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15 22:03:20

존 코민 3세

이름 존 코민 3세
John Comyn III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바데녹 영지
사망 1306년 2월 10일
스코틀랜드 왕국 덤프리스 프란치스코회 교회
아버지 존 코민 2세
어머니 엘레노어 발리올
부인 잔 드 발랑스
자녀 존 코민 4세, 엘리자베스, 조앤
직위 바데녹 영주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바데녹 영주.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존 발리올을 위해 에드워드 1세와 맞섰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했다. 1306년 로버트 1세와 마찰을 벌이다가 암살당했다.

2. 생애

제2대 바데녹 영주 존 코민 2세존 발리올의 누이인 엘레노어 발리올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에서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대귀족으로,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심복이었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급사한 뒤 알락산더르 3세의 유일한 손녀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왕국의 가장 강력한 가신 중 한 명으로서 여왕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을 맡을 스코틀랜드의 여섯 수호자 중 한 명이 되었고, 포스 만 남쪽의 귀족 대표로 선출되었다. 1290년 마르그레트 여왕이 스코틀랜드로 귀환하던 중 심한 뱃멀미로 인해 오크니 제도에서 사망한 뒤,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했지만 1291년 처남인 존 발리올 지지로 선회했다.

그는 1292년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은 존 발리올의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존 발리올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에드워드 1세의 삼촌인 초대 펨브로크 백작 기욤 드 발랑스의 딸 잔 드 발랑스와 결혼했으며, 1295년경 타인데일의 월윅, 손튼, 헨쇼 등 잉글랜드 영지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1296년 존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의 지나친 간섭에 지쳐 독립을 선언했을 때 이를 지지했으며, 친척인 제7대 부컨 백작 존 코민을 포함한 스코틀랜드 귀족 7명과 함께 3월 26일 애넌데일에서 솔웨이 강을 건너 잉글랜드 북부를 습격했다. 이들은 아서렛 마을을 불태운 뒤,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지키는 칼라일로 진군해 성채를 에워쌌지만, 공성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공략할 수 없었고, 3월 28일 하루 동안 포위 공격한 뒤 철수했다.

1296년 4월 28일 던바 전투에 참전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과 함께 체포되어 잉글랜드로 끌려갔다. 에드워드 1세는 존 코민 3세의 아내 잔과 자녀들은 왕궁에서 편히 지내게 해줬지만, 존 코민을 런던 탑에 가뒀다. 아들이 인질로 잡혀 버리자, 아버지 존 코민 2세 역시 저항할 의지를 잃고 존 발리올의 폐위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국왕 등극을 받아들였다. 그 후 아버지는 잉글랜드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는 1297년에 에드워드 1세가 플란데런 백국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 맞서는 걸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뒤 런던 탑에서 풀려났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윌리엄 월레스, 앤드류 모레이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에드워드 1세는 방침을 바꿔서 코민 가문을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서 반란을 진압하는 걸 돕게 했다. 존 코민 부자는 처음에는 에드워드1세의 지시에 순종했지만, 반란이 갈수록 거세지자 마음을 바꿔 반란에 동참했다. 그는 1298년 7월 22일 폴커크 전투에 기병대를 이끌고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기병대는 잉글랜드 기병대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려 전투 초반에 도주했다.

스코틀랜드 여대기 작가 포던의 존은 존 코민 3세를 비롯한 코민 가문이 보잘것없는 신분이었다가 스코틀랜드 수호자로 떠오른 윌리엄 월레스를 질투했으며, 그가 패하기 위해 공범들과 함께 전장을 무단 이탈했다고 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코민 가문의 정적인 로버트 1세가 코민 가문을 스코틀랜드의 배신자로 낙인찍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한 걸 그대로 받아적었을 뿐이라고 추정한다. 어쨌든 폴커크 전투 패전 후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수호자 직위에서 물러나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존 코민 3세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함꼐 스코틀랜드 수호자로 등극했다. 두 사람은 폴커크 전투 이후 잉글랜드군에 함락된 스털링 성을 포위했고, 1299년 여름에는 록스버러 성도 공략하려 했지만, 그곳 수비대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취소했다. 그 대신, 셀커크 숲을 점거했고, 에든버러를 습격해 주변 민가들을 약탈했으며, 에드워드 1세를 따르던 몇 안 되는 스코틀랜드 귀족 중 한 사람이었던 사이먼 프레이저를 설득해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99년 6월 6일 새로운 원정을 위해 군대를 소집한 뒤 여름에 노섬벌랜드로 향했지만,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로 진군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털링 성 수비대는 장기간 이어진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1299년 말에 무장을 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후 셀커크 숲에서 열린 의회에서 존 코민 3세와 로버트 브루스 간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자, 의회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 주교를 세 번째 수호자로 임명해 양자를 중재하도록 했다. . 그러나 양자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로버트 브루스는 1299년 11월과 1300년 5월 사이에 수호자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 후 로버트 브루스는 갤러웨이로 가서 그곳에 사는 게일인 귀족들의 지원을 얻으려 시도했지만, 갤러웨이가 스코틀랜드에게서 독립하기를 원했던 맥두걸 가문의 훼방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00년 5월 10일, 로버트 브루스를 제외한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루더글렌에서 의회를 연 뒤, 잉그렘 드 움프라빌을 새 수호자로 선임했다.

1300년 7월,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재차 떠난 에드워드 1세는 케어러버록 성을 공략하고 수비대 일부를 교수형에 처하고 사령관 및 장교 11명을 뉴캐슬에 투옥한 뒤, 갤러웨이 깊숙이 진군했다. 그 후 그는 커크부드브라이트에서 존 코민 3세와 로버트 브루스를 상대로 이틀간 협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복위하고 발리올 가문의 영지를 반환해달라고 요구하자, 에드워드 1세는 분노하며 협상을 중단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는 크리 강으로 진군해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했지만,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자 더 이상 작전을 이끌 수 없다고 여기고 칼라일로 철수했다. 그 해 11월, 스코틀랜드 사절단이 칼라일로 찾아와서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강하게 거부하면서 내년에 스코틀랜드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무렵,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분열되었다. 램버튼, 코민, 움프라빌은 1300년 말까지 수호자로서 협력했지만, 이내 자기들끼리 이권 다툼을 일삼다가 1300년 12월과 1301년 5월 사이에 전원 사임했고, 웨스터키르크의 작은 영지를 소유한 기사 존 드 소울스가 유일한 수호자가 되었다. 1302년 존 드 소울스가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향한 뒤, 존 코민 3세가 다시 스코틀랜드 수호자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로버트 브루스가 1302년 2월 16일 애넌데일과 갤러웨이의 잉글랜드 사령관 존 세인트 존에게 귀순했고, 알렉산더 애버네시 등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도 뒤따라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1303년 1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 국경을 습격해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이에 그 해 2월, 제2대 시그레이브 남작이자 스코틀랜드 주재 국왕의 부관을 맡은 존 시그레이브가 에드워드 1세의 명령을 받들어 선봉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했다. 존 코민 3세는 적군이 3개 부대로 나뉘어 개별적으로 진군하는 걸 보고, 1303년 2월 24일 사이먼 프레이저와 함께 로슬린에 주둔하고 있던 존 시그레이브를 기습 공격했다. 존 시그레이브가 이끄는 잉글랜드 기병대는 삽시간에 와해되었고, 시그레이브를 포함한 다수의 잉글랜드인이 생포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어둠이 짙게 깔린 탓에 시그레이브가 이끈 제1부대가 전부라고 오판하고, 전리품을 분배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 사이, 2번째 잉글랜드 부대가 급보를 접하자마자 스코틀랜드인들을 향해 진격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그제야 적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즉시 그들을 향해 돌격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군을 격파했고, 두 번째 진영을 공략했다. 한편, 로버트 네빌과 윌리엄 라티머가 이끄는 3번째 잉글랜드 기병대는 다른 2개 기병대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웠다. 그들은 2개 부대가 연이어 격파된 이후에야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존 코민 3세와 사이먼 프레이저는 장병과 군마 모두 탈진했기에 후퇴해 봐야 제 속도가 나오지 않아 적의 추격으로 와해될 거라 여기고, 적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 결과, 이번에는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했고, 시그레이브는 풀려났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피해가 컸기 때문에 퇴각하는 적군을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투가 끝난 뒤, 잉글랜드군은 로슬린 숲속에 필 타워를 건설했고, 알렉산더 발리올이 이곳을 지켰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워릭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아일랜드 파견대 및 로버트 브루스가 지원한 스코틀랜드 분견대를 록스버러에서 집결한 뒤 5월 30일 출진했다. 그는 비숍스 린에 배다리를 건설한 뒤, 스털링 성을 우회하여 포스만을 건넌 후 파이프 일대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해 7월 브레친에 도착한 뒤 마울레 성을 포위해 8월 9일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에드워드 1세는 뒤이어 어콰트와 크로마티 성을 함락한 뒤, 에버딘을 거쳐 모레이 퍼스 연안에 있는 킨로스 수도원으로 진군해 9월 14일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쟁 중에 잉글랜드군이 도달한 최북단 지점이었다. 그러나 보급품이 부족했고, 스코틀랜드군이 전투를 회피하자, 잉글랜드군은 철수했다. 에드워드 1세는 11월 5일 파이프에 있던 던펌린 수도원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영지가 파괴되어 수입이 끊겨버리면서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고, 프랑스 왕국마저 더 이상 지원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게다가 에드워드 1세가 지난 원정과는 달리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코틀랜드 한복판인 던펌린 수도원에서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전쟁을 이어갈 의지를 드러내자, 그들은 전의를 잃고 협상하기로 했다. 존 코민 3세는 1304년 2월 5일 퍼스 북쪽 스트래소드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 헨리 퍼시 등과 만나 협상을 진행했다. 다만 그는 무조건 항복을 원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반란을 이끌었던 귀족들에 대해 제재하지 말라고 요구했으며, 양측 모두 무조건 포로를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1세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존 코민 3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304년 2월 9일, 스코틀랜드 수호자 존 코민 3세는 잉글랜드 국왕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뒤이어 스코틀랜드 귀족 대부분이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오직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 만이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고, 윌리엄 올리펀드가 지휘하는 스털링 성 수비대 역시 항복을 거부했지만, 윌리엄 월레스와 사이먼 프레이저는 1304년 2월 20일 해프루 전투에서 완패하고 은신했다가 나중에 체포되어 잉글랜드로 끌려갔고, 스털링 성은 1304년 5월부터 잉글랜드군에 포위되어 3개월간 공성 투석기로 얻어맞다가 7월 말에 항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전쟁을 마무리한 뒤 전후 수습에 나섰다. 그는 자기에게 저항했던 이들 대부분을 용서하고 영지를 돌려줬으며,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램버튼 주교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서 직위를 유지하는 걸 허락했다. 1305년 봄, 그는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한 뒤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 로버트 브루스, 존 모브레이를 자문위원으로 선임하여 스코틀랜드를 자기 대신에 다스리게 했고, 잉글랜드 의회에서 스코틀랜드를 대표할 스코틀랜드인 10명(주교 2명, 수도원장 2명, 백작 2명, 남작 2명, 포스 강 북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 포스 강 남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을 선출하게 했다. 여기에 로디언의 총독으로 존 시그레이브를 선임했고, 스코틀랜드 대재판장으로 존 센데일을 선임했다.

스코틀랜드 대표 10인은 1305년 9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 참석했고, 이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행정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장 드 브르타뉴가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베버코츠의 윌리엄이 재상으로, 존 샌달이 내무장관으로 선임되어 스코틀랜드 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의회는 스코틀랜드인과 잉글랜드인으로 구성된 4쌍의 판사를 임명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보안관과 성주가 임명되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에는 잉글랜드인 보안관이 맡았다. 또한 스코틀랜드 위원 22명이 구성되어 총독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는데, 이 위원의 구성원으로는 주교 4명, 존 코민 3세와 로버트 브루스를 포함한 백작 5명, 남작 9명이 포함되었다.

파일:코민의 죽음.jpg
앙리 펠릭스 엠마누엘 필리포토(Henri Félix Emmanuel Philippoteaux) 작, <코민의 죽음>, 1856년.

그러나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극비리에 램버튼 주교와 접촉해 새로운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1세가 중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1306년 2월 10일, 브루스는 덤프리스의 프란치스코회 교회에서 존 코민 3세와 만나 자기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존 코민 3세는 존 발리올이 왕이 되어야 하지, 그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이후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이다가 로버트 브루스의 지시를 받은 부하들에 의해 교회 제단 앞에서 피살되었다. 삼촌 로버트 코민 역시 그를 지키려 했다가 크리스토퍼 세튼에게 피살당했다. 같은 해 3월 25일, 로버트 브루스는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등극했고, 바데녹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전승에 따르면, 코민은 에드워드 1세에게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의회에 이 일을 보고했다. 이때 의회에 출석했던 하트퍼드 백작 랄프 드 몬테르머가 브루스에게 경고했고, 브루스는 코민을 살해한 뒤 탈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는 1306년 2월에 열리지 않았기에, 학자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간주하며, 일각에서는 브루스가 위험한 정적이 될 존 코민 3세를 배제하고 권력을 독차지하고자 암살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로버트 브루스가 교회를 떠났을 때, 존 코민 3세는 아직 살아있었다. 로버트 브루스는 로크메이벤 성으로 돌아와 친척인 제임스 린제이와 로저 커크패트릭에게 자신이 코민을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알렸다. 커크패트릭과 다른 추종자들은 교회로 달려간 뒤 심하게 다친 채 누워 있던 코민을 확인사살했다고 한다.

존 코민 3세 암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교황청은 교회에서 살인을 자행한 로버트 1세를 파문했고, 에드워드 1세는 몹시 분노해 존 코민 3세의 처남인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브루스 일당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코민과의 혈연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존 코민 3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사촌인 잔에게 어린 아들 존을 잉글랜드로 보내라고 명령한 뒤, 잉글랜드에 온 존을 왕실 자녀들의 후견인인 존 웨스턴 경의 보살핌을 받도록 했다.

그 후 코민 가문은 로버트 1세를 철천지원수로 간주하고 에드워드 1세와 뒤이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1308년 로버트 1세의 공세에 밀려 잉글랜드로 망명해야 했고, 그들의 영지는 모조리 몰수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성인이 된 존 코민 4세는 1314년 배넉번 전투에 참전했지만 전사했다. 존 코민 4세는 죽기 전에 초대 리델 남작 존 웨이크의 딸 마거릿 웨이크와 결혼해 아이메르 코민을 낳았지만, 아이메르는 1316년에 사망했고, 이로 인해 바데녹의 코민 가문은 단절되었다.

존 코민 3세에게는 아들 존 코민 4세 외에도 두 딸 조앤과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조앤은 제10대 아톨 백작 데이비드 2세 드 스트라스보기와 결혼해 제11대 아톨 백작 데이비드 3세 드 스트라스보기를 낳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제2대 탈보트 남작 리처드 탈보트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