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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6 23:17:45

알락산더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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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알락산더르 3세
Alaxandair III
파일:알락산더르 3세.webp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이름 스코틀랜드 게일어 알락산더르 막 알락산더르
(Alaxandair mac Alaxandair)
영어 알렉산더 3세
(Alexander III)
출생 1241년 9월 4일
사망 1286년 3월 19일 (향년 44세)
재위 스코틀랜드 알바 국왕
1249년 7월 8일 ~ 1286년 3월 19일
부모 아버지: 알락산더르 2세, 어머니: 마리 드 쿠시
배우자 잉글랜드의 마거릿[1] (1251년 결혼/1275년 사별)
욜란드 드 드뢰 (1285년 결혼)
자녀 마거릿[2], 알락산더르, 데이비드

1. 개요2. 생애3. 이후의 이야기4. 가계
4.1. 자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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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30대 국왕. 둔켈드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다.

2. 생애

1241년 9월 4일 록스버러 성에서 알바 국왕 알락산더르 2세와 피카르디의 쿠시 영주 앙게랑 3세 드 쿠시의 딸 마리 드 쿠시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8살이 채 되지 않은 1249년 7월 8일,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헤브리디스 제도를 정벌하던 도중 열병에 걸려 항구도시 오반 앞바다의 케라라 섬에서 급사했고, 그가 알바 국왕이 되었다. 일주일 후인 1249년 7월 13일 스콘에서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 데이비드 드 버넘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치렀다. 당시 그가 속한 둔켈드 왕조는 단절되기 직전이었다. 알락산더르 2세의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상속자 없이 죽었고, 알락산더르 3세가 둔켈드 가문의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대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알락산더르 3세는 통치 초기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왕국을 직접 통치하지 않았고, 섭정권을 놓고 귀족들간의 정쟁이 심해졌다. 그 과정에서 두 가문이 대두되었는데, 하나는 멘티스 백작 월터 코민이 이끄는 코민 가문이고, 또 하나는 스코틀랜드 대법관 앨런 더워드가 이끄는 더워드 가문이었다. 두 가문의 정쟁으로 인해 내전의 기미가 감돌자, 스코틀랜드 봉건 영주들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에게 어린 왕의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청했다. 헨리 3세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하고, 1251년 12월 25일 요크에서 알락산더르 3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다음 날, 알락산더르 3세는 헨리 3세의 딸 마거릿과 결혼해, 헨리 3세와의 동맹을 굳건히 했다. 이때 헨리 3세는 알락산더르 3세에게 그의 생애 동안 철저히 보호해줄 테니 완전한 봉신이 되라고 제안했지만, 알락산더르 3세는 거절했다.

얼마 후, 앨런 더워드가 헨리 3세를 찾아가서 자기 아내인 마조리가 전임 알바 국왕 알락산더르 2세의 사생아인 점을 내세우며, 둔켈드 왕조의 대를 이을 사람을 거의 남자 않았으므로 마조리를 알락산더르 2세의 합법적인 자녀로 인정해 그녀를 상속인으로 삼고, 알락산더르 3세가 사망하면 자신이 알바 국왕이 되는 데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기 요청을 들어주면 알바 왕국 전체를 잉글랜드 왕국에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얼마 안가 월터 코민에게 폭로되었고, 앨런 더워드는 섭정단에서 제외되고 가믈린 주교로 교체되었다. 그 후 월터 코민은 수 년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강력한 권세를 구가했으며, 코민 가문은 알바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으로 우뚝 섰다. 여기에 헨리 3세는 알바 정계를 통제하기 위해 존 1세 드 벨리올[3] 등 신뢰하는 인사들을 요직에 앉히도록 했다.

1255년, 헨리 3세는 알바 귀족들이 중앙 정부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세력을 확장하고 무력 충돌을 일삼는 걸 빌미로 삼고, 알바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개입했다. 그는 틴데일의 워크 성에 알바 귀족들을 소집한 뒤, 월터 코민과 그의 추종자들을 나라를 잘 이끌지 못한 책임을 물어 해임하고 앨런 더워드를 섭정으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앨런 더워드 역시 알바 귀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코민 가문과 연합한 가믈린 주교를 추방했다는 이유로 알바 성직자들이 교황 알렉산데르 4세를 대신해 그를 파문했다.

1257년, 월터 코민은 국왕의 후견권을 되찾기 위해 킨로스에 머물고 있던 알락산더르 3세를 납치하고 애든버러 성에 가뒀으며, 왕실 인장도 훔쳤다. 그 후 그는 몇 달간 알바 왕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3세는 알락산더르 3세와 딸 마거릿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월터 코민은 웨일즈 공 허웰린 압 그리퍼드와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잉글랜드군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1258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알락산더르 3세는 무사히 풀려난 뒤, 복수 차원에서 월터 코민의 후계자 존 코민의 영지 일부를 몰수한 뒤 자신에게 충성하는 스튜어트 가문에게 나눠줬다. 그 결과, 스튜어트 가문이 알바 궁정에서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이후 앨런 더워드가 섭정을 맡았지만, 알락산더르 3세는 그가 왕위를 탐한다는 걸 잘 알았기에 그의 정책에 종종 반대했다.

1261년 첫째 딸 마거릿이 태어난 뒤, 알락산더르 3세는 자신이 성년이 되었으니 친정하겠다고 선언헀다. 1262년, 그는 아버지 알락산더르 2세가 13년 전에 급사하면서 중단되었던 헤브리디스 제도에 대한 공략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노르웨이 국왕으로서 헤브리디스 제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던 호콘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상당한 보상금을 줄 테니 양도해달라고 요청했다. 호콘 4세가 완강히 거부하자, 알락산더르 3세는 1263년 함대를 이끌고 스카이 섬 앞에 정박하여 알바 왕국에 복종하길 거부하는 주민들을 위협하는 시위를 벌였다.

호콘 4세는 이 소식을 듣자 직접 헤브리디스 제도로 가서 알바 왕국을 침공할 준비에 착수했다. 이에 알락산더르 3세는 아란 섬에 군대와 함께 포진한 뒤, 호콘 4세에게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회담을 질질 끌었다. 호콘 4세는 장기간의 무의미한 협상에 지친 끝에 원정을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1263년 10월 강력한 함대를 집결했다. 그러나 가을 폭풍이 닥치는 바람에 그의 함대는 심하게 파손되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노르웨이 함대는 스코틀랜드 서부에 상륙한 뒤 보급품 마련을 위해 약탈을 시도했지만, 사전에 대기중이던 알바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어진 라그르스 전투는 양측 모두 우위를 점하는 데 실패했지만, 호콘 4세의 군대는 기아의 위협에 직면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지원군을 확보하기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지만, 1263년 12월 15일 오크니 제도에서 병사했다.

호콘 4세가 사망한 후 노르웨이 왕국은 차기 왕위를 놓고 갈등이 불거졌고, 알락산더르 3세는 이를 이용해 헤브리디스 제도 장악에 착수했다. 1264년 새 군대를 규합하여 맨 섬을 침공하려 했다. 이에 맨 섬의 왕 망누스 3세가 덤프리스에서 알락산더르 3세를 알현해 충성을 맹세했다. 그 후 알락산더르 3세는 스코틀랜드 해안의 주요 섬들에 군대를 파견해 빠르게 장악했고, 정복되지 않은 섬들은 적 함대의 꾸준한 습격으로 인해 갈수록 피폐해졌다. 1266년 호콘 4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망누스 6세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알락산더르 3세와 퍼스 조약을 체결했다. 맨 섬과 헤브리디스 제도 대부분은 공식적으로 알바 왕국에 양도되었고, 알락산더르 3세는 그 대가로 4,000 마크를 지불하기로 했다. 노르웨이는 오크니와 세틀랜드 제도만을 유지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에서는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다. 1264년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헨리 3세가 반란군에 패배하고 생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락산더르 3세는 헨리 3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했다. 하지만 이듬해 이브샴 전투에서 반란군 지도자 시몽 드 몽포르가 전사하고 헨리 3세가 구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락산더르 3세는 잉글랜드 침공을 취소했다. 그렇지만 잉글랜드의 혼란은 그가 권력을 강화하고 헨리 3세의 통제에서 확실히 해방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1264년 헨리 3세와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멘테스 백작령의 계승에 간섭하려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1267~1268년, 교황 특사 오토보오노 피에스키가 알바 왕국에 찾아와서 제8차 십자군을 위해 자금을 조달해야 하니 십일조를 징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알락산더르 3세가 거부하자, 피에스키는 스코틀랜드 교회 의회를 소집하여 자금을 강제로 내주고 교황의 권한을 행사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가 십자군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자, 피에스키는 헨리 3세에게 주군의 자격으로 알락산더르 3세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알락산더르 3세가 무시하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십자군에 참여한 킬콘콰의 기사 아담이 전사했다. 그의 미망인인 캐릭의 마조리는 군주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애넌데일의 5대 영주 로버트 드 브루스와 재혼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락산더르 3세는 분노하여 캐릭의 마조리가 가진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고, 마조리의 주거지인 턴베리 성을 무력으로 접수한 뒤 포르둔 영지에 넘겼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서 마조리가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줬고, 그 영지는 이후 브루스 일족에게 상속되었다. 이렇듯 알락산더르 3세는 귀족들에게도 자신의 권위를 관철하는 데 성공했고, 알바 왕국은 그의 치세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1274년 8월 19일 헨리 3세가 사망한 후, 처남인 에드워드 1세대관식에 아내 마거릿과 함께 참석했다. 1275년 마거릿이 사망한 뒤, 알락산더르 3세는 잉글랜드의 성 토마스 수도원에 순례를 갔다가 그곳에서 에드워드 1세를 접견하고 충성을 서약했다. 그 후 맨 섬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시 군대를 파견했고, 1275년 10월 8일에 맨 섬 반군이 섬멸되었다. 이후 알락산더르 3세는 헤브리디스 제도를 좀더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자기 아들이자 상속인인 알락산더르를 '맨 섬의 군주'로 선포했다.

1278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국경 설정과 관련된 분쟁이 벌어지자, 귀족과 주교로 구성된 잉글랜드-알바 합동 의회가 구성되었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 후 알락산더르 3세는 웨일즈 공 허웰린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함께 참석한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재차 서약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알바 왕국과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알락산더르 3세 측은 그가 소유한 잉글랜드 내 영지에서만 유효하다고 여겼지만, 에드워드 1세는 알바 왕국 전체까지 포함되었다고 여겼다. 훗날 에드워드 1세는 스코를랜드 정복 전쟁을 단행했을 때 이 때의 일을 명분으로 삼았다.

1281년, 알락산더르 3세는 노르웨이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딸 마거릿과 새로운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 후 상속인인 알락산더르의 신부를 찾는 데 착수한 끝에, 1282년 11월15일에 플란데런 백작 담피에르의 기의 딸인 플란데런의 마르그리트와 결혼시켰다. 이렇게 결혼 동맹까지 맺으면서, 알바 왕실의 지위는 안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1281년에서 1284년 사이에, 알락산더르 3세의 세 자녀 데이비드, 마거릿, 알락산더르가 차례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알락산더르 3세의 모든 후손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손녀이자 마거릿 공주의 유아 딸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 뿐이었다. 알락산더르 3세는 스콘에서 긴급 의회를 소집했고, 백작 13명, 성직자 11명, 영주 25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왕의 요구에 따라 마르그레트를 알바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알바 왕국에서 여왕이 등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데다, 당시 마르그레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녀가 왕위에 오른다면 알바 귀족들이 그대로 인정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걸 잘 알았던 알락산더르 3세는 아들을 낳기 위해 재혼을 서둘렀고, 1285년 10월 14일 또는 11월 1일 제드버러에서 드뢰 백작 로베르 4세의 딸 욜란드와 재혼했다. 이후 욜란드가 임신하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던 1286년 3월, 알락산더르 3세는 아내가 있는 킹혼으로 가려 했다. 그는 거친 풍랑을 무릅쓰고 에든버러에서 포스만을 건너 버키싱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누추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지 않다며, 3월 19일 밤에 스코틀랜드 시골을 횡단해 킹혼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측근들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는 건 너무 위험하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왕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 후 행진하던 중 비바람이 더욱 심해지고 안개가 짙게 깔리면서 군주와 그의 호위대가 분리되었다. 알락산더르 3세는 자기가 모르는 지역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말을 절벽 가장자리로 몰고 갔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그 후 킹혼에 도착한 호위대는 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몇 시간 동안 수색했고, 다음날 아침 절벽 아래에서 왕과 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의 유해는 즉시 수습되어 던펌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나라를 잘 이끌던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알바 왕국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시와 발라드가 지어졌다. 일각에서는 에드워드 1세가 암살자들을 보내 알락산더르 3세를 살해했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3. 이후의 이야기

남편이 허망하게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욜란드 왕비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여파로 아기를 사산했다. 이리하여 둔켈드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후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 갤러웨이의 여성 영주 데르보트길라와 남편 존 1세 드 발리올을 비롯한 여러 대귀족이 왕위를 놓고 도전했지만 좀처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차기 국왕이 수년간 세워지지 않아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알바 왕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도 허물어졌다. 결국 귀족들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를 새 군주가 선택될 때까지 왕국을 다스릴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받들었다.

1289년, 로버트 브루스와 존 1세 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그러나 마르그레트는 1290년에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선박을 타고 이동하던 중 뱃멀미에 시달리다 급사했다. 이후 수많은 인사들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했지만, 좀처럼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들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들 중 가장 적합한 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스코틀랜드를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스코틀랜드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간섭에 시달린 끝에 프랑스 왕국과 손잡고 독립을 선언했고, 에드워드 1세는 주군에게 반역을 저지른 봉신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병합하려는 에드워드 1세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스코틀랜드인 간의 수십년에 걸친 전쟁이 벌어졌다.

18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추락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큰 돌로 만든 켈트 십자가 세워졌다.

4. 가계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노르웨이의 왕비 마르그레트
(Margaret, Queen of Norway)
1261년 2월 28일 1283년 4월 9일 에이리크 2세
슬하 1녀[4]
1남 스코틀랜드의 왕세자 알락산더르
(Alexander, Prince of Scotland)
1264년 1월 21일 1284년 1월 28일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2남 데이비드 왕자
(Prince David)
1272년 3월 20일 1281년 6월

5. 여담

위스키 달모어 킹 알렉산더 3세의 유래가 된 국왕이기도 하다. 사냥에 나갔을 때 거대한 뿔을 가진 사슴에게 공격당할 위험에 처했는데 동행한 유력가문인 맥켄지 클랜의 초대 당주인 콜린 피츠제럴드가 창으로 사슴을 찔러죽여 왕을 구하는 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왕실만이 사용 가능한 사슴문장을 내려주게 되었고 클랜의 후손이 달모어 증류소를 인수하면서 위스키에 이 사슴을 박아넣게 된다.


[1] 헨리 3세의 딸[2]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의 어머니[3] 훗날 스코틀랜드 국왕이 될 존 발리올의 아버지다.[4]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