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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5 14:44:23

장 드 브르타뉴

성명 장 드 브르타뉴
Jean de Bretagne
생몰년도 1266년 ~ 1334년 1월 17일
출생지 브르타뉴 공국 낭트
사망지 브르타뉴 공국 낭트
아버지 장 2세 드 브르타뉴
어머니 영국의 베아트리스
형제 아르튀르 2세, 마리, 피에르, 블랑슈, 엘레오노르
직위 리치먼드 백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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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이자 브르타뉴 공국의 공자.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1266년경 브르타뉴 공작 장 2세 드 브르타뉴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딸인 베아트리스츼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아르튀르 2세, 마리[1], 피에르[2], 블랑슈[3], 엘레오노르[4]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공작이자 리치먼드 백작이었지만, 잉글랜드 정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장은 외조부인 헨리 3세의 잉글랜드 궁정에서 자랐으며, 젊은 시절에는 토너먼트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군인으로서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 129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드워드 1세로부터 아키텐 공국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하자, 에드워드 1세는 이에 대응하고자 장에게 군대를 맡겨 보르도 탈환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보르도를 되찾지 못했고, 1295년 부활절에 리옹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벌어진 폭동을 피해 달아났다. 1297년 1월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와 함께 벨가르드를 포위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이렇듯 프랑스에서의 전과는 형편없었지만, 외삼촌 에드워드 1세에게 아들처럼 후대를 받았으며,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전했다. 1298년 폴커크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1300년 케어버록 공방전에 참여해 케어버록 공방전에 가담한 귀족들의 이름과 그들의 깃발에 관한 설명이 담긴 문서에 기재되었다. 이때 그의 이름은 잉글랜드 왕족 항목 바로 뒤에 기재되었다. 1305년 가을 아버지가 사망했다. 형 아르튀르 2세가 브르타뉴 공국을 물려받았고, 그는 1306년 10월 5일에 리치먼드 백작에 선임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장을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선임했고, 새 국왕 에드워드 2세도 1307년에 그의 직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에드워드 2세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해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세력을 불리는 것을 방치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하자, 장은 에드워드 2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1309년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은 피어스 개버스턴을 대신하여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는 개버스턴과 절친한 친구였지만 개버스턴과는 달리 귀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1310년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했고, 정부 통제권이 왕에서 백작들이 주도하는 개혁 위원회로 넘어갔다.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못이겨 이를 인정하기로 했고, 장은 이 위원회에 속한 백작 8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면서도 위원회 인사 중에서 왕을 옹호하는 입장을 뚜렷하게 밝혔다.

이후 필리프 4세와 외교 협상을 벌여서 아키텐 분쟁을 어느정도 해결하고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가베스턴이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 귀족들에게 처형되었다. 이후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와 함께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1313년 에드워드 2세의 프랑스 방문에 동행했으며, 1318년 에드워드 2세가 왕권을 회복하는 대가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을 사면하는 리크 조약에 서명할 때 증인을 맡았다.

1320년 에드워드 2세와 함께 프랑스로 다시 파견되었고, 1321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을 이끌었다. 1322년 에드워드 2세와 휴 르 디스펜서 부자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생포되었을 때, 토머스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가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에 보복하고자 스코틀랜드로 진군할 때 동행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는 적을 저지하지 않고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잉글랜드군이 지나갈 진군로 주변을 초토화했다. 보급품을 좀처럼 확보할 수 없자, 굶주림과 질병으로 약해진 잉글랜드군은 철수했다. 로버트 1세는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9월 30일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로 진입했다.

에드워드 2세는 적이 쫓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10월 12일,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요크셔의 노샐러튼에 도착했다. 이곳은 에드워드 2세가 머물던 리보 수도원으로부터 불과 24km 떨어졌다. 에드워드 2세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여러 귀족과 군대에 복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군이 그 사이에 그를 잡으러 진격했다. 10월 14일 아침, 노샐러튼과 리보 수도원 사이의 바이랜드 수도원에 겨우 도착한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는 스코틀랜드군을 저지했다. 이후 벌어진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장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랄프 코브햄, 프랑스 기사이자 대 술잔 담당자 앙리 드 쉴리와 함께 생포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을 피해 요크로 달아났다.

그 후 스코틀랜드에 억류되었다가 1324년 14,000 마크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장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의 외교 활동을 계속 맡았다. 1325년 3월 마지막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외교 임무로 프랑스에 파견된 뒤 남편의 명령에 따라 돌아오기를 거부한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를 옹호했다가 에드워드 2세의 신임을 잃고 리치먼드 백작위와 영지를 몰수당했다.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고 에드워드 3세가 왕위에 오른 후, 장은 리치먼드 백작위와 영지를 다시 받았다. 그 후 브르타뉴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잉글랜드 정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1334년 1월 17일 낭트에서 사망했고, 낭트의 프란치스코회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기에 자녀가 없었고, 리치먼드 백작령은 그의 조카인 잔에게 돌아갔다.


[1] 1268 ~ 1339, 생폴 백작 기 4세 드 샤티용의 부인[2] 1269 ~ 1314, 1294년까지 레옹 자작을 맡았지만, 을 지나치게 많이 구입하다가 너무 많은 빚을 져서 레옹 자작령 형 아르튀르 2세에게 팔았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플란데런 전쟁에 참여했다.[3] 1270 ~ 1327,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의 아들인 필리프 다르투아의 부인, 아르투아 백작령을 놓고 고모 마호트와 대립했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추방된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편을 들어서 백년전쟁에 참여한 로베르 3세 다르투아의 어머니.[4] 1275 ~ 1342, 퐁트브로의 제16대 수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