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32:21

아치볼드 더글러스(제4대 더글러스 백작)

성명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생몰년도 1369년 ~ 1424년 8월 17일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더글러스 백작령
사망지 프랑스 왕국 베르뇌유
아버지 아치볼드 더글러스
어머니 조앤 드 모라비아
형제 제임스, 마조리, 헬렌, 엘레노어
아내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자녀 아치볼드, 엘리자베스, 윌리엄, 제임스, 마조리
직위 제4대 더글러스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으나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369년경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초대 스트래턴 백작 모리스 드 모라비아의 딸인 조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제임스[1], 마조리[2], 헬렌[3], 엘레노어[4]가 있었다. 1390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의 딸인 마거릿과 결혼했다. 이후 아버지로부터 에릭크 포레스트, 로더데일, 로마노브릿지, 피블스셔의 통치권을 부여받았다. 1400년 6월 4일 로버트 3세로부터 종신 에딘버러 성의 순경으로 선임되었으며 매년 200 머크[5]의 연금을 받았다.

1400년, 던바 및 마치 백작 조지 1세 드 던바헨리 '핫스퍼' 퍼시가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더글러스 가문의 영지인 이스트 로디언의 파플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는 적의 공세에 전면 대결하지 않고 산악지대에 매복하고 있다가 린턴 동부 근처의 숙영지에 주둔한 잉글랜드 분견대를 습격해 크게 격파한 뒤, 철수하는 잉글랜드군을 베릭성까지 추격했고, 콕번스패스 근처 숲에서 많은 잉글랜드 낙오병들을 학살했다. 그해 여름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가 에딘버러 성을 포위했을 때, 스코틀랜드 왕국의 호국경인 로스세이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에 이은 2인자로서 잉글랜드군에 항전했다.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군의 저항에 고전하다가 웨일즈에서 오와인 글린두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웨일즈로 돌렸다. 1400년 12월 24일 아버지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사망한 뒤 제4대 더글러스 백작이 되었으며, 갤로웨이, 더글러스데일, 모레이, 클라이즈데일, 스털링, 셀커크에 이르는 아버지의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고,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 최강의 귀족이 되었다.

1402년 2월 말, 그는 올버니 공작이자 외삼촌인 로버트 스튜어트와 함께 로스세이 공작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의 장남인 데이비드 스튜어트를 납치했다. 로버트 스튜어트는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의 버그 시에 쓸 돈을 부당하게 가져가고 비어있는 세인트 앤드류스 주교구의 세속적 수입을 갈취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아치볼드는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자신의 누이이자 그의 아내였던 마조리를 박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데이비드 스튜어트를 체포한 뒤 올버니 공작령의 포클랜드 성에 감금했고,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402년 3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포클랜드 성의 구덩이 감옥에서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가 하루아침에 두 귀족에게 납치당해 감금되었다가 비참하게 죽어버린 초유의 사건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의회에 소환된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왕자의 사망과 관련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왕의 신하들은 그들에게 이와 관련해 어떠한 비난도 할 수 없었다. 이는 그들의 권세가 워낙 강해서 로버트 3세가 그들을 처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두 귀족이 왕국을 등지게 해서는 곤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로버트 3세는 1406년 9살된 차남 제임스 왕자까지 저들이 해칠 것을 우려해 프랑스로 보냈지만, 제임스 왕자는 도중에 잉글랜드 해군에 사로잡힌 뒤 18년간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지내야 했다.

1402년 6월 22일, 패트릭 햅번이 이끄는 소규모 스코틀랜드군이 네스빗무어 전투에서 지난날 잉글랜드로 망명한 스코틀랜드 귀족인 던바 및 마치 백작 조지 드 던바의 아들 조지 2세 드 던바에게 패배해 패트릭 햅번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장병 240명이 전사했다. 아치볼드는 이를 복수하기 위해 올버니 공작의 아들인 머독 스튜어트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아치볼드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100명이 넘는 남작과 50명의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이 조성되었다. 당대 연대기에는 40,000명에 달한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7,000 ~ 10,000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를 별다른 저항 없이 초토화한 뒤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호밀돈 언덕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 조지 2세 드 던바, 랄프 드 그레이스토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가로막혔다. 1402년 9월 14일에 벌어진 호밀돈 언덕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80명의 스코틀랜드 영주가 생포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사령관과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단 기사 10명만 잃었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북부 잉글랜드의 도시들에 보내졌다.[6]

헨리 4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포로가 된 스코틀랜드 남작들을 런던으로 이송하라고 요구했다.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세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헨리 4세가 퍼시 가문이 포로들의 몸값을 받는 것을 금지하면서 자신의 명령을 어기면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포로들을 런던으로 보냈다. 그러나 헨리 '핫스퍼'는 자신이 잡은 더글러스 백작을 넘기길 거부했다. 이에 헨리 4세가 연이어 질책하자,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했다. 1403년 6월 초,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에서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7]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게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글린두르의 포로로 있던 에드먼드 모티머[8]도 호응했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아치볼드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영주들도 자유를 얻는 대가로 그와 동맹을 맺었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숙부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함께 슈루즈버리로 행진하면서 오와인 글린두르와 합세하고자 했고, 아버지 헨리 퍼시도 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와인 글린두르가 미처 합류하지 못한 사이, 헨리 '핫스퍼' 퍼시의 군대는 1403년 7월 21일 슈루즈버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와 대면했다. 이어진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퍼시 반란군은 패배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그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워 제5대 스태퍼드 백작 에드먼드 스태퍼드와 기사 월터 블런트를 사살했지만 고환을 잃고 사로잡혔다고 한다.

이후 헨리 4세의 포로가 된 그는 1406년 로버트 3세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의 포로로 있던 제임스 왕자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헨리 4세에게 자신이 제임스 1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제쳐두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고 맹세한 뒤, 자신을 대신할 인질을 넘기고 사적인 일을 수행하기 위해 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는 영지로 가서 그 일을 수행한 후 지정된 날에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가서 포로 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1406년 부활절에 스코틀랜드로 간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헨리 4세는 올버니 공작이자 스코틀랜드의 최고 권력자인 로버트 스튜어트에게 아치볼드가 기사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만약 아치볼드가 돌아오지 않으면 잉글랜드에 남아있는 인질들을 처단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치볼드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고, 1413년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된 헨리 5세에게 700 메크를 지불한 후에야 인질이 풀려났다.

한편,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다툰 끝에 잉글랜드로 귀순한 뒤 스코틀랜드 왕국과 대적했던 던바 및 마치 백작 조지 드 던바는 1408년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와 올버니 공작과 화해했고, 1409년 스코틀랜드로 귀환한 뒤 애넌데일의 영주권을 아치볼드에게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마치 백작령을 돌려받았다. 이로써 아치볼드는 스코틀랜드 남서부 전체를 통제하게 되었다. 1410년, 더글러스는 자기 딸 엘리자베스를 올버니 공작의 둘째 아들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결혼시키면서, 올버니 공작과의 동맹을 굳건히 했다.

1412년 플란데런 백국과 프랑스를 잇따라 방문한 그는 파리에 도착한 후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 협상해 각자의 국가에서 상호 방어 및 공격 조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후 스코틀랜드로 귀환한 후 국경 감시관으로서 직무를 다시 시작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사정이 지극히 좋지 않아서 병사들에게 급료를 자체적으로 지급하지 못하자 스코틀랜드로 들어오는 모든 무역 상품에 대한 관세 일부를 가져가서 방위 비용에 쓸 권리를 부여받았다. 1416년, 아치볼드는 아직도 잉글랜드의 포로였던 제임스 1세의 석방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런던을 2차례 방문했다. 당시 헨리 5세는 프랑스에 원정을 떠나 있었는데, 잉글랜드 왕실의 탄압에 앙심을 품고 있던 롤라드파는 아치볼드에게 이 때를 틈타 잉글랜드를 공격한다면 자기들이 호응하겠다고 제안했다.

아치볼드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올버니 공작에게 롤라드파의 제안을 전달한 뒤, 이참에 베릭성을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함께 군대를 모집했다. 이후 올버니 공작이 베릭 성을 공격하는 동안 자신은 록스버그 성을 포위했지만, 헨리 5세의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과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가 이끄는 대군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퇴각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영내로 침입한 잉글랜드군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산악지대에 숨었고, 잉글랜드군은 테비엇데일과 리데스데일 일대를 황폐화하고 셀커크, 제드버러, 하위크 시를 파괴한 뒤 귀환했다.

1421년, 아치볼드의 아들인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사위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가 보제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협력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헨리 5세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를 전사시켰다. 두 사람은 1423년 더 많은 병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아치볼드에게 전달했다. 아치볼드는 기꺼이 프랑스를 돕기로 하고,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더글러스 가문 영지를 관리하게 한 뒤 뷰컨 백작과 함께 6,500명을 이끌고 라 로셸로 항해해 1424년 3월 7일에 상륙했다. 4월 24일 부르주에 도착해 샤를 7세의 영접을 받았고, 샤를 7세로부터 프랑스 왕국 전역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중장 직위를 받았고, 투렌 공작에 봉해졌다.

당시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이브리 성은 도팽 샤를을 지지하다가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될 기미를 보이자 1424년 8월 14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브리 성으로 전군을 집결시킨 뒤 이곳을 구하러 오는 적군을 섬멸한 후 앙주와 메인으로 진격하려 했다. 실제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이브리를 구하기 위해 이브리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노낭쿠르에 이르렀다. 하지만 베드퍼드의 군대가 이브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심각한 논쟁에 휩싸였다.

프랑스 장성들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 대규모 야전에서 참패를 겪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지형상 절대 우세하는 등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 그들은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이브리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아치볼드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의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반 잉글랜드 정서가 매우 극렬했고,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자신들이 맹활약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기 때문에 잉글랜드군과 대규모 야전을 벌일 때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크라방 전투 때 프랑스인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최선을 다해 싸우던 동족들이 몰살당했다고 여겼기에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도팽 샤를로부터 지휘권을 부여받은 장 8세 다르쿠르의 뜻대로 이브리를 구원하지 않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대신, 베르뇌유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있는 잉글랜드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잉글랜드 본대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뇌유를 무력으로 공략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기발한 꾀를 고안했다. 그들은 동포의 목에 갈고리를 씌운 뒤 피를 잔뜩 묻힌 후 베르뇌유 성채로 데려가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으며 이들은 겨우 살아남은 포로라고 소개했다. '잉글랜드 포로'로 가장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목놓아 통곡하며 "이제 잉글랜드는 끝났다. 우리는 패망했다."라고 소리지르자, 베르뇌유 수비대와 시민들은 정말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다고 착각하고 프랑스군에 귀순했다.

한편, 8월 14일 이브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베드퍼드 공작은 다음날 베르뇌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능한 한 빨리 그곳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3,000명의 부르고뉴 파견대를 피카르디에 별도로 보내 별도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눈앞에 두고 부르고뉴 부대를 다른 곳에 보낸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8월 16일 잉글랜드군이 베르뇌유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많은 노르만인들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잉글랜드군에서 이탈해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한편,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잉글랜드군이 근처에 이르자 이들과 맞붙어야 하는지를 놓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 우위이며 저들은 멀리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승리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프랑스 장군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이에 설득되었다. 그럼에도 장 8세 다르쿠르는 교전을 섣불리 벌였다가 일을 망칠까봐 망설였지만, 이번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프랑스를 떠나겠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1424년 8월 17일에 벌어진 베르뇌유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궤멸되었고, 아치볼드는 둘째 아들 제임스, 사위 뷰컨 백작과 함께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아들 제임스와 함께 투르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위그턴 백작이었던 장남 아치볼드가 더글러스 백작위를 계승했다.

3. 가족



[1] 1371 ~ 1443, 제7대 더글러스 백작[2] 로스세이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초혼, 스코틀랜드 재무장관 월터 드 핼리버튼과 재혼.[3] 에딘버러 총독인 할튼의 조지 드 로렌드르의 부인.[4] 기사 존 드 던다스의 부인.[5] merk, 중세 스코틀랜드 은화[6]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아치볼드는 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는 것을 포함해 5차례의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고 한다.[7]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8] 퍼시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내세운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