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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3:23:09

로버트 스튜어트(올버니 공작)

<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
Robert Stewart, Duke of Albany
파일:Robert Stewart, Duke of Albany.png
이름 로버트 스튜어트 (Robert Stewart)
출생 1340년
스코틀랜드 왕국 사우스 에이셔 던도날드 성
사망 1420년 9월 3일 (향년 79~80세)
스코틀랜드 왕국 스털링 스털링 성
배우자 마거릿 그레이엄 (1363년 결혼/1380년 사망)
무리엘라 키스 (1381년 결혼)
자녀 머독, 존, 로버트, 자넷, 메리, 마거릿, 조앤, 베아트리체, 이사벨라, 엘리자베스
아버지 로버트 2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무어
형제 로버트 3세, 월터, 알락산더르, 마거릿, 마조리, 엘리자베스, 이사벨라, 조앤, 캐서린
직위 초대 올버니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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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로버트 3세제임스 1세 치세에 스코틀랜드의 최고 권력자로서 국정을 진두지휘했다.

2. 생애

1340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사우스 에이셔 던도날드 성에서 당시 스코틀랜드 왕실 청지기를 맡았으며 1371년부터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로버트 2세와 에이셔의 영주인 아담 무어의 딸인 엘리자베스 무어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로버트 3세, 월터[1], 알락산더르[2], 마거릿[3], 마조리[4], 조앤[5], 이사벨라[6], 캐서린[7], 엘리자베스[8]가 있었다. 외증조부는 배넉번 전투의 승리를 이끌면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하게 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이고, 조부는 스코틀랜드의 고위 청지기를 맡은 월터 스튜어트였다.

1361년, 과거에 3차례 결혼한 뒤 미망인으로 남아있던 멘티스 여백작 마거릿 그레이엄과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으로 인해 멘티스와 파이프 백작을 칭할 수 있었다. 이후 둔 성 건설을 담당했는데, 이 성은 오늘날에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아버지 로버트 2세가 치세 동안 무기력한 행보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와 형인 로버트 3세는 스코틀랜드의 섭정으로 활약했다. 그는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최고 시종장이 되었으며, 잉글랜드 왕국으로의 여러 군사 원정과 습격 작전을 이끌었다. 1388년 12월 최근 말에 맞아 중상을 입은 로버트 3세를 대신해 단독 섭정을 맡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무법 상황, 특히 바데녹의 영주인 뷰컨 백작 알락산더르와 그의 남동생 로스의 내전을 중재하는 권한을 의회로부터 부여받은 뒤, 알락산더르의 스코샤의 재판관 직위를 박탈했다. 이 직위는 나중에 그의 장남 머독에게 넘어갔다. 이후 그와 머독은 북부에서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면서, 군도의 군주인 도널드 맥도날드 등 다른 북부 귀족들과 무력 투쟁을 벌였다. 1390년 형 로버트 3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었으나, 중병에 시달렸다. 1399년, 로버트 3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통치권을 맡았다. 1398년,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로 공작 작위가 2개 신설되었다. 데이비드는 로스세이 공작을 맡았으며, 로버트는 올버니 공작에 취임했다.

1401년, 로스세이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잉글랜드의 침략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서 에딘버러가 함락되는 결과를 초래해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또한 데이비드는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의 버그 시에 쓸 돈을 부당하게 가져가고 비어있는 세인트 앤드류스 주교구의 세속적 수입을 갈취했다. 로버트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데이비드가 자기 누이이자 그의 아내였던 마조리를 박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데이비드 스튜어트를 해칠 음모를 꾸몄다.

1402년 2월 말, 두 사람은 스코틀랜드 남부를 여행중이던 데이비드 스튜어트를 납치한 뒤 포클랜드 성에 감금했다.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402년 3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포클랜드 성의 구덩이 감옥에서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가 하루아침에 두 귀족에게 납치당해 감금되었다가 비참하게 죽어버린 초유의 사건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의회에 소환된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왕자의 사망과 관련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왕의 신하들은 그들에게 이와 관련해 어떠한 비난도 할 수 없었다. 이는 그들의 권세가 워낙 강해서 로버트 3세가 그들을 처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두 귀족이 왕국을 등지게 해서는 곤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로버트 3세는 1406년 9살된 차남 제임스 왕자까지 저들이 해칠 것을 우려해 프랑스로 보냈지만, 제임스 왕자는 도중에 잉글랜드 해군에 사로잡힌 뒤 18년간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지내야 했다.

1406년 로버트 3세가 차남 제임스 왕자가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지내는 상황에 깊이 슬퍼하다가 사망했다. 그 후 제임스 왕자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되었지만, 잉글랜드에서 계속 투옥되어 있었다. 올버니 공작은 어린 국왕의 몸값을 확보해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하는 데 거의 노력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11년 둘째 아들 존 스튜어트를 위해 로스 백작령을 확보하려 했다가 군도의 군주 도널드 맥도널드의 거센 반발을 샀다. 도널드 맥도널드는 국정을 농단하는 올버니 공작을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병했고, 양자는 1411년 7월 24일 할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양자 모두 큰 손실을 입었지만, 맥도날드가 먼저 철수했기에 올버니 공작은 승리를 주장했다. 그 후 올버니 공작은 북부로 공세를 개시해 맥도널드를 압박한 끝에 로스 백작령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왕실군은 올버니 공작의 조카인 마치 백작 알락산더르 스튜어트가 이끌었다.

한편, 프랑스 서부 도시 부르주에 본거지를 둔 샤를 도팽을 중심으로 한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갔지만, 병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프랑스의 동맹인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올버니 공작은 잉글랜드가 너무 강해지면 자국에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상당한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1419년 10월, 6,000명의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라 로셸에 상륙했다. 올버니 공작의 아들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군대를 지휘했으며, 전체 병력 중 2/3이 궁수병이었다. 그들은 앙주, 메인, 투르 및 일드 프랑스 일대의 아르마냑파 요새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뷰컨 백작과 위그턴 백작은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대파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1420년 9월 3일에 스털링 성에서 사망했고, 파이프의 덤펌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장남인 머독 스튜어트가 올버니 공작 및 스코틀랜드 섭정의 직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머독은 자신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고 1425년 18년 만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제임스 1세에 의해 반역 혐의로 대다수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3. 가족



[1] 1338 ~ 1362, 파이프 영주[2] 1343 ~ 1405, 뷰컨 백작[3] 군도의 영주(Lord of the Isles) 존의 아내[4] 모레이 백작 존 던바와 초혼, 알락산더르 키스와 재혼[5] 존 키스와 초혼, 존 라이언과 재혼, 제임스 선더랜드와 삼혼[6] 제2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 초혼, 일크의 영주 존 에드먼스톤과 재혼[7] 그루가와 레스탈리그의 영주이자 스코틀랜드 고위 제독인 로버트 로건의 부인[8] 스코틀랜드 고등 치안관 토머스 헤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