1세의 대관식 이후로 행사된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한,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을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다만 귀족들이 누리는 모든 특권은 왕실의 용인하에 이뤄진다는 원칙을 확립해, 귀족들이 왕실을 감히 거역할 엄두를 못 내도록 했다.

에드워드 1세 치세에서, 로버트 버넬의 주도하에 여러 법률이 반포되었다. 1275년에 반포된 웨스트민스터 법령은 왕의 특권을 주장하고 자유에 대한 제한을 명확히 규정했다. 1279년에 반포된 모르트메인 법령은 교회에 대한 토지 보조금 문제를 다뤘다. 1285년에 반포된 웨스트민스터 법령은 영주가 상속인에게 영지를 넘길 때의 규칙을 정했다. 이에 따르면, 영주가 상속인에게 토지를 증여할 때 증여서에 명시된 영주의 의지를 따라야 하며, 증여받은 자는 다른 방식으로 토지를 처분할 수 없었다. 또한 증여받은 사람이 사망한 후, 토지는 그의 상속인에게 상속되며, 상속인이 없는 경우 증여자 또는 증여자의 상속인에게 상속되었다. 이 법률이 통과된 후, 영주와 그의 상속인에게 주어진 재산은 '꼬리 재산'(feudum talliatum)으로 알려졌으며, 이때부터 장남이 상속권을 독차지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1285년에 반포된 상인법은 채무 회수에 대한 확고한 규칙을 수립했고, 같은 해 제정된 윈체스터법은 기존 경찰 시스템을 강화해 안보와 평화 유지를 굳건히 했다. 1290년에 제정된 '콰이아 애프트로스'(Quia Emptores)는 영주 아래에 있는 소작인들이 자신의 토지 일부를 재임대하거나 양도함으로써 새로운 소유권을 획득하는 관행을 엄격히 단속했다. 이렇듯 에드워드 1세 치세에 숱하게 반포된 법률 제정은 1292년 로버트 버넬이 사망한 후 중단되었다.
2.5.1.2. 재정 관리
1279년, 에드워드 1세는 새 주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했다. 새 주화는 이미 유통되고 있던 주화에 비해 품질이 훨씬 우수했고, 이를 통해 주화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개선되었다. 주화 제조 공정 시스템도 개선되었다. 주화 제작자 윌리엄 터네마이어는 은막대에서 빈 주화를 잘라내는 새로운 주화 주조 방법을 도입했는데, 이는 시트에서 주화를 찍어내는 오래된 관행과 대조적이었으며 매우 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제 주화 제작자의 이름이 적힌 주화를 주조하는 관행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오직 왕의 이름과 칭호만 주화에 새겨졌다.

1280년 8월, 에드워드 1세는 오래된 긴 십자가 주화 사용을 금지했고, 대중은 이로 인해 새로 주조된 주화로 바꿔야 했다. 에드워드 1세 치세에 발행된 주화에는 앞면에 라틴어로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 왕이 된 에드워드"가 적혔고, 뒷면에는 십자가 문양과 "아키텐 공작이자 아일랜드 군주", "런던에서 제작"이라는 텍스트가 새겨졌다. 그의 치세에 발행된 잉글랜드 동전은 유럽 대륙, 특히 저지대 국가에서 자주 위조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막기 위해 1283년 위조 금지령을 반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의 통화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잉글랜드는 안정적인 통화 체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가 군사 원정을 자주 벌이면서, 국가에 큰 재정적 부담을 안겼다. 국왕이 전쟁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에는 관세, 대출, 세금 등이 있었다.평신도 보조금은 그러한 자산을 소유한 모든 평신도의 동산의 일정 비율로 징수되는 세금이었다. 1275년 에드워드는 영국의 주요 수출품인 양모에 대한 영구 관세를 확보하는 국내 상인 커뮤니티와 협정을 협상했다. 1303년 외국 상인들과도 특정한 권리를수여하는 대가로 비슷한 협정을 맺었다.

관세 수입은 이탈리아 루카의 은행가 그룹인 리카르디 가문이 처리했다. 이는 웨일스와의 전쟁에 자금을 지원해 준 것에 대한 대가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발발했을 떄, 프랑스 왕국은 리카르디 가문의 자산을 몰수했고, 은행은 파산했다. 이후 피렌체의 프레스코발디 가문이 잉글랜드 왕실의 대금업자 역할을 맡았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아내 레오노르가 독자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재정적 압박을 줠이려고 노력했다.

에드워드 1세가 전쟁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단연 세금이었고, 이걸 걷기 위해서는 의회를 열어야 했다. 그래서 에드워드 1세는 통치 기간 내내 의회를 정기적으로 열었다. 1295년, 의회 제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해에 열린 의회에서는 세속 및 교회 영주와 함께 각 주에서 2명의 기사를 뽑고, 각 자치구에서 2명의 평민 대표가 소집되었다. 의회에 평민이 출석한 건 시몽 드 몽포르가 1265년 의회를 소집할 때부터 이미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전까지는 평민 대표들이 귀족 대표가 내린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했지만, 이제는 지역 사회의 전적인 권한을 토대로 독자적으로 의회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렇듯 평민 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준 대가로, 평민들로부터 세금을 직접 거둬들였다. 이 방식은 후대 의회의 표준이 되었고, 역사가들은 이 의회를 '모범 의회'라고 명명했다.
2.5.1.3. 유대인 추방령
유대인은 기독교도와 달리 왕실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귀족 및 평민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줬을 때 이자를 부과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재산은 왕의 개인 재산으로 간주되었고, 왕은 그들에게 원하는 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면서, 유대인들은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빌려줬던 돈과 이자를 악착같이 받아내려 했다. 귀족들은 빚을 갚기 위해 상당한 영지를 헐값에 매각해야 했다. 헨리 3세는 이를 이용해 빚진 지주에게서 광대한 토지를 받아낸 뒤, 궁정 신하와 왕비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에게 이전해서, 대귀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반란 지도자 시몽 드 몽포르는 앞장서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1275년, 에드워드 1세는 의회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유대인 법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더 이상 대출에 이자를 붙일 수 없었으며, 대출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갖도록 장려했다. 1279년, 에드워드 1세는 주화 위조범에 대한 단속을 구실로 잉글랜드 내 모든 유대인 가정의 가장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체포된 유대인 300명이 처형되었고, 다른 이들은 벌금을 납부했다. 이때 모인 자금은 16,000 파운드에 달했다. 1280년, 에드워드 1세는 모든 유대인에게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의 특별 설교에 참석해 개종하라고 명령했지만, 유대인들은 이에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1290년, 에드워드 1세는 공식적으로 모든 유대인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한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이주해야 했는데, 일부는 해적에게 납치었고, 많은 이들은 10월 폭풍으로 인해 재산을 잃거나 사망했다. 왕실은 그들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한 뒤, 궁정 신하와 가족에게 대거 나눠줬다. 이 칙령은 의회로부터 11만 파운드에 달하는 세금을 받기 위한 거래의 일환으로 반포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은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추방령을 내렸다고 주장했으며, 성 리틀 휴의 무덤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잉글랜드인들의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유대인 추방 자체는 일시적이고 지역적으로 국한되었지만, 추방령 자체는 1650년대에 올리버 크롬웰이 폐지할 때까지 쭉 이어졌다.

2.5.2. 외치

2.5.2.1. 웨일스 정복 전쟁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제2차 남작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1267년 몽고메리 조약에 따라, 그는 자신이 남작 전쟁 동안 정복했던 동부 귀네드의 4개 주를 공식적으로 소유했으며, 헨리 3세로부터 웨일스 대공 칭호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초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 제3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등 허웰린에게 영지를 빼앗긴 여러 웨일스 국경 영주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고, 허웰린은 이들과 무력 충돌을 여러 번 벌어졌다.

그러던 1274년, 허웰린의 남동생 데이비드 압 그루퍼드와 포이스의 그루퍼드 압 그웬윈윈이 허웰린을 처단한 뒤 허웰린과 분쟁을 벌이던 귀조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허웰린은 에드워드 1세에게 두 사람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더 이상 에드워드 1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1세 역시 지난날 시몽 드 몽포르와 손잡고 자신에게 대적했던 그를 손봐주고 싶어 했기에, 허웰린이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걸 빌미 삼아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1277년 7월, 에드워드 1세는 15,5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웨일스로 진군했다.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콘위 강에 도착해 데간위에 진을 쳤고, 다른 분견대는 비옥한 앵글시를 점령하고 허웰린 군대의 모든 보급품을 빼앗았다. 허웰린은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잉글랜드군에 대적할 엄두를 못내고 항복 의사를 밝혔다. 1277년 1월, 에버콘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허웰린은 서부 귀네드 영지만 가지고 나머지는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줘야 했다. 다만 웨일스 대공이라는 칭호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정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압 그루퍼드는 에드워드 1세로부터 받은 보상이 형편없다고 여기고 불만을 품었고, 웨일스 주민들 역시 잉글랜드 법령을 자기들에게 부과하고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세금을 강압적으로 걷는 에드워드 1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준비했다.

1282년, 데이비드 압 그루퍼드가 반란을 일으켰고, 허웰린과 다른 웨일스 지도자들이 그에게 가담했다. 그 해 6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란데일로 포르 전투에서 반군에게 패배했다. 11월 6일 캔터베리 대주교 존 패컴이 웨일스 반군과 잉글랜드군간의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 이때 앵글시의 사령관 루크 드 타니는 기습 공격을 가해 반군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의 군대는 폰툰 교를 건설한 뒤 웨일스로 깊숙이 진군했지만, 모일리돈 전투에서 웨일스군의 매복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이로 인해 평화 협상은 깨졌다. 허웰린은 데이비드에게 귀네드의 방어를 맡긴 뒤,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해 웨일스 중부와 남부에서 반란을 조장하고 2번째 전선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빌스웰스 근처에서 현지군의 함정에 걸려 죽었다. 이후 에드워드 1세가 급파한 토벌대와 현지 영주들의 반격으로 웨일스 반군은 빠르게 붕괴되었고, 데이비드는 1283년 6월 체포된 뒤 슈루즈베리로 이송된 후 이듬해 가을에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1287~1288년 웨일스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지만 현지군에게 진압되었다. 1294년, 허웰린 압 그루퍼드의 먼 친척인 머독 압 허웰린의 지휘하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웨일스 대부분이 반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당시 프랑스에서 군사 원정을 떠났던 에드워드 1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급히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웨일스를 탈환할 준비에 착수했다. 머독 압 허웰린은 1295년 3월 5일 메이스 모이도그 전투에서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에게 참패해 대다수 병력을 잃은 뒤 여기저기를 숨어 지내다가, 그 해 7월 말 또는 8월 초 난나우의 지주 이니르 피찬에게 체포되어 런던으로 보내진 뒤 1312년 사망할 때까지 런던 탑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리하여 웨일스 전역이 잉글랜드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를 정복한 뒤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가졌던 모든 영지를 잉글랜드 왕실 직할지로 삼았고, 웨일스에 잉글랜드인을 대거 이주시켰다. 플린트, 에버리스위스, 러들란 등 새로운 도시가 잇달아 건설되었고, 베아이마리스, 카이르나르본, 코누이, 하를레흐 등 여러 성들이 건설되었다. 에드워드 1세의 장남 에드워드(후에 에드워드 2세)는 웨일스에 있는 카나번 성에서 태어났고, 1301년 웨일스 공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웨일스에 잉글랜드와 유사한 행정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지역의 질서는 보안관에 의해 유지되었다. 웨일스인들은 일부 재산 분쟁을 자체 법률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지만, 형사 사건의 경우에는 잉글랜드 법률에 따라야 했다.
2.5.2.2. 외교 정책과 프랑스와의 전쟁
에드워드 1세는 국왕이 된 뒤에도 십자군을 다시 감행하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이 십자군에 뛰어들려면 주변의 유럽 국가들이 평화를 유지해서 잉글랜드에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여기고, 아라곤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 이래로 서로를 적대하고 전쟁을 벌이는 걸 어떻게든 중재하려 애썼다. 1284년 6월 나폴리 해전에서 패배한 뒤 시칠리아에서 포로 생활 하던 카를로 2세가 1287년 7월에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3세와 울모른 조약을 체결하고 풀려날 수 있도록 중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만종 전쟁은 지속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1287년 십자가 서약을 재차 했지만 주변 정세가 불안정해서 쉽사리 감행하지 못했다.

1287년, 에드워드 1세는 일 칸국아바카 칸이 보낸 사절단과 접견했다. 1289년과 1290년에도 사절단이 찾아왔는데, 그들은 십자군과 힘을 합쳐 맘루크 왕조를 협공할 의사가 있으며, 말을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에드워드 1세는 사절들을 융숭하게 대접했고, 교황의 승인을 받는 즉시 시리아로 진군할 의사를 표명했다. 에드워드 1세가 재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는 일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 1세가 젊은 시절 십자군을 떠났을 때 동행했던 기사 랭글리의 제프리가 사절로서 일 칸국으로 파견된 것을 볼 때, 그가 일 칸국과의 동맹을 진지하게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1291년, 맘루크 왕조가 시리아의 마지막 기독교 거점인 아크레를 점령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십자군을 단념하고 가스코뉴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129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 가스코뉴, 프랑스 선원들간의 갈등이 벌어진 끝에 프랑스 함선 여러 척이 나포되고 프랑스 항구 도시 라 로셸이 약탈당한 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에드워드 1세를 파리로 소환했다. 에드워드 1세가 출두하지 않자, 필리프 4세는 불순종한 봉신을 응징하겠다며 가스코뉴 몰수를 선언했다.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의 압력에 맞서 가스코뉴로 원정을 떠나 프랑스군에 맞서면서, 플란데런 백국독일왕 아돌프, 프랑슈콩테 남작, 브라반트 공작, 바르르뒤크 백작과 손잡고 그들이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도록 유도했다. 연합군은 샹파뉴, 부르고뉴, 가스코뉴, 툴루즈 일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아돌프는 직접 개입하기를 거부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쁜 사이, 필리프 4세는 가스코뉴의 중심지 보르도를 공략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97년 플란데런 백국으로 가서 아돌프의 군대와 연합한 뒤 파리로 진군해 필리프 4세와 일전을 벌이려 했지만, 아돌프가 합류하지 않는데다 스코틀랜드에서 윌리엄 월레스 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해 10월 프랑스와 휴전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1298년 3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슈콩테 남작과 군사 동맹을 갱신해 전쟁을 지속하려 했다. 이는 필리프 4세의 주의를 돌려서 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걸 막으려는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1299년, 에드워드 1세와 필리프 4세는 몽트뢰유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와 재혼하기로 했고, 필리프 4세는 그녀의 지참금으로서 1294년 가스코뉴와 함께 압수되었던 퐁티외 백작령을 반환하기로 했다. 이로써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가스코뉴는 130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반환되지 않았다.
2.5.2.3. 1297년 위기
1290년대에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프랑스,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잇달아 벌이면서, 귀족들이 왕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헌납하라는 요구를 반복적으로 받아야 했다. 1294년까지 왕은 3가지 세금만 부과할 수 있었지만, 1294년에서 1297년 사이에 양모세를 비롯한 4개의 특별세가 도입되어 200,000 파운드가 거둬졌다. 1294년, 에드워드 1세는 모든 교회 이익의 절반을 요구했다. 이에 성직자들이 반발하자, 왕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불법화하겠다고 위협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는 왕의 압박에 못이겨 그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1296년 교황으로부터 사제들이 세속 당국에 돈을 지불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령을 받자, 이에 따라 더 이상의 지불을 거부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성직자들을 불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윈첼시는 왕에 대한 충성 유지와 교황 칙서 이행 사이의 갈등에 직면하자 고심 끝에 사제들의 재량에 맡겨서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지불하도록 했다. 그 해 말, 교황청은 잉글랜드 왕실과 갈등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여기고, "긴급한 필요성이 있을 경우 세속 당국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한느 걸 허락하기로 했다.

이렇듯 군자금 마련 문제로 많은 반발이 일었지만, 가장 큰 위기는 1297년에 발발했다. 그 해 2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가스코뉴 침략에 대응하고자 솔즈베리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귀족들을 가스코뉴로 파견하려 했다. 그러자 제5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가 다른 귀족들과 함께 왕 아래에서만 군 복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으며,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대귀족을 가스코뉴에서 복무하도록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가 윽박질렀다.
"백작! 신의 이름으로, 당신은 가야 하오. 안 그러면 교수형에 처하겠소!"

그러자 로저가 답했다.
"그렇지만 폐하. 소신은 가지도 않을 것이며, 교수형도 당하지 않겠습니다!"

그 후 로저는 제3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등과 함께 웨일스의 영지로 은퇴한 뒤 의회를 따로 열면서, 다른 여러 귀족과 동맹을 협상했다. 그들이 왕의 소집령을 무시하자, 에드워드 1세는 그들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로저 등은 왕이 마그나 카르타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군사적 목적을 위한 특별세를 납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들은 가신들의 승인 없이 군주가 세금을 인상하고, 높은 세금과 위임장을 도입하고, 연 소득이 20파운드 미만인 지주들을 군대에 징집하는 것에 항의했다. 이제 에드워드 1세와 로저를 비롯한 대귀족 간의 내전이 임박한 듯 했다.

그러던 중 윌리엄 월레스 등이 스코틀랜드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현지 잉글랜드군이 참패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이 급격하게 흔들리자, 에드워드 1세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하기로 했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와 삼림헌장[3]을 확인하는 'Confirmatio cartarum'(헌장 확인령)에 서명했고, 영주들은 에드워드 1세의 원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후에도 대귀족들은 왕이 너무 많은 돈을 빈번하게 빼앗아간다며 반발하곤 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많은 특권을 넘겨야 했다.
2.5.2.4.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
2.5.2.4.1. 스코틀랜드 왕위 분쟁과 에드워드 1세의 개입
1280년대까지만 해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와 평화를 유지했다.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는 에드워드 1세의 대관식에 아내 마거릿과 함께 참석했고, 1275년 잉글랜드의 성 토마스 수도원에 순례했다가 그곳에서 에드워드 1세를 접견하고 충성을 서약했다. 1278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국경 설정과 관련된 분쟁이 벌어지자, 귀족과 주교로 구성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합동 의회가 구성되었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 후 알락산더르 3세는 웨일즈 공 허웰린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함께 참석한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재차 서약했고,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국과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알락산더르 3세 측은 그가 소유한 잉글랜드 내 영지에서만 유효하다고 여겼지만,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국 전체까지 포함되었다고 여겼다. 훗날 에드워드 1세는 스코를랜드 정복 전쟁을 단행했을 때 이 때의 일을 명분으로 삼았다.

1286년 3월, 알락산더르 3세가 밤중에 아내가 있는 킹혼으로 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스코틀랜드 왕위는 1283년 알락산더르 3세의 딸 마거릿과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 사이의 외동딸인 갓 3살된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가 물려받았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수호자'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결성해, 여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제5대 애넌데일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성 상속인을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발리올 가문과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다. 1289년까지 수호자 중 한 명이 병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살해되었으며, 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이들을 대체할 수호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는 허물어졌고, 귀족들간의 알력 다툼이 심해졌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국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선왕의 처남이었던 에드워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마르그레트와 결혼시키기 위해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이자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협상했다. 그는 자신을 마르그레트의 권리와 안전의 보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에이리크 2세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에이리크 2세는 에드워드 1세의 설득과 로비에 넘어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289년, 로버트 브루스와 존 1세 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그해 11월 6일, 솔즈베리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마르그레트는 에드워드 1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290년 3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국 국경 인근 버검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자리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와 마르그레트의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교황청이 이 결혼을 승인했다고 알렸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대로 가다간 스코틀랜드 왕국이 잉글랜드에 완전히 병합되고, 잉글랜드 왕이 자기들의 성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할 것을 우려했으며, 스코틀랜드 성직자들도 자기들이 누리던 특권이 잉글랜드 국왕에 의해 재분배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1290년 7월 버검에서 열린 2번째 의회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과 지위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1세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8월 28일 노샘프턴에서 양국의 국경과 특권의 보존을 보장하며, 스코틀랜드 왕국의 독립과 성직자와 귀족의 모든 자유를 보존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1290년 9월 말,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마르그레트가 오크니 제도에서 병사했다. 그 후 여러 야심가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경쟁했는데, 그 숫자는 14명에 달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들 중 가장 적합한 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스코틀랜드 왕국을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때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인 에이리크 2세도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했으며, 딸이 즉시 여왕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기각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존 발리올은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엔 더 이상 중앙집권적인 행정 기관이 없어서 각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고, 로버트 브루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모든 법률과 선언을 무시했다.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스코틀랜드 행정부 내에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을 임명했고, 존이 내린 결정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독단적으로 취소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모든 법적 소송은 존이 아니라 자기에게 제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1293년 한 해 동안 최소 6차례나 존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던 1293년 중반, 파이프 백작으로부터 상속받지 못한 맥더프라는 스코틀랜드 귀족이 에드워드 1세에게 찾아와서 자신이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속 재산을 물려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존은 그 땅은 현재 스코틀랜드 왕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 맥더프가 에드워드 1세에게 허락받았다고 밝히자, 존은 그를 투옥했다. 몇 달 후 석방된 맥더프는 에드워드 1세에게 존의 행동을 고발했다. 존은 즉시 런던 의회로 소환되었다. 존은 소환을 미루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런던에 가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으며, 맥더프에게 투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줘야 했다.

1294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한 자금을 받기 위해 런던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잉글랜드 측 연대기들은 존은 회의에 참석한 뒤 3년간 자기 땅의 수입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고 하지만, 프랑스에도 막대한 영지가 있던 존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찬성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 후 에드워드1세는 프랑스에 대한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 존에게 동일한 조치를 내리고 군대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존은 이 요구는 너무 지나치다고 여겼고, 스코틀랜드 귀족들 역시 에드워드 1세의 횡포가 너무 심하니 그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95년 말, 존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쳤던 충성 맹세는 에드워드 1세가 무력으로 협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며 무효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사절을 교환했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앙주의 이자벨과 자신의 장남인 에드워드 발리올 사이의 약혼을 맺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공동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지배를 놓고 자신과 대립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존의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2.5.2.4.2. 1296년 스코틀랜드 원정
존 발리올이 자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침공을 취소하고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범죄"에 대해 변론하라며 존을 소환했다. 존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존이 잉글랜드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자산과 토지를 압류하라고 명령했고,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존의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내분을 유도했다.

존은 에드워드 1세가 쳐들어오기 전에 선제 공격으로 타격을 입히기로 하고, 1296년 3월 11일 셀커크 인근의 캐던리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 후 제7대 부컨 백작 존 코민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들은 애넌데일에서 온 많은 보병과 함게 솔웨이 강을 건너 아서렛 마을을 불태웠다. 이후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방어하는 칼라일로 진군해 성채를 에워쌌다. 그러나 공성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공략할 수 없었고, 3월 28일 하루 동안 포위 공격한 뒤 철수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브루스 가문과 추종자들의 지지를 확보한 뒤 베릭으로 진군했다. 베릭은 1295년 말부터 잉글랜드 함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1296년 3월 육군을 이끌고 온 에드워드 1세에게 포위된 뒤 반복된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베릭에 입성한 뒤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노섬벌랜드에서 온 잉글랜드 정착민들이 베릭에 정착했다. 존은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든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지만, 스코틀랜드 귀족 대다수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여세를 이어가 던바 성을 포위했다. 당시 제8대 마치 백작 패트릭 4세 드 던바는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지만, 그의 아내인 마조리 코민은 존을 추종했고, 던바 성의 수비를 진두지휘했다.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스코틀랜드인들은 항복하려 했지만, 우선 몇 km 떨어진 헤딩턴에서 주둔하던 존 발리올에게 사절을 보내 허락을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존 발리올은 구원군을 보낼 테니 끝까지 싸우라고 답한 뒤, 제7대 부컨 백작 존 코민에게 상당한 병력을 맡겨 던바 성을 구원하게 했다.

이후 1296년 4월 27일에 벌어진 던바 전투에서, 존 코민은 존 발리올의 장인인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했다. 다음 날 에드워드 1세의 본대가 던바 성 인근에 이르자, 마조리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후 존 발리올은 몇 달간 저항을 이어갔지만, 모든 귀족이 등을 돌리자 1296년 7월 10일 브레친 성에서 항복하고 모든 왕실 휘장을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그 후 장남 에드워드와 함께 런던 탑으로 보내졌고, 던바 성에서 생포된 백작들과 부컨 백작 존 코민, 리처드 시워드, 존 모브레이, 인치마틴의 존, 데이비드 그레이엄, 알렉산더 맨치스, 니콜라스 랜돌프 등도 런던탑으로 보내졌다.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7월 스코틀랜드 북부로 더욱 진군해 카우어 강어귀를 건너 디 강을 거쳐 에버딘에서 5일간 머문 뒤, 킨토어, 파이프, 벤프, 컬렌을 거쳐 스페이 강으로 이동했다. 7월 26일, 그는 스코틀랜드 모레이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엘긴에 도착했다. 그 후 남쪽으로 진군하여 로테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존 드 켄틸루프와 존 헤이스팅스를 바데녹으로 보내 그 지역을 정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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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콘의 돌을 가져가는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는 뒤이어 인버차라흐를 거쳐 킬드루미로로 동행했고,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는 로데스에서 왕과 헤어진 뒤 브레머로 진군해 그곳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에드워드 1세는 8월 22일 이전에 베릭에 돌아온 뒤, 그곳에서 의회를 소집한 후 스코틀랜드 통치에 관한 칙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왕국은 해체되지 않지만, 새로운 가신 왕이 임명되지도 않았다. 에드워드 1세 본인이 "스코틀랜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몰수된 영지로 간주했고, 워렌 백작 존 드 워렌을 총독으로 세우고, 휴 드 크레싱엄을 재무장관으로, 아머샴의 월터를 법무관으로, 윌리엄 옴스비를 스코틀랜드 대법원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각지에 보안관과 성주들을 직접 선임하거나 현지 귀족이 그 직위를 맡는 걸 승인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관, 휘장, 그리고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들이 대관식 때 사용했던 운명의 돌런던으로 가져갔다.

1296년 7월과 8월에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진군하던 당시, 많은 스코틀랜드인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8월 28일에는 다른 수많은 스코틀랜드인이 베릭에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이름은 <래그먼 롤>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래그먼 롤에 나와 있는 스코틀랜드인 2,000명이 그 자리에 모두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다수는 나중에 대리인을 보내 충성을 서약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 1세는 이제 스코틀랜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했고, 총독인 워렌 백작은 스코틀랜드에서 한동안 통치하다가 불편함을 느껴 요크셔에 있는 자기 영지로 물러나고 재무장관 휴 드 크레싱엄이 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 정부를 이끌었다.
2.5.2.4.3.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의 봉기
에드워드 1세의 침공으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주권을 잃어버렸고, 왕국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이 런던으로 옮겨졌으며, 그가 남겨놓은 관리와 총독들이 수탈을 일삼자, 스코틀랜드인들은 강한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현지 성직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스코틀랜드 교회를 자신의 주권하에 두려는 걸 두려워했다. 1297년 초 스코틀랜드 서부 고지대에서 잉글랜드 관리들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5월 초 애버딘셔와 갤러웨이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그해 5월, 윌리엄 월레스가 스코틀랜드 남부의 라나크셔의 잉글랜드 보안관 윌리엄 헤실릭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월레스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의 지원을 받아 무리를 끌어모은 뒤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여름에는 앤드류 모레이가 스페이 강과 디 강 사이의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급기야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스콘에서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발발했고, 스코틀랜드 대법원장 윌리엄 옴스비는 간신히 반군을 피해 달아났다. 그 후 베릭의 전 수호자 윌리엄 르 하디가 윌리엄 월레스에게 가담했고, 본킬의 존 스튜어트, 알렉산더 린제이도 반란에 합류했다. 앤드류 모레이는 인버네스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어쿼트 성을 순조롭게 공략했고, 8월 초까지 인버네스, 엘긴, 벤프 등 잉글랜드 성주들이 지키던 성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통제력은 허물어졌고, 단지 북부 스코틀랜드의 성 몇 개만이 잉글랜드인의 지배를 받았다.

재무장관 휴 드 크레싱엄은 스코틀랜드 전역을 삽시간에 휩쓴 반란을 진압할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었기에, 에드워드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297년 6월, 에드워드 1세는 바데녹의 영주 존 코민 2세부컨 백작 존 코민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했다. 그들은 애버딘의 헨리 체인 주교, 제7대 마르 백작 가르트나이트의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도 군대를 일으켰다. 이들은 애넌데일과 니스데일을 지나 6월 말에 에어에 도착했다. 이에 제임스 스튜어트윌리엄 르 하디는 강력한 무장과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에 대적할 엄두를 못 내고 어바인에서 항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이 곧 평정되리라 여기고 1297년 8월 플란데런으로 원정을 떠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맞섰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에드워드 1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윌리엄 월레스는 1297년 7월 셀커크 숲에서 보병대를 집결한 뒤 8월 던디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테이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군한 뒤,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위세를 떨치던 앤드류 모레이와 합류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지시를 받고 반란을 진압하러 갔던 존 코민 부자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에 존 드 워렌과 휴 드 크레싱엄은 대규모의 기사 부대와 웨일스 보병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스털링으로 진군했다. 워렌은 포스 강을 건너는 곳을 공략함으로써 스코틀랜드 북부와 남부의 연락망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스털링에서 다리를 건너던 중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크게 패했고, 휴 드 크레싱엄은 전사했다. 다만 앤드류 모레이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2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후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지도자로 떠받들어졌고, 아직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던 존 발리올을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수호자'를 자칭했다. 1297년 10월과 11월, 그는 국경을 넘어 노섬벌랜드를 습격해 코커머스와 뉴캐슬 사이의 지역을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육하고 여인들을 강간했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은 이들을 피해 타인 강 남쪽의 더럼 주로 도피했다. 1297년 크리스마스 직전, 존 드 워렌과 로버트 드 클리퍼드는 각자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클리퍼드는 에넌데일로 들어가서 마을 10개를 불태웠지만, 기병대 일부가 매복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보았다.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 동부로 가서 베릭을 탈환하고 록스버러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298년 3월, 윌리엄 월레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 백작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스털링 성을 포위해 식량이 떨어진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공성 무기가 없어서 에든버러, 베릭 및 기타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1298년 2월 중순, 에드워드 1세는 플란데런에서 돌아온 뒤 존 드 워렌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가 친히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원정을 떠날 테니, 그때까지 독자적으로 출진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한편, 던바 전투 때 포로로 잡혔던 수많은 스코틀랜드 기사와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 대가로 그들에게 석방을 약속했지만, 플란데런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를 비롯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프랑스로 망명했고, 필리프 4세의 지원 덕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윌리엄 월레스와 합류했다.
2.5.2.4.4. 1298년 스코틀랜드 원정
1298년 6월 25일, 에드워드 1세는 록스버러에 군대를 집결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에 관한 정보는 다양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기병 2,000명, 보병 12,000명[4]에 달했다고 하며, 또다른 기록에서는 기병 3,000명, 잉글랜드 보병 15,000명, 웨일스 보병 1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기병 2,000명과 보병 12,000명이었다는 기록이 좀더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윌리엄 월레스는 예상되는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을 집결했다. 하지만 그는 전면전을 회피하고 청야 전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강력한 잉글랜드군의 진격 경로상에 있는 마을들을 불태워 이들이 보급을 구하기 어렵게 만드는 한편, 스코틀랜드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잉글랜드군은 이에 대응하여 링컨셔와 요크셔에서서 식량을 운송하는 한편, 아일랜드 영지에서 칼라일로 해상 수송까지 시도했지만 전체 수요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5]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면서 굶주림에 시달린 잉글랜드 군인들에게 전달된 몇 안 되는 물품 중에는 왕이 군대에 나누어 준 와인도 있었다. 이 와인을 둘러싸고 규율을 잃은 웨일스 보병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더니 급기야 폭동으로 이어졌고, 에드워드 1세는 기병대를 투입해 웨일스인 80명을 처단했다. 그렇게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 진입한 이래 윌리엄 월레스를 찾지 못하고 헤매면서 식량난에 시달리는 현 상황에 회의를 느낀 끝에 에든버러로 철수하려 했다.

이때, 제7대 던바 백작 패트릭 4세 드 던바와 제7대 앵거스 백작 길버트 3세 드 움프라빌이 찾아와서 스코틀랜드군이 폴커크 인근의 칼렌다 숲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이곳은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불과 20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윌리엄 월레스는 아마도 여기에 숨어 있다가 잉글랜드군이 철수할 때 기습 공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1세는 드디어 스코틀랜드군을 섬멸할 호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폴커크로 진군했다.

7월 21일 밤 린리스고 인근의 평원에서 야영하던 에드워드 1세는 한 기병이 말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말발굽에 치여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왕의 비명을 들은 장병들은 "왕이 죽었다!", "스코틀랜드 놈들이 야습했다!"라고 외치며 동요했다. 그러자 에드워드 1세는 말에 올라탄 뒤 군중을 돌며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줬고, 장병들은 곧 진정했다. 7월 2일 새벽,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미사를 주관했고, 잉글랜드군은 미사가 끝나자마자 린리스고를 떠나 폴커크로 이동했다.

이후 벌어진 폴커크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윌리엄 월레스의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식량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파이프로 잠시 진군해서 에어 성을 파괴한 뒤 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해 9월 잉글랜드 북부의 칼라일로 이동했다. 9월 25일, 에드워드 1세는 칼라일에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의 영지를 몰수해 잉글랜드 귀족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편, 윌리엄 월레스는 폴커크 전투 패전 책임을 지고 수호자 자리에서 사임했고, 1299년 이전에 스코틀랜드를 일시적으로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이후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가 새로운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2.5.2.4.5. 1299년 스코틀랜드 원정
폴커크 전투에서 크게 패했지만, 스코틀랜드 반군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성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반군의 손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행정부가 반군 지도자들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과 모레이 주교 데이비드 모라비아가 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존 코민 3세와 로버트 브루스는 잉글랜드와의 항쟁에 전념했고,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 남부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북부까지도 심각한 파괴와 약탈에 직면했다. 그들은 폴커크 전투 이후 잉글랜드군에 함락된 스털링 성을 포위했고, 1299년 여름에는 록스버러 성도 공략하려 했지만, 그곳 수비대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취소했다. 그 대신, 셀커크 숲을 점거했고, 에든버러를 습격해 주변 민가들을 약탈했으며, 에드워드 1세를 따르던 몇 안 되는 스코틀랜드 귀족 중 한 사람이었던 사이먼 프레이저를 설득해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99년 6월 6일 새로운 원정을 위해 군대를 소집한 뒤 여름에 노섬벌랜드로 향했지만,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로 진군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털링 성 수비대는 장기간 이어진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1299년 말에 무장을 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후 셀커크 숲에서 열린 의회에서 존 코민 3세와 로버트 브루스 간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자, 의회는 램버튼 주교를 세 번째 수호자로 임명해 양자를 중재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자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로버트 브루스는 1299년 11월과 1300년 5월 사이에 수호자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 후 로버트 브루스는 갤러웨이로 가서 그곳에 사는 게일인 귀족들의 지원을 얻으려 시도했지만, 갤러웨이가 스코틀랜드에게서 독립하기를 원했던 맥두걸 가문의 훼방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00년 5월 10일, 로버트 브루스를 제외한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루더글렌에서 의회를 연 뒤, 잉그램 드 움프라빌을 새 수호자로 선임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정부는 프랑스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1299년 4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제드버러 수도원장과 카스 출신 기사 존 위셧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는 1295년에 맺은 동맹을 잊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한편,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스코틀랜드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1299년 6월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국왕이 아닌 로마 교황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침략 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그해 7월 에드워드 1세를 설득해 전임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를 떠나 피카르디로 망명하는 조건으로 풀려나도록 했다.
2.5.2.4.6. 1300년 스코틀랜드 원정
1300년 7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로 새로운 원정을 떠났다. 그는 당초에 보병 16,000명을 모으려 했지만, 칼라일에 나타난 인원은 9,000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장남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도 가담했다. 7월 4일, 잉글랜드군은 갤러웨이를 정복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남서부로 진군해 케어러버록 성을 공략했다. 에드워드 1세는 수비대 일부를 교수형에 처했고, 사령관 및 장교 11명은 뉴캐슬에 투옥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함대와 함께 갤러웨이 깊숙이 진군했고, 에드워드 1세는 커크부드브라이트에서 존 코민 3세와 로버트 브루스를 상대로 이틀간 협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복위하고 발리올 가문의 영지를 반환해달라고 요구하자, 에드워드 1세는 분노하며 협상을 중단했다.

얼마 후, 크리 강어귀에서 식량을 수집하던 잉글랜드 분견대가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지원군이 신속히 가담했고, 잉글랜드군은 적군을 격퇴하고 스코틀랜드 보안관 로버트 2세 키스를 생포했다. 1300년 8월 8일, 잉글랜드군 주력이 강둑에 도착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반대편 강둑에서 전투를 위해 대열을 이루고 있던 스코틀랜드 군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러다가 썰물 때가 되자,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이 보병들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왕은 우익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싶어서 험프리에게 군대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지만, 험프리는 그의 명령을 오해하여 자기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군을 공격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장남과 함께 기병대를 이끌고,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전투 현장으로 신속히 진격했다.

얼마간의 전투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주변 황무지로 후퇴했다. 그들의 손실은 적었지만, 많은 장비를 잃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기사들은 지형이 험해서 추격할 수 없었다. 다만 스코틀랜드 스트라스헤본의 영주 로버트 베어드만 생포되어 로버트 키스와 함께 잉글랜드 남부로 끌려갔다. 이후 원정군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군대를 유지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으며, 수많은 보병이 탈영했다. 에드워드 1세는 원정 성과가 별 볼 일 없고, 더 이상 작전을 이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깊이 좌절하며 칼라일로 돌아갔다. 그해 10월, 에드워드 1세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덤프리스로 진군해 요새를 살펴본 후 11월 초 칼라일로 돌아왔다. 스코틀랜드 사절단이 칼라일로 찾아와서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강하게 거부하면서 내년에 스코틀랜드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자기 뜻을 거스르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이어가는 에드워드 1세에게 진노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를 통해 전한 교황 칙서 <스키무스 필리(Scimus fili)>에서, 교황은 잉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권리가 없으며, 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건 부당하다고 규탄했다. 1301년 1월, 다수의 영주들이 링컨에서 열린 의회에서 교황에게 단체로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교황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분쟁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윈체스터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를 포함한 높은 지위의 대표단을 교황청에 파견하여 교황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설득했다. 스코틀랜드 측은 이에 대응해 볼드레드 비셋을 교황청에 파견하여 교황이 뜻을 고수하도록 유도했다.
2.5.2.4.7. 1301년 스코틀랜드 원정
1301년 3월 1일, 에드워드 1세는 링컨에서 6월 24일 이전에 동부 군과 서부 군을 편성해 집결한 후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규모가 더 큰 동부군은 베릭에 집결하여 왕의 지휘를 받았고, 서부 군대는 웨일스 공이라는 칭호를 받은 에드워드 왕자가 칼라일에서 지휘했다. 에드워드 1세의 휘하에는 숙련된 장성들과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헨리 형제, 윌리엄 마틴, 레지날드 그레이, 에드먼드 모티머, 테오발드 드 베르됭 등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토몬드의 영주 길버트 드 클레어와 에드워드 왕자의 절친한 친구이자 연인으로 의심받은 시종 피어스 개버스턴도 있었다. 한편, 아일랜드 보안관 존 워건의 지휘하에 기사, 경기병, 궁수로 구성된 강력한 아일랜드군이 잉글랜드 본대를 지원했다.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는 클라이드만으로 가는 직행 경로인 니스데일을 통과해 턴베리 성을 포위 공격한 끝에 9월 2일 함락했다. 이후 존 드 소울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분견대가 거대한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잇달아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9월 7일과 8일, 소울스와 잉그램 드 움프라빌은 로크마벤을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또한 턴베리 성과 에어 성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소집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에드워드 왕자는 보급이 끊길 것을 걱정해,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는 대신 라이언 호수를 건너 칼라일로 후퇴했다.

한편,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베릭에서 트위드데일을 거쳐 셀커크와 피블스를 점령하고 셀커크 숲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후 8월 23일까지 클라이드 강을 따라 글래스고로 이동해 보스웰 성을 포위했고, 9월 24일 이전에 함락했다. 10월에 포스만을 가로지르는 배 다리를 건설하고 스털링 성에 대한 포위 공격을 재개하려 했다. 그러나 아들이 후퇴했다는 걸 알게 된 데다 겨울이 다가오자 별수 없이 린리스고로 후퇴해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스코틀랜드군은 시종일관 전면전을 회피하고 유격전으로 일관해, 에드워드 1세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병사들에게 급료로 지급할 돈이 떨어졌고 식량마저 바닥나면서 많은 보병이 탈영했으며, 사료가 부족해서 많은 말들이 굶어 죽었다.

1301년 11월, 에드워드 1세는 1302년 1월에 새로운 보병 부대를 편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교황청과 프랑스 국왕의 압력으로 결국 휴전을 맺기로 했다. 1302년 1월 26일 뉴캐슬에서 1302년 11월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에드워드 1세의 잇따른 공세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던 1302년 2월 16일,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애넌데일과 갤러웨이의 잉글랜드 사령관 존 세인트 존에게 귀순했다. 그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데, 많은 학자는 그가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잉글랜드 국왕이 브루스 가문의 정적인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다시 인정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로버트 브루스는 충성 대상을 바꾼 뒤 잉글랜드 국왕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의 딸 엘리자베스 드 버러와 결혼했다. 여기에 알렉산더 애버네시 등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도 로버트 브루스를 따라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2.5.2.4.8. 1303~1304년 스코틀랜드 원정
1302년 7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파견한 프랑스군이 쿠르트레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은 플란데런 반란군에게 참패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플란데런과의 전쟁에만 전력을 기울였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원을 거의 완전히 포기했다. 존 드 소울스, 램버튼 주교, 잉그램 드 움프라빌, 제임스 스튜어트 등 스코틀랜드 인사들이 파리로 찾아가서 필리프 4세를 설득했지만, 필리프 4세는 결국 1303년 5월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그들과의 전쟁을 종식했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도 더 이상 스코틀랜드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주교들에게 잉글랜드 국왕과 협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렇듯 상황이 바뀌자,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향한 대규모 원정을 재차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이자 스코틀랜드 주재 국왕의 부관을 맡은 존 시그레이브에게 선봉대를 이끌라고 명령했다. 존 시그레이브는 에든버러 서쪽의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진격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수호자인 존 드 소울스는 프랑스에 있었기에,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가 다시 스코틀랜드 수호자 직분을 맡았다. 1303년 2월 24일, 존 코민 3세사이먼 프레이저는 존 시그레이브가 이끄는 잉글랜드 기병대를 로슬린에서 기습 공격했다. 존 시그레이브는 이에 따라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하지만 라비의 기사 로버트 네빌이 지휘하는 후속 부대가 도착해 시그레이브를 구출하고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숲속에 필 타워를 건설했고, 알렉산더 발리올이 이곳을 지켰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워릭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아일랜드 파견대 및 로버트 브루스가 지원한 스코틀랜드 분견대를 록스버러에서 집결한 뒤 5월 30일 출진했다. 그는 비숍스 린에 배다리를 건설한 뒤, 스털링 성을 우회하여 포스만을 건넌 후 파이프 일대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해 7월 브레친에 도착한 뒤 마울레 성을 포위해 8월 9일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에드워드 1세는 뒤이어 어콰트와 크로마티 성을 함락한 뒤, 에버딘을 거쳐 모레이 퍼스 연안에 있는 킨로스 수도원으로 진군해 9월 14일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쟁 중에 잉글랜드군이 도달한 최북단 지점이었다. 그러나 보급품이 부족했고, 스코틀랜드군이 전투를 회피하자, 잉글랜드군은 철수했다. 에드워드 1세는 11월 5일 파이프에 있던 던펌린 수도원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영지가 파괴되어 수입이 끊겨버리면서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고, 프랑스 왕국마저 더 이상 지원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게다가 에드워드 1세가 지난 원정과는 달리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코틀랜드 한복판인 던펌린 수도원에서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전쟁을 이어갈 의지를 드러내자, 그들은 전의를 잃고 협상하기로 했다. 존 코민 3세는 1304년 2월 5일 퍼스 북쪽 스트래소드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 헨리 퍼시 등과 만나 협상을 진행했다. 다만 그는 무조건 항복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반란을 이끌었던 귀족들에 대해 제재하지 말라고 요구했으며, 양측 모두 무조건 포로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1세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존 코민 3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304년 2월 9일, 스코틀랜드 수호자 존 코민 3세는 잉글랜드 국왕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뒤이어 스코틀랜드 귀족 대부분이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오직 윌리엄 월레스사이먼 프레이저 만이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세리크 숲에서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유격전을 이어갔다. 윌리엄 올리펀트가 이끄는 스털링 성의 수비대 역시 항복을 거부했다. 1304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스털링 성을 포위해 3개월간 공성 무기를 동원해 공격했다. 결국 수비대는 7월 말에 항복했다.

한편,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는 1304년 2월 20일 피블스 인근 해프루에서 존 시그레이브와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적군의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 그 후 윌리엄 월레스는 1305년까지 숨어 다니며 저항을 이어갔지만, 글래스고 근방의 로브로이스턴에서 에드워드 밑에 있던 스코틀랜드인 기사 존 드 멘티스에게 체포되어 잉글랜드군에 넘겨졌고, 런던으로 압송된 뒤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은 후 살인 및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옷이 벗겨진 채 말에 끌려다니며 조리돌림당하다 스미스필드 마켓에서 능지형에 처했다.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런던 다리에 효수되었고 장기는 불태워졌으며 찢긴 사지는 4개의 지역에 나뉘어서 전시되었다.

사이먼 프레이저는 산악지대에서 추적당하는 나날에 지쳐 에드워드 1세에게 다시 복종하려 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가 충성 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3년 동안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에 발을 들이지 않는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프레이저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귀순했고, 1305년 9월 연봉의 3배를 지불하고 몰수한 재산을 다시 사들이는 것을 인정받는 대가로 4년간 추방되어야 했다.
2.5.2.4.9. 전쟁 수습과 로버트 브루스의 반란
스털링 성을 함락하면서 전쟁이 끝나자, 에드워드 1세는 전후 수습에 나섰다. 그는 자기에게 저항했던 이들 대부분을 용서하고 영지를 돌려줬으며,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램버튼 주교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서 직위를 유지하는 걸 허락했다. 1305년 봄, 그는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한 뒤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 로버트 브루스, 존 모브레이를 자문위원으로 선임하여 스코틀랜드를 자기 대신에 다스리게 했고, 잉글랜드 의회에서 스코틀랜드를 대표할 스코틀랜드인 10명(주교 2명, 수도원장 2명, 백작 2명, 남작 2명, 포스 강 북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 포스 강 남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을 선출하게 했다. 여기에 로디언의 총독으로 존 시그레이브를 선임했고, 스코틀랜드 대재판장으로 존 센데일을 선임했다.

스코틀랜드 대표 10인은 1305년 9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 참석했고, 이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행정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장 드 브르타뉴가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베버코츠의 윌리엄이 재상으로, 존 샌달이 내무장관으로 선임되어 스코틀랜드 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의회는 스코틀랜드인과 잉글랜드인으로 구성된 4쌍의 판사를 임명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보안관과 성주가 임명되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에는 잉글랜드인 보안관이 맡았다. 또한 스코틀랜드 위원 22명이 구성되어 총독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는데, 이 위원의 구성원으로는 주교 4명, 존 코민 3세와 로버트 브루스를 포함한 백작 5명, 남작 9명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극비리에 램버튼 주교와 접촉해 새로운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1세가 중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1306년 2월 10일, 브루스는 덤프리스의 프란치스코회 교회에서 존 코민 3세와 만나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존 코민 3세는 존 발리올이 왕이 되어야 하지, 그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이어진 논쟁 와중에, 브루스는 코민을 살해했다.

전승에 따르면, 코민은 에드워드 1세에게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의회에 이 일을 보고했다. 이때 의회에 출석했던 하트퍼드 백작 랄프 드 몬테르머가 브루스에게 경고했고, 브루스는 코민을 살해한 뒤 탈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는 1306년 2월에 열리지 않았기에, 학자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간주하며, 일각에서는 브루스가 위험한 정적이 될 존 코민 3세를 배제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고자 암살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존 코민 3세를 살해한 뒤, 로버트 브루스는 교회에서 살해를 저질렀기 때문에 파문 당했지만,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을 찾아가서 그에게 사면받았다. 그 후 6주 만에 스콘에서 부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 등의 추대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등극했다. 로버트 1세와 추종자들은 여세를 이어가 덤프리스, 달스윈튼, 티버스, 에어 성을 공략했고, 킬마녹의 로버트 보이드는 로데세이 성을 점령하고 인버킵을 포위했다. 또한 그는 두나버티 성을 확보함으로써, 클라이드만에 있는 스코틀랜드 서부 성 5개를 소유했다. 브루스는 일부 귀족에게서 반란을 지지받았지만, 잉글랜드군이 확고하게 장악한 로디언에게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케이스네스, 서덜랜드, 로스, 부컨, 던바 등 다수의 귀족도 브루스의 반란에 반대했다. 그들은 존 발리올 만이 정당한 군주라고 여겼고, 존 코민 3세를 살해한 것을 비난했다. 특히 코민 가문은 로버트 브루스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그는 1306년 4월 5일에 에이머 드 발랑스를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발랑스는 '드래곤 깃발'을 들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는 걸 용인받았음을 의미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곧 반란 주모자 로버트 브루스, 추방령을 어기고 브루스에게 가담한 사이먼 프레이저, 역시 반란에 또다시 가담한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를 생포해 런던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7월 8일에 군대를 칼라일로 소집했으며, 브루스와 지지자들의 영지를 자신을 추종하는 지지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스코틀랜드로 진군하기 전, 에이머 드 발랑스가 1306년 6월 19일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와 추종자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반란을 지지했던 램버튼 주교와 위셧 주교는 체포된 뒤 스콘의 수도원장과 함께 잉글랜드 남부로 끌려가서 지하 감옥에 갇혔다. 로버트 1세는 메스번 전투 패배 후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인치프레이의 모리스 수도원장의 도움을 받아 드럼알반으로 도주했다.

1306년 7월 또는 8월, 스트라스필란 계곡에서 아가일의 영주 존 맥두걸이 이들을 막아섰다. 이어진 달리그 전투에서, 로버트 1세는 또다시 패배했다. 이제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그는 병사들을 해산한 뒤,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 동생 닐 브루스,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 알렉산더 린제이, 로버트 보이드를 데리고 산을 넘어 애버딘 북서쪽의 킬드럼미 성으로 향했고, 나중엔 아솔 백작과 함께 브레달베네 산으로 도피했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9월 말 칼라일에 도착했지만 고령이었던 터라 더 이상 이동하지 못했고, 아들 에드워드가 1306년 7월 주력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했다. 그해 7월 11일, 애넌데일의 로크메이넨 성을 함락한 뒤, 에드워드 왕자는 여세를 이어가 퍼스로 진군해 8월 1일에 도착했다. 그 후 발랑스가 킬드럼미 성을 포위하는 걸 도왔고, 성은 9월 13일에 함락되었다.

아솔 백작은 브루스 가문의 여성들과 함께 도주하다가 테인에서 생포되었고, 런던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사이먼 프레이저 역시 체포되었고, 교수형에 처했다. 로버트 1세의 동생 닐 브루스도 체포되어 베릭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로버트 1세의 처남 크리스토퍼 세튼은 로크둔 성에서 체포되어 덤프리스에서 처형되었고, 크리스토퍼의 동생 존 세튼과 버나드 모왓은 8월 4일 뉴캐슬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로버트 1세의 왕비 엘리자베스는 홀더니스에서 가택연금 되었고, 자매인 크리스찬 브루스는 부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와 함께 록스버러와 버윅의 성벽에 매달린 철창에 갇혔다.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는 당시 12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런던 탑에 갇혔다가 나중에 요크셔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한편, 로버트 1세는 레녹스를 거쳐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킨타이어 반도로 도주했다. 이후 두나버티 성에 잠시 머물렀다가, 잉글랜드군이 거기까지 몰려오자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가 그다음 6개월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서부 섬들이나 아일랜드로 망명했을 것이다. 14세기 연대기인 <게스타 아날리아>(Gesta Annalia)에 따르면, 킨타이어 반도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의 여성 영주인 크리스티나가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주한 로버트 1세를 섬에 숨겨줬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 원정 중에 지나가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여성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겨울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9월 29일에 라네르코스트에 있는 겨울 거주지로 옮겼다. 에드워드 왕자가 스코틀랜드를 떠나자, 피어스 개버스턴, 로저 모티머를 포함해 에드워드 왕자를 모시던 젊은 귀족 22명은 자기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기고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 진영을 무단 이탈해 프랑스에서 열리는 기사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이에 분노한 왕은 10월 18일에 그들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가, 1307년 1월 23일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설득을 받아들여 대부분을 사면했다.
2.5.2.4.10. 로버트 1세의 끈질긴 투쟁과 에드워드 1세의 죽음
1307년 2월, 로버트 1세의 형제 토머스 브루스알렉산더 브루스가 아일랜드의 게일인 소왕, 스코틀랜드 기사 레지날드 크로퍼드, 킨타이어의 영주 맬컴 맥퀼런과 함께 선박 18척을 타고 갤러웨이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갤러웨이의 유력한 귀족인 둔갈 맥도월에게 라이언 호 전투에서 격파되어 전원 생포되었다. 맥도웰은 즉시 크로포드와 맥퀼런을 참수한 뒤, 브루스 형제를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 1세는 두 형제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잔혹하게 처형했다. 한편,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로버트 보이드는 아란에 상륙한 뒤 존 헤이스팅스가 브로딕 성으로 보낸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다. 로버트 1세는 아란에서 이들과 합류했고, 함께 캐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텐버리 성을 접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텐버리 마을을 야간을 틈타 약탈한 뒤 아란으로 후퇴했다. 이후 그는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비밀리에 상륙하여 1307년 4월부터 캐릭과 갤러웨이 언덕에서 잉글랜드 수비대를 잇달아 습격했고, 추격대에게 매복 공격을 가해 피해를 줬으며, 크리 강변의 통행이 불가능한 협곡 글렌 트룰에 숨어 있다가 추격대를 격파했다. 그 후 북쪽으로 이동해 에어 성을 우회한 뒤, 1307년 5월 10일 라우던 힐 전투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를 격파했다. 3일 후에는 글로스터 백작 랄프 드 몬테르머가 지휘하는 또 다른 잉글랜드군을 격파해, 에어 성으로 쫓아냈다.

로버트 1세가 소규모 병사들로 저항을 꿋꿋이 이어가고,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에드워드 1세는 그동안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게 역효과를 야기했다는 걸 깨달았다. 1307년 3월 13일, 그는 발랑스 및 다른 관료들에게 서신을 보내 브루스의 협박을 받고 지원한 자들을 사면하라고 명령했다. 1307년 7월 초, 에드워드 1세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기 위해 군대를 칼라일로 소집했다. 그러나 7월 7일, 이질에 시달린 끝에 칼라일에서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에드워드 1세는 죽기 직전에 이교도와 싸우는 군대에게 자기 심장을 맡겨서 예루살렘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또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자기 몸을 삶고 뼈를 꺼내 스코틀랜드가 정복될 때까지 군대와 함께 운반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좀더 신뢰할 수 있는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1세는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등을 불러서 장남 에드워드를 돌봐달라고 부탁했으며, 에드워드 왕자의 총신이자 애인으로 의심되는 피어스 개버스턴이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걸 막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국왕이 된 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무시하고 피어스 개버스턴을 즉시 불러들였다.

에드워드 1세의 유해는 남쪽으로 보내졌고, 1307년 10월 27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새 국왕 에드워드 2세는 8월까지 잉글랜드 북부에 머물렀지만, 스코틀랜드 원정 지휘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간 후 1308년 2월 25일 대관식을 거행했다.

3. 평가

중세 잉글랜드인에게는 명군이지만,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악마의 현신이자 마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를 발전시키고 중앙집권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큰 활약을 펼친 위대한 명군으로 손꼽힌다. 전략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6]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루이스 전투 외의 패배를 겪어본 바 없고,[7] 그나마도 이때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또한 장궁의 도입을 권장했는데 이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연승의 요인이 된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대단히 완고했고 적에게는 무자비하다 못해 잔혹하였다.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윌리엄 월레스와 같은 정적들에게는 사지를 찢어버릴 정도로 냉혹하여 이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상술한 유언을 남길 정도의 전설이 있을 정도로 성격이 지독했다고도 한다. 위에 언급한 내용처럼 머리도 좋고 군사적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기술과 자원이 훨씬 발전했던 후대 15세기 ~ 16세기 잉글랜드의 왕들도 평정하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거의 집어삼킬 뻔했고, 역사학계에서도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여전히 입지가 불안하고 조직력이 엉망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도 격파하고 진짜 스코틀랜드를 석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많다. 실제 역사에서는 스코틀랜드는 일단 동군연합을 거치고, 그 후에 높은 자치권과 동등한 대표권도 인정받고 고유의 문화와 민족 의식을 지키면서 천천히 통합된 것과 달리, 만약 에드워드 1세가 정복에 성공했다면 일찍부터 강압적으로 통합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스코틀랜드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8] 스코틀랜드에서는 숙적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에서도 이렇게 자국 역사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이 왕을 공포와 경외심을 같이 담아 스코틀랜드를 때리는 망치(Hammer of the Scots)라고 부른다.

다만 스코틀랜드인들과 싸우는 와중에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여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몇 차례 입었으며, 이를 해결하려고 계속해서 새로운 세금을 매겨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았던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다. 때문에 말년에는 민심에서 멀어졌으며, 잉글랜드 상공업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유대인 상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잉글랜드 경제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점은 후대에도 큰 실책으로 손꼽힌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에드워드 1세의 개입 탓에 분쟁이 생겼지만, 그는 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의 문제로 만들었다. 특히 에드워드 1세와 귀족들 간의 갈등은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 때로 접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1세가 무수한 업적을 남긴 뛰어난 왕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잉글랜드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 편이다.

4. 가족 관계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Eleanor of Castile)
1남 잉글랜드의 헨리
(Henry of England)
1268년 5월 6일 1274년 10월 14일
1녀 바르 백작부인 알리에노르
(Eleanor, Countess of Bar)
1269년 6월 18일 1298년 8월 29일 바르 백작 앙리 3세
슬하 1남 1녀
2녀 하트포드 백작부인 조앤
(Joan, Countess of Hertford)
1272년 4월 1307년 4월 23일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슬하 1남 3녀
제1대 몬더머 남작 랄프 드 몬더머
슬하 2남 2녀
2남 체스터 백작 알폰소
(Alphonso, Earl of Chester)
1273년 11월 24일 1284년 8월 19일
3녀 브라반트 공작부인 마르가레타
(Margaret, Duchess of Brabant)
1275년 3월 15일 1333년 브라반트 공작 요한 2세
슬하 1남
4녀 우드스톡의 메리
(Mary of Woodstock)
1278년 3월 11일 1332년 7월 8일 이전
5녀 헤리퍼드 백작부인 엘리자베스
(Elizabeth, Countess of Hereford)
1282년 8월 7일 1316년 5월 5일 홀란드 공작 요한 1세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헌
슬하 3남 2녀
3남 에드워드 2세
(Edward II)
1284년 4월 25일 1327년 9월 21일 프랑스의 이자벨
슬하 2남 2녀[9]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Margaret of France)
4남 제1대 노퍽 백작 토머스
(Thomars, 1st Earl of Norfolk)
1300년 6월 1일 1338년 8월 4일 앨리스 드 헤일스
슬하 1남 2녀
메리 드 브루즈
5남 제1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Edmund, 1st Earl of Kent)
1301년 8월 5일 1330년 3월 19일 리들의 웨이크 여남작 마거릿 웨이크
슬하 2남 2녀[10]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www.scriptmag.com/Braveheart-king-edward-i-longshanks.jpg
* 1995년 개봉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배우 패트릭 맥구한이 연기했다. 스코틀랜드의 저항군 지도자였던 윌리엄 월레스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큼 희대의 악당으로 등장한다. 작중 묘사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권모술수의 달인으로, 실제 에드워드 1세도 정치력에서 권모술수에 뛰어났던 고증을 잘 나타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에 혈육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계략과 술수에는 당할 자가 없는[17] 노회하면서도 교활한 왕으로 묘사되어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는 결국 스코틀랜드의 저항세력을 이끌던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인의 시점으로 묘사된 영화인 만큼 과장될 정도로 비열하고 잔혹하며 몰인정한 면만이 부각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18] 영화 속에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런던으로 끌려온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당하는 순간에 자신도 노환에 시달리며 죽어가다가 최후에 윌리엄 월레스가 산채로 칼로 난자당하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유(Freedom!)"를 부르짖으며 죽자 그 소리를 듣고는 숨을 거둔다. 더욱이 죽기 직전에는 며느리인 이사벨라가 윌리엄 월레스를 고통없이 죽게 해주도록 자비를 베풀 것을 애걸하자 이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며느리로부터 사실 자신의 뱃속의 아이가 왕세자 에드워드 2세가 아닌 윌리엄 월레스의 아이이며, 에드워드 1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었으니 더욱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월레스를 죽이고 나서도 2년 정도 더 살았을뿐더러, 윌리엄 월레스가 사망할 당시에 며느리 이사벨라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고, 심지어 윌리엄 월레스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2세가 뒤를 이어 즉위한 후에야 혼인하였다. 그 뱃속의 아이가 윌리엄 월레스의 자식이라는 것도 영화의 재미를 위한 허구에 불과하다.[19] 이 영화를 두고 잉글랜드에서는 명군으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1세를 그저 폭군으로 만들었다고 매우 불쾌하게 반응했다.
아웃로 킹
* 2018년 개봉한 영화 <아웃로 킹>에서는 배우 스티븐 딜레인이 연기했다. 스털링에서 공성전을 벌일 때는 이곳의 성을 공격하기 위해 3개월 동안 역대 최대 크기의 투석기인 워울프를 만들었는데 스코틀랜드측 방어군이 이 투석기를 보고 겁에 질려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입장에서는 공성전을 위해 이렇게 큰 투석기를 만들었는데 안 쏴보는건 너무나 아까워서 곧장 항복을 받아주지는 않고 결국 투석기를 만들어서 한발 쏘고 나서야 항복을 받아줬다. 주인공인 로버트 1세의 눈 앞에서 본인이 손수 칼을 휘둘러 투석기를 쏜 다음 환호하는 주변 장병들과 사람들을 뒤로 하고서 항복을 받아주라고 명령하는 모습이 꽤나 유머스럽다. 여기서도 임종을 앞두고 아들에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란 귓속말을 듣는데 나름 웅대한 유언마저 깔끔히 무시당한다.

7. 같이보기


[1] 에드워드 1세 시대에 그려져서 에드워드 1세로 추측되고 있다.[2] Burgh by Sands /ˈbrʌf/[3] 1225년 헨리 3세가 반포한 헌장. 마그나 카르타를 개정한 것으로, 왕실 산림에 관한 법률 조항을 개정하고, 자유민의 권리를 확대하며, 왕실 산림 특권 위반에 대한 처벌 시스템을 완화했다. 1225년 이래 대헌장의 일부로 간주되었다.[4] 이중 10,000명은 웨일스에서 소집되었다고 한다.[5] 여기에 추가적으로 동부 스코틀랜드 항구를 통해 식량을 보급받고자 했으나 일부 선박들이 역풍으로 제대로 운항되지 못하기도 했다.[6] 실제로 마상시합사냥을 좋아했다.[7] 다만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는 변덕스러운 동맹군 + 불안정한 국내 사정 + 중과부적의 여러 가지 악조건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8] 비슷한 시기에 강압적으로 통합된 웨일스는 현재 잉글랜드에 거의 동화되었다. 다만 스코틀랜드는 웨일스보다 체급이 더 크고 거리가 더 멀기에 설령 에드워드 1세가 일시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정복했어도 웨일즈를 동화시키기도 바쁜 상황에서 계속 터져나오는 스코틀랜드 게릴라 반란군을 영구적으로 진압하기에는 무리였을 가능성이 높다.[9] 에드워드 3세[10] 웨일스 공비 조앤[11] 이 중 에드먼드의 딸이 에드워드 1세의 증손자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내 켄트의 조앤이다. 즉, 흑태자는 자신의 당고모(아버지의 친사촌누이)와 결혼한 것이다.[12] 피어스 개버스턴은 에드워드 2세와는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그 사이가 너무도 가까워서 그가 마법을 걸어 에드워드 2세를 조종한다거나 혹은 서로 동성연인 관계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후에 추방당했던 개버스턴을 다시 불러들여 곁에 두고 다녔다. 그러나 개버스턴은 국왕의 최측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엉망으로 하여 귀족들의 증오를 받았고 나중에 그를 증오하던 귀족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13] 대 에드워드, 순교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14] 현재 북유럽 국가들이 그렇다. 바이킹 혹은 초기 북유럽 기독교 시대에는 넘버링을 안 썼는데, 후대 왕들이 그 시대의 옛 왕들을 고려해서 넘버링을 이어서 썼다.[15] 왕실을 포함해 초기 노르만 지배층은 잉글랜드를 자기들이 책임지고 다스리는 백성과 영토가 아니라, 그냥 식민지(...)쯤으로 생각했다. 후대의 잉글랜드인이 아일랜드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비슷하다.[16] 큰할아버지인 리처드 1세가 키 196cm이었다. 큰할아버지보다 8cm가 작았지만 그래도 엄청난 큰 키인 것은 변함이 없다.[17] 아들 에드워드 2세와 신하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략과 정책을 생각해내어 그들이 감탄할 정도다. 하지만, 잘못도 없는 신하를 그냥 밀어죽이는 등 냉혹한 모습도 보인다.[18] 실제로 에드워드 1세는 폴커크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지략으로 영화의 주인공인 윌리엄 월레스를 꺾었으나, 영화 속에서는 이 과정을 매우 찌질하고 비열하게 묘사했다.[19] 혹자는 에드워드 2세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그가 친아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에드워드 2세의 동성애 스캔들 자체는 의혹적인 면이 강하다. 더욱이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인 이사벨라 외에도 정부를 두었으며 그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기도 하였다. 만일 그의 동성애 스캔들이 사실이라면,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애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20] 게임에서는 '엘레오노라'라고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