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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4 20:06:31

존 드 멘티스

이름 존 드 멘티스
John de Menteith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멘티스 백작령
사망 1323년 (향년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멘티스 백작령
아버지 멘티스 백작 월터 불로크 스튜어트
어머니 멘티스의 메리
형제 알렉산더 스튜어트
배우자 성명 미상의 아내
자녀 존, 알렉산더, 조앤
직위 던버튼 보안관, 레녹스 백작, 클라이드 만의 영주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 윌리엄 월레스를 체포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겨서 잔혹하게 처형되는 데 일조했지만, 로버트 1세의 편에 서서 잉글랜드 왕국에 대적했다.

2. 생애

스코틀랜드의 명문가인 스튜어트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멘티스 백작 월터 불로크 스튜어트이고, 어머니는 멘티스 백작 머독의 딸로 추정되는 멘티스의 메리이다. 형으로 알렉산더 스튜어트가 있었다. 1286년 9월 20일 형 알렉산더와 함께 아버지의 수행원으로서 턴베리 성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사후 차기 국왕으로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의 왕위 주장을 지지할 목적으로 모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왕위는 1292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존 발리올이 차지했고, 그는 존 발리올에게 경의를 표했다.

129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알렉산더가 멘티스 백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1296년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형 알렉산더와 함께 존 발리올 휘하에서 잉글랜드 왕국에 대적했지만, 1296년 4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참패했을 때 형과 함께 생포된 뒤, 그 해 5월 노팅엄 성에 수감되었다. 1297년 플란데런 백국으로 가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종군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에드워드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1298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자기 영지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형과함께 윌리엄 월레스의 반군에 가담했다. 이후 1303년 9월까지는 기록상에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1303년 9월, 그는 알렉산더 맨지스 경과 함께 린리스고에 있는 잉글랜드 총독 에이머 드 발랑스를 찾아가, 스코틀랜드 수호자를 맡고 있떤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를 대신해 평화를 요청했다. 1304년 2월, 그는 존 코민 3세를 포함한 대다수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그 해 3월,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덤버튼 성의 대장이자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305년 8월 3일, 존은 글래스고 또는 그 근처에서 에드워드 1세에 끝까지 항전하던 스코틀랜드 반군 지휘관 윌리엄 월레스를 체포한 뒤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월레스를 반역 혐의로 잔혹하게 처형한 뒤, 존에게 연간 수입이 100파운드에 달하는 땅을 보상으로 줬다. 15세기의 연대기 작가 월터 바버는 존이 윌리엄 월레스를 잉글랜드 왕에게 넘긴 이후 스코틀랜드인들의 멸시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현대의 여러 학자는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예속되었고, 그는 에드워드 1세의 신임을 받고 보안관을 맡고 있었는데, 에드워드 1세의 신뢰를 저버리고 윌리엄 월레스와 협력하는 것은 자살 행위일 뿐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1306년 2월, 존 코민 3세를 덤프리스 교회에서 살해한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3월에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등극했다. 존은 로버트 1세로부터 덤버튼 요새를 넘기고 자신에게 가담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월터 바버는 존이 덤버튼 요새를 내주는 척하면서 로버트 1세를 함정에 빠뜨려 잡으려 했지만, 그의 하인이 로버트 1세에게 이를 밀고한 뒤 들우드 영지를 보상으로 받았다고 기술했다. 이후 로버트 1세의 추종자인 알렉산더 린제이가 덤버튼 성 공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306년 6월, 제5대 레녹스 백작 맬컴이 로버트 1세를 따랐다가 영지를 몰수당한 뒤, 에드워드 1세는 존을 레녹스 백작에 선임하고 영지를 넘겼다. 또한 존에게 글레슥도 교구의 임시 행정을 맡았다. 다만 멘티스 백작 칭호는 초대 헤이스팅스 남작 존 헤이스팅스에게 넘어갔다. 1306년 9월, 존은 킨타이어 반도의 자기 영지에서 로버트 1세가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두나버티 성을 포위한 잉글랜드군에게 식량과 물자를 보급했으며, 나중에 존 보테투르와 함께 두나버니 성에 입성했다. 하지만 로버트 1세는 사전에 헤브리디스 제도로 도피했기에 잡지 못했다.

1307년, 존은 스코틀랜드의 아란 섬과 기타 영토를 주장한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 모험가 휴 비셋과 힘을 합쳐, 롱쉽을 타고 아일랜드해를 돌아다니며 로버트 1세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로버트 1세는 잡히지 않았고, 헤브리디스 제도와 아일랜드에서 모집한 수백 병사와 함께 스코틀랜드 남서부 갤로웨이에 상륙한 뒤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서부 스코틀랜드의 지역 귀족 존 맥스윈과 냅데일에서 분쟁을 벌였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맥스윈을 냅데일에서 몰아내자, 맥스윈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존이 자신의 정당한 영지를 빼앗아갔다고 비난했다. 에드워드 2세는 맥스윈의 의견에 동의해 존으로부터 냅데일의 소유권을 박탈했다. 존은 이에 반감을 품고, 때마침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던 로버트 1세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가 지원해준 결과, 로버트 1세는 1308년 가을까지 스코틀랜드 대부분 지역을 재정복했다.

1309년, 존은 로버트 1세가 처음으로 연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후에도 로버트 1세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일조했고,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아일랜드 원정에 착수했을 때 일시적으로 도와줬다. 1309년 8월, 로버트 1세는 존을 자기 장인이자 제2대 얼스터 백작인 리처드 드 버러에게 사절로 파견했다. 1310년 잉글랜드와 평화 협상을 진행했지만 실패한 스코틀랜드 사절 중 한 명이었다.

로버트 1세는 존을 상대로 총 46개의 왕실 헌장을 제정했는데, 제6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월터 스튜어트를 제외한 어떤 스코틀랜드 귀족도 그만큼 왕으로부터 이같이 많은 헌장을 받지 못했다. 1316년 11월,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와 함께 요크로 가서 잉글랜드 사절단과 협상했지만, 에드워드 2세를 설득해 장기 휴전을 성사시키는 데 실패했다. 1320년, 교황 요한 22세에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청원한 아브로스 선언에 월터 스튜어트, 제임스 더글러스에 이어 3번째로 서명했다. 1323년 5월, 그는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과 협상한 끝에 13년간의 장기 휴전을 성사시켰다.

존은 로버트 1세 치하에서 레녹스 백작 작위를 포기하는 대신 클라이드 만의 영주로 인정받았고, 멘티스의 행정을 돌보는 권한을 받았다. 제10대 아솔 백작 데이비드 2세 드 스트라스보기가 멘티스의 권한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벌어졌지만, 데이비드 2세가 배넉번 전투 직전에 잉글랜드군에 가담하면서 무의미해졌다. 1321년 스트라스가트니의 행정을 맡았으며, 1323년 8월 1일 에어셔의 킨타이어 반도 남쪽 끝에 있는 글랜 브래커리와 에일사 크레이그를 받았다. 그는 1323년 말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