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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3대 국왕 제임스 1세 James I | |
16세기 상상화 | |
왕호 | 제임스 1세 (James I) |
별칭 | 포로왕 (the captive) |
출생 | 1394년 7월 25일 |
사망 | 1437년 2월 21일 (향년 42세) |
재위기간 | 1406년 4월 4일 ~ 1437년 2월 21일 |
대관식 | 1424년 5월 21일 |
배우자 | 조앤 보퍼트[1] (1424년 결혼) |
자녀 | 마거릿, 이사벨라, 조앤, 알렉산더, 제임스 2세, 엘리노어, 메리, 아나벨라 |
아버지 | 로버트 3세 |
어머니 | 아나벨라 드루몬드 |
형제 | 데이비드, 로버트, 마거릿, 메리, 에지디아, 엘리자베스 |
1. 개요
<colbgcolor=#0065bd><colcolor=#ffffff> | |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
중세 스코트어: Iames I
영어 & 스코트어: James I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간혹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1세와 혼동하기 쉽다. 둘 다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왕위 기준으로는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 스튜어트 가문의 먼 후손이다. 아무래도 영국사가 잉글랜드 위주로 다뤄지기 때문에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더 유명하다.
2. 생애
2.1. 초년기
1394년 7월 25일, 던펌린 수도원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와 스토브홀의 지주 존 드루몬드의 딸인 아나벨라 드루몬드의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던펌린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01년 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년 후 그의 형엔 로스세이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와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납치된 뒤 올버니의 포클랜드 성에 갇혀있다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402년 9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심각한 약탈을 가하고 복귀하다가 호밀돈 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역습으로 궤멸되었다. 이때 올버니 공작과 함께 스코틀랜드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생포되었다. 또한 로스 백작 알렉산더 레슬리, 마르의 영주 말콤 드루몬드가 사망했다. 이후 1402년과 1406년 사이에 로스, 모레이, 마르 백작령에는 성인 지도자가 없었고, 더글러스 백작은 런던 탑에 갇혀 지내게 되면서, 스코틀랜드 정계에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 권력 공백은 국가 정치에 그동안 관여하지 못했던 영주들이 채웠는데, 특히 오크니 백작 헨리 싱클레어와 비가르의 데이비드 플레밍 경이 로버트 3세와 동맹을 맺고 새로운 권력자로 떠올랐다.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이에 대응해 형제인 부컨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와 조카 알렉산더와 동맹을 맺었다.
1404년 12월, 로버트 3세는 에어셔와 클라이드 만 주변의 스튜어트 가문 영지를 아들 제임스에게 하사했다. 이후 제임스는 세인트앤드루스의 주교 헨리 위드로의 후견을 받으며 자랐다. 1405년 겨울, 로버트 3세는 올버니 공작이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제임스를 해치려할 것을 우려해 프랑스로 망명 보내기로 했다.위드로 주교는 왕의 지시에 따라 1406년 2월 제임스를 오크니 백작 헨리 싱클레어와 데이비드 플레밍에게 보냈다. 이후 귿르은 로디언 방면에서 추종자들을 동원한 뒤 더글러스 백작령에 속한 동부 로디언으로 진군했다. 그러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아들인 발베니의 제임스 더글러스 경과 그의 추종자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롱 허미스턴 뮤어에서 플레밍을 기습 공격해 살해했다. 오크니 백작은 제임스와 함께 포스 만에 있는 베이스 록 섬으로 피신했다.
그 후 한달간 그곳에 머물던 제임스와 오크니 백작은 단치히에서 온 프랑스행 배인 메리엔크나이트 호에 탑승한 뒤 프랑스로 항해했다. 그러나 플램버러 해드 근해에서 잉글랜드 해적에게 나포된 뒤,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에게 끌려갔다. 로버트 3세는 아들이 붙잡혀 잉글랜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깊은 상심에 빠졌고, 1406년 4월 4일 사망했다. 그리하여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포로가 된 채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다.
2.2. 잉글랜드 포로 생활
헨리 4세는 어린 제임스를 스코틀랜드 왕족으로서 잘 대접했고, 좋은 교육을 제공했다. 그는 오크니 백작 헨리 싱클레어, 데이비드 플레밍의 조카 알렉산더 시튼, 그리고 오크니 백작의 동생 존 싱클레어를 포함한 소규모 스코틀랜드 수행단을 거느렸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종종 그를 알현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제임스를 다른 스코틀랜드 포로들과 함께 런던 탑에 가뒀다. 이는 장차 프랑스 원정을 단행하려는 헨리 5세가 스코틀랜드 측이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걸 방지하려면 그를 확실히 가둬두는 편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때 그와 함께 갇힌 스코틀랜드 인사 중에는 올버니 공작의 아들인 머독 스튜어트도 있었다.1415년 프랑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헨리 5세는 제임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포로들을 런던 탑에서 풀어주고 윈저 성에서 자유롭게 지내게 해줬다. 1420년, 제임스는 헨리 5세의 두 번째 프랑스 원정에 동행했다. 파리 남동쪽 마을인 멜룬을 공략한 뒤, 헨리 5세는 프랑스군과 함께 하다가 생포된 스코틀랜드 장병들을 제임스에 대항한 역적으로 간주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제임스는 1421년 2월 23일 발루아의 카트린의 잉글랜드 왕비 대관식에 참석했고, 왕비의 바로 왼쪽에 앉아 귀족들의 경의를 받았다. 1421년 3월 잉글랜드 전역을 돌아다닌 헨리 5세의 행렬에 동행했고, 성 조지의 날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21년 헨리 5세의 세 번째 프랑스 원정에 동행했고, 7월 18일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과 함께 드뢰 공방전을 이끄는 공동 사령관으로 선임되어 8월 20일 드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1422년 8월 33일 헨리 5세가 질병으로 사망한 뒤, 9월에 헨리 5세의 시신을 런던으로 데려가는 호위대의 일원을 맡았다.
헨리 5세 사후 잉글랜드 왕이 된 갓난아기 헨리 6세 대신 나라를 이끈 섭정 의회는 제임스 1세를 스코틀랜드로 조속히 돌려보내려 했다. 1416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뒤 1420년 아버지 사후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은 머독 스튜어트는 제임스 1세가 돌아오면 주권을 그에게 넘기게 되기 때문에, 제임스 1세의 복귀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귀족이 자국 군주가 잉글랜드의 포로로 장기간 지내는 것을 수치로 여겨 어떻게든 풀려나게 해야 한다고 촉구하자, 마지 못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423년 8월 잉글랜드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1424년 3월 28일 더럼에서 60,000마르크에 달하는 몸값이 책정되었다. 제임스 1세는 1424년 2월 12일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의 딸 조앤 보퍼트와 결혼한 뒤 18년 만에 풀려나 1424년 4월 5일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뒤 머독으로부터 섭정의 인장을 받았다.
2.3. 스코틀랜드 국왕
2.3.1. 복수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제임스 1세는 1424년 5월 21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는 머독 스튜어트의 아들인 알렉산더 스튜어트를 포함한 18명의 젊은 귀족들을 기사에 서임했다. 이후 그는 의회에서 왕실의 전임 왕족과 후견인들의 후원을 철회함으로써 왕실 수입 증대를 목표로 하는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시켰고, 이를 통해 더글러스 백작과 마르 백작에 세관에서 거액을 가져가는 걸 막았다. 그러면서도 올버니 공작을 비롯한 강력한 대귀족들의 자문을 받아 통치를 이어가면서, 그들의 불만을 사지 않도록 조심했다.그러던 1424년 8월, 머독 스튜어트의 이복 형제인 부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했고, 스코틀랜드군은 궤멸되었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이복형제와 올버니 가문의 든든한 동맹이었던 더글러스 백작의 허망한 죽음으로 인해, 올버니 가문의 위세가 약화되었다. 제임스 1세는 이 때를 틈타 지난날 형을 죽이고 자기가 오랜 세월 잉글랜드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섭정으로서 권세를 누렸던 올버니 가문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1424년 10월 12일, 제임스 1세는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멜로즈 수도원에서 만나 멜로즈 수도자 존 포고를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 데 합의했다. 이때 그는 올버니 가문의 동맹 세력이었던 더글러스 백작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더해, 올버니 가문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었던 아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 마르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등도 포섭해 올버니 가문을 칠 때 동참하도록 했다.
1425년 3월 25일, 제임스 1세는 올버니 공작 머독 스튜어트, 장남 월터 스튜어트, 차남 알렉산더 스튜어트, 머독 스튜어트의 아내 레녹스의 이사벨라를 긴급 체포했다. 머독 스튜어트와 월터 스튜어트, 알렉산더 스튜어트 부자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갇혔다가 캐러버록 성으로 이송되었고, 이사벨라는 탄탈론 성으로 보내졌다. 머독 스튜어트의 또다른 아들인 '뚱뚱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아일랜드로 망명했다. 1425년 5월 18일, 스털링 성에서 열린 의회에서 머독의 이복 삼촌인 아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 첫번째 사촌인 마르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 등 7명의 백작과 14명의 하급 귀족이 배심원으로 참석한 가운데, 머독은 두 아들 월터, 알렉산더, 장인인 레녹스 백작 던컨과 함께 끌려왔다. 그들은 제임스 1세를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하룻동안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뒤, 5월 24일 스털링 성 앞 헤딩 힐에서 공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올버니 가문이 가졌던 모든 작위와 영지는 왕실에 몰수되었다.
이후 제임스 1세는 로버트 1세 이래 왕실 재산의 분산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마르, 마치, 스트래선 백작령과 셀커크, 위그타운 등 더글러스 백작령 일부의 거래에 법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트래선과 마치는 각각 1427년과 1435년에 몰수되었고, 마르 백작령은 1435년 백작이 사망한 뒤 왕실에 돌아갔다. 셀크커, 위그타운 등은 즉시 몰수되었다. 또한 제임스 1세는 과세를 통해 재정난에 시달리던 왕실 수입을 늘리고자 했고, 1424년 의회에서 자신이 잉글랜드에 보낼 몸값 지불에 사용할 세금을 추가로 걷는 법안을 통과시켜서 26,000파운드를 받은 뒤 12,000 파운드만 잉글랜드에 보내고 나머지는 그대로 가졌다. 1429년 이후에는 몸값 지불을 완전히 중단하고, 나머지 세금 수입을 플란데런 백국에서 온 대포와 사치품 구매에 사용했다. 1425년 린리스고 궁전이 화재로 피해를 입자, 린리스고 재건 공사에 착수했다. 이 공사에 쓰인 비용은 왕실 수입의 10분의 1에 달했고, 공사는 제임스 1세가 1437년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2.3.2. 하이랜드 원정
1428년 7월, 제임스 1세는 퍼스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오크니 백작이 스코틀랜드 왕실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하는 걸 규탄하며, 그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 자금을 모집했다. 이후 하이랜드에 거주하는 게일족 지도자들을 인버네스에서 열린 의회에 소집한 뒤 그 중 50명을 체포했다. 이중에는 제3대 아일랜드 영주 알렉산더와 그의 어머니인 로스 백작부인 마리오타도 포함되었다. 몇몇은 처형되었지만, 알렉산더와 마리오타를 제외한 나머지는 곧 풀려났다. 알렉산더의 삼촌 존 모르는 돔날 씨족 지도권을 맡으라는 왕의 지시를 받았지만, 알렉산더가 풀려나지 않으면 왕과 어떤 거래도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고, 이로 인해 왕의 대리인에의해 체포된 후 살해되었다.얼마 후, 알렉사더는 왕실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존 모르의 아들 도날드 발로크와 로카버의 알래스데어 카라크와 손잡고 1429년 봄 인버네스 성을 침공했다. 여기에 얼스터에서 조용히 지내던 '뚱뚱한' 제임스 스튜어트를 데려와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뚱뚱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 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제임스 1세는 반란을 일으킨 하이랜드 영주들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스코틀랜드 왕실군은 6월 21일 로카버에서 반군과 맞붙었고, 알렉산더는 이탈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패배했다. 알렉산더는 아이슬레이로 피신했고, 제임스 1세는 7월에 딩월 성과 어커트 성을 함락했다. 이후 포병을 증강한 제임스 1세는 아이슬레이를 압박했다. 알렉산더는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 했지만, 제임스 1세로부터 완전한 복종을 요구받자 받아들였다. 그 후 제임스 1세는 하이랜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마르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를 왕실 부관으로 삼아 그곳 통치를 위임했다.
1431년 9월, 2년 전 제임스 1세의 원정으로 통치권을 뺴앗겼던 돔날 씨족의 알렉산더는 다시 거병해 마르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를 상대로 인버로키와 케이스네스의 텅 인근에서 잇달아 격파했다. 제임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해 하이랜드에 대한 원정을 재차 일으키려 하니 군자금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의회는 하이랜드의 귀족들과 추가적인 갈등을 벌이는 걸 강력하게 반대했다. 의회의 입장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제임스 1세는 돔날 씨족의 알렉산더의 위헙 행위를 용서하고 사면하기로 했고, 알렉산더는 스코틀랜드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주권을 되찾았다.
2.3.3. 교회 통제 정책
제임스 1세는 교회를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수도원이 문란해졌다고 지적하며, 엄격한 질서를 갖춘 공동체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그는 수도원장을 감독하는 의회를 구성하고, 퍼스에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을 설립해서, 이 수도원이 다른 수도회에 모범을 보여주도록 했다. 또한 던블레인, 던켈드, 글래스고, 모레이 주교구에 주교를 임의로 임명함으로써, 그곳의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다. 1425년 3월에는 의회에서 모든 주교가 자기에게 속한 성직자들에게 왕과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도록 지시하라고 권고했다. 1426년, 의회는 이 칙령을 더욱 강화해, 모든 미사에서 왕과 가족들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모든 사람은 왕의 법률과 법령에 의해서만 통치된다는 법률을 제정했다. 또한 고위급 성직자들이 교황청으로 여행하는 걸 규제했으며, 성직자 직책을 구매하는 권한 역시 제한했다.1431년 12월 14일, 바젤 공의회가 열렸다. 1433년, 제임스 1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요청에 따라 주교 2명, 수도원장 2명, 고위 인사 4명을 대표단으로 선임해 바젤 공의홰ㅣ에 참석하도록 했다. 1434년부터 1437년까지 28명의 스코틀랜드 성직자가 간헐적으로 참석했지만, 고위 성직자 대부분은 대리인을 보냈다. 한편, 에우제니오 4세는 특사인 우르비노 주교 안토니오 알탄에게 제임스 1세를 찾아가서 1426년에 제정한 교회 규제령을 폐지하라고 권고하게 했다. 우르비노 주교는 1436년 12월에 스코틀랜드에 도착해 교황의 뜻을 전했고, 제임스 1세는 이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437년 2월 21일 제임스 1세가 암살되면서, 교황 특사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2.3.4. 외교 정책
14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랭스 대주교 르노 드 샤르트르를 스코틀랜드로 보내 양국간의 동맹을 갱신하자고 설득했다. 제임스 1세는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자기 딸 마거릿과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결혼, 생통주 지방을 자신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했고, 사절단은 받아들였다. 샤를 7세의 조약 비준은 1428년 10월에 이뤄졌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자기를 잘 대접해준 잉글랜드 왕실에 지극히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프랑스를 위해 잉글랜드와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잉글랜드와 1436년까지 이어지는 휴전 협약을 맺었고, 마거릿을 프랑스에 보내주지 않았다.1435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평화 협상이 결렬되자,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국과 아미앵 협약을 맺었다. 그러는 한편, 스코틀랜드 측에 전쟁 참여와 마거릿 공주와 도팽 루이의 약속된 결혼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1436년 봄, 마거릿이 프랑스로 보내졌고, 1436년 5월 휴전 계약이 만료된 뒤 8월에 스코틀랜드가 전쟁에 참전했다. 제임스 1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 국경 요새인 록스버러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요크와 더럼의 성직자들이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록스버러를 구하러 진군하자, 그는 포대와 물자를 모조리 버리고 퇴각했다.
1436년 10월, 제임스 1세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서 잉글래드에 대한 추가 공세를 벌이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자 킨폰트의 로버트 그레이엄 경이 왕을 전면에서 비판했다. 이 인물은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와 머독 스튜어트 부자를 섬겼고, 1425년 머독 스튜어트 일가가 제임스 1세에게 처형된 뒤 던바 성에 투옥되었다가 1428년에 풀려났다. 그는 왕이 록스버러에서 무능한 전술 역량을 보이는 바람에 값비싼 포대와 물자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장병들이 비참하게 퇴각해야 했는데, 불과 2달 만에 또다시 막대한 군자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힐난했다. 왕이 그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자, 로버트 그레이엄은 부하들을 선동해 왕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제임스 1세는 그를 체포해 퍼스의 지하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로버트 그레이엄은 간수를 매수해 탈출한 뒤, 제임스 1세를 살해하기로 작정했다.
2.4. 암살
제임스 1세의 삼촌인 아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는 1425년 제임스 1세가 올버니 가문을 무너뜨릴 때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왕의 신임을 얻어 스코틀랜드 대법관에 선임되었고 스트래선 백작령을 받았다. 또한 그의 손자인 로버트는 왕의 시종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월터 스튜어트는 로버트 그레이엄의 설득에 따라 제임스 1세 암살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 일각에서는 제임스 1세를 죽이고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려는 야심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일부는 제임스 1세를 대신해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진 그의 아들 데이비드가 1434년 잉글랜드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임스 1세에게 반감을 품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 올버니 가문을 섬겼던 기사 로버트와 크리스토퍼 챔버스 형제도 가세했다.얀 루이켄(Jan Luyken) 작, <제임스 1세의 암살>, 1698년.
1437년 2월 4일, 퍼스에 있는 아솔 중심가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때 제임스 1세는 왕비 조앤 보퍼트와 함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 해 2월 20일 저녁, 왕과 왕비는 자기 방에 있었고 대부분의 하인들과 떨어져 지냈다. 아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의 손자이자 왕의 시종장 로버트 스튜어트는 로버트 그레이엄과 챔버스 형제가 이끄는 공모자 30명이 건물 안에 들어가는 걸 허용했다. 그들이 방에 들이닥치자, 제임스 1세는 급히 하수구 터널에 숨으려 했지만 출구가 막혀 있는 바람에 실패했고, 곧 피살되었다. 한편 왕비 조앤 보퍼트도 피습을 당해 부상을 입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여섯 살이었던 제임스 왕자와 함께 탈출했다.
그 후 조앤 보퍼트의 지지자인 앵거스 백작 모레이와 윌리엄 크라이튼이 사병대를 동원해 조앤에 가세했고, 아솔 백작도 이에 맞서 군대를 동원했다. 양자는 3월 첫째주까지 팽팽하게 대치했고, 교황 특사 우르바노 주교는 평화를 맺을 것을 촉구했지만 무시당했다. 3월 7일, 조앤 왕비는 참혹하게 살해된 남편의 유해를 퍼스 시민들에게 공개해, 반역자 세력에 저항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시민들이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전의를 상실한 아솔 백작의 사병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월터 스튜어트는 앵거스 백작에게 생포된 뒤 에든버러의 톨부스 성에 갇혔고, 그곳에서 재판을 받은 뒤 1437년 3월 26일 제임스 2세의 대관식 다음 날 처형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월터 스튜어트의 처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첫째 날에는 크레인이 달린 수레에 실려 올라갔다가 떨어진 후 온 몸을 잡아당겨 관절을 뽑고는 칼을 채운 채 '모든 반역자의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달궈진 쇠 왕관을 썼고, 둘째 날에는 허들에 묶인 채 에든버러의 중심가를 걸어가며 조리돌림당했으며, 셋째 날에는 산 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스튜어트가 보는 앞에서 내장을 불태운 후 심장을 꺼내 찢은 후 불태우는 방식으로 끔찍하게 처형당한 것도 모자라 그 시체는 참수되고 네 토막이 나며 왕국 각 지역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2] 암살범의 나이가 당대 기준으로는 매우 고령인 77세였던 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잔혹한 형벌이었는지 당시 교황 대사였던 비오 2세는 "국왕 살해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더 큰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 대한 처벌이 더 큰 것인지" 판단할 수 없어 당황했다고 한다.
암살자들의 지도자인 로버트 그레이엄은 며칠 후 체포된 뒤 스털링 성에서 열린 의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자기가 왕을 살해한 일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당신들이 제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토록 잔인한 폭군을 죽임으로써 당신들과 스코틀랜드 국민 모두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그레이엄은 4월 9일에 처형되었다. 그 후 조앤 보버트는 한동안 섭정을 맡다가 1437년 6월 의회에서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섭정으로 선임되면서 물러난 뒤 1439년 7월 로른의 기사 제임스 스튜어트와 재혼했다. 제임스 1세의 유해는 퍼스의 치터 하우스에 안장되었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제임스 1세 (James I) | <colbgcolor=#fff3e4,#331c00> 로버트 3세 (Robert III) | <colbgcolor=#ffffe4,#323300> 로버트 2세 (Robert II) | |
월터 스튜어트 (Walter Stewart) | |||
마조리 브루스[3] (Marjorie Bruce) | |||
엘리자베스 뮤어 (Elizabeth Mure) | |||
아담 뮤어 (Adam Mure) | |||
요안나 커닝험 (Joanna Cunningham) | |||
아나벨라 드루몬드 (Anabella Drummond) | |||
존 드루몬드 (John Drummond) | |||
맬컴 드루몬드 (Malcolm Drummond) | |||
마거릿 그레이엄 (Margaret Graham) | |||
메리 몬티펙스 (Mary Montifex) | |||
윌리엄 몬티펙스 경 (Sir WIlliam Montifex) | |||
마거릿 조안 그레이엄 (Margaret Joan Graham)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프랑스의 도핀 마르그리트 (Margaret, Dauphine of France) | 1424년 12월 25일 | 1445년 8월 16일 | 루이 11세 |
2녀 | 브르타뉴 공작부인 이자벨 (Isabella, Duchess of Brittany) | 1426년 | 1494년 10월 13일 |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 슬하 2녀 |
3녀 | 모튼 백작부인 조앤 (Joan, Countess of Morton) | 1428년 | 1493년 6월 22일 | 초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라스 슬하 2남 2녀 |
1남 | 로스시 공작 알렉산더[4] (Alexander, Duke of Rothesay) | 1430년 10월 16일 | 1430년 10월 16일 | |
2남 | 제임스 2세 (James II of Scotland) | 1430년 10월 16일 | 1460년 8월 3일 | 헬러의 마리아 슬하 4남 2녀[5] |
4녀 | 오스트리아 대공비 엘레오노레 (Eleanor, Archduchess of Austria) | 1433년 | 1480년 11월 20일 | 오스트리아 대공 지기스문트 |
5녀 | 부컨 백작부인 메리 (Mary, Countess of Buchan) | 1434년 혹은 1435년 | 1465년 3월 20일 | 울퍼트 6세 반 보르셀렌 슬하 1남 1녀 |
6녀 | 헌틀리 백작부인 아나벨라 (Annabella, Countess of Huntly) | 1436년 | 1509년 | |
슬하 1남 1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