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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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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2대 국왕
로버트 3세
Robert III
파일:로버트 3세 동전.jpg
로버트 3세를 묘사한 동전(왼쪽)
왕호 로버트 3세 (Robert III)
출생 1337년 3월 5일 또는 1340년
사망 1406년 4월 4일 (향년 65~69세)
재위기간 1390년 4월 19일 ~ 1406년 4월 4일
대관식 1390년 8월 14일
배우자 아나벨라 드루몬드 (1367년 결혼 / 1401년 사망)
자녀 데이비드, 제임스 1세, 로버트, 마거릿, 메리, 에지디아, 엘리자베스
아버지 로버트 2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뮤어
형제 월터, 로버트, 알렉산더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2.3. 스코틀랜드 국왕
3. 가족

1. 개요

<colbgcolor=#0065bd><colcolor=#ffffff>
파일:Robert III_King of Scotland.jpg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스코틀랜드 게일어: Raibeart III
영어 & 스코트어: Robert III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인 로버트 2세의 장남으로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2대 왕이었다.

2. 생애

2.1. 초년기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2세와 에어셔 로왈란의 지주 아담 뮤어의 딸 엘리자베스 뮤어의 장남이다.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뮤어가 로버트 2세의 정부였다가 1347년이 되어서야 교황청의 승인을 받고 정식 부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1330년대 중후반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왕이 되기 전에는 존이라는 이름을 썼다. 1350년대에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하는데, 당시 그는 스코틀랜드의 애넌데일 침략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에넌데일은 스코틀랜드군의 연이은 공세로 스코틀랜드에 귀속되었다.

1363년, 스코틀랜드 남서족의 클라이드 만 연안과 에어 강 게곡에 위치한 카일 경이라는 칭호를 받은 존은 아버지 로버트 2세와 동생 로버트 스튜어트와 함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에 대한 반란에 참여햇는데, 이 반란에는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도 연루되었다. 하지만 로버트 2세는 그 해 5월 4일 국왕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자식들과 함께 데이비드 2세에게 귀순했다.

1363년 반란이 유야무야 처리된 후, 데이비드 2세는 1357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맺은 조약에서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 생포된 뒤 자기에게 매겨진 몸값 조건을 수정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와 재협상했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도록 하려 했고, 이것이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거부당하면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곤트의 존을 차기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 대가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해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 인질을 석방하고, 탈취한 모든 영토와 베릭 시를 반환하며, '상속권 박탈자'의 청구권을 매수하고,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들이 소유했던 잉글랜드의 모든 땅을 반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국을 오랫동안 침략해 심각한 피해를 안긴 플랜태저넷 왕조를 적대했기에, 에드워드 3세와 곤트의 존 모두 스코틀랜드의 차기 국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했다.

로버트 2세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거부 덕분에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국왕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로버트 2세는 왕의 심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왕의 의붓 아들인 존 로지에게 여러 선물을 내줬으며, 장남 존과 데이비드 2세의 새 왕비 마거릿 드루몬드의 친척인 아나벨라 드루몬드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이때 로버트 2세는 아솔 백작령을 존과 그의 아내에게 물려줬다. 1368년 6월 22일, 데이비즈 2세는 존과 아나벨라에게 캐릭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캐릭은 이전에 브루스 가문의 영지에 속했고, 데이비드 2세 본인도 1329년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로서 캐릭 백작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므로, 일부 학자들은 데이비드 2세가 로버트 2세를 제치고 존을 차기 국왕으로 삼을 생각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런 데이비드 2세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는지, 존은 아나벨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과 장녀의 이름을 각각 데이비드와 마거릿으로 지어서 선왕과 선왕비를 기렸다.

1369년, 스튜어트 가문의 스코틀랜드 왕위 게승에 새로운 위협이 생겼다. 데이비드 2세가 후게자를 낳고자 자녀를 낳지 못하는 마거릿 드루몬드와의 결혼을 취소하고, 마치 백작 존 던바의 여동생이자 자기 정부인 아그네스 던바와 결혼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던 데이비드 2세가 1371년 2월 22일 애든버러 성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존의 아버지가 로버트 2세로서 왕위에 오르면서 무산되었다.

2.2.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

1371년 3월 27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로버트 2세는 클라이드 만 주변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를 존에게 양도했다. 또한 캐존을 스콭르랜드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고, 대관식에 참석한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그를 차기 국왕으로 받들고 그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했다. 1373년에 왕위 계승 순서가 더욱 명확해졌다. 그 해 4월 4일 스콘에서 소집된 의회는 남계 계승 목록을 작성하여 왕위 계승 순서를 규정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여기에는 두 번의 결혼으로 태어난 국왕의 다섯 아들이 명시되었다. 이 문서는 캐릭 백작이 왕위 계승 순위 1위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로버트 2세의 딸들은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존과 아나벨라 부부의 자녀가 왕위를 계씅할 권리는 그의 첫재 아들인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태어난 1378년에야 확립되었다.

존은 로버트 2세 등극 후 왕국 통치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72년 초, 로버트 2세는 존을 에든버러 성의 성주이자 에든버러의 보안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존은 포스 강 남쪽의 로우랜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점차 잉글랜드에 대한 군사 작전과 외교 분야를 도맡았다. 그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를 침략했을 때 감독했으며, 휴전을 위한 외교 협상에 스코틀랜드 왕실을대표해 참여했다. 1381년 6월, 존은 전투를 대리하는 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로우랜드에 대한 영향력은 여동생 이사벨라의 남편인 제2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의 밀접한 관계로 강화되었다. 존은 나중에 자기 딸들을 더글러스 가문의 주요 인물인 갤러웨이 영주 아치볼드 더글러스, 달키스 남작 제임스 더글러스의 아들이자 상속인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결혼시켰다. 또한 존은 1377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 북부를 지속적으로 침공한 스코틀랜드 변경 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380년대 초, 이미 40세가 넘은 존은 아버지가 장수하면서 스코틀랜드를 오랫동안 통치하고, 자기 영지에 간섬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정부와 왕실 정책을 놓고 경쟁이 심화되었다. 1382년 11월 4일, 캐릭 백작의 동료인 제임스 린제이 경이 스코틀랜드의 궁내장관이디 글래미스 영주이며, 로버트 2세의 측근이었던 존 라이언 경을 살해했다. 로버트 2세는 제임스 린제이의 배후에 자기 아들과 강력한 귀족 집안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사건을 그대로 묻었다. 1382년 무렵, 캐릭 백작을 중심으로 '그림자 행정부'가 효과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왕실 정책과 행정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장차 그가 왕위에 오르기 위한 준비 작업을 은밀히 진행했다. 여기에 로버트 2세의 정책과 후원에 대한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캐릭 백작과 은밀히 접촉했다.

1384년 11월, 홀리루드에서 총회가 열렸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은 왕이 늙은 나머지 스코틀랜드의 적수인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꺼려서 왕국의 이익을 훼손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로버트 2세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의 행동 중 부주의하거나 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행동을 바꾸는 데 동의했다. 이후 총회는 캐릭 백작 존을 호국경으로 세우고 왕의 재판권을 그에게 넘기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로버트 2세는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고, 캐릭 백작이 전권을 쥐고 잉글랜드에 대한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1385년 7월, 스코틀랜드인들은 장 드 비엔이 이끄는 프랑스 원정군과 함께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친히 스코틀랜드 남부로 진군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2년간 일련의 장기 휴전 협전 협상으로 본격적인 갈등은 방지되었지만, 스코틀랜드는 1388년 여름 다시 한 번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일련의 강력한 습격을 감행했다. 그 해 8월 5일,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오터번 전투를 치렀다. 스코틀랜드군은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하고 헨리 퍼시 등 주요 잉글랜드 장성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캐릭 백작의 강력한 동지였던 제임스 더글러스가 전사했고, 캐릭 백작의 추종자인 크로포드의 제임스 린제이 경도 생포되었다.

이로 인해 캐릭 백작의 입지가 약화되자, 캐릭 백작의 동생인 파이프 백작 로버트와 그의 지지자들이 이 기회를 틈타 캐릭 백작에게 도전했다. 여기에 더글러스 가문의 상속 재산을 둘러싼 분쟁도 시작되었다. 캐릭 백작은 성급한 행동으로 처남인 맬컴 드러먼드 경이 더글러스 가문의 상속권을 주장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더글러스 백작이라는 작위를 주장했던 갤러웨이의 영주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그의 동맹인 달키스의 제임스 더글러스 경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두 사람은 곧 파이프 백작의 편에 섰다. 게다가 캐릭 백작이 말에 차이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다리를 절게 되면서, 그는 신체적으로도 무력해졌다.

1388년 12월 1일, 에든버러에서 로버트 2세의 지도하에 총회가 열렸다. 로버트 2세는 캐릭 백작이 법 행정과 왕국 방위 문제에 관해 총회 의지에 복종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이후 캐릭 백작은 북부 지역의 느슨한 사법 행정과 신체적으로 무력해진 점 등을 이유로 호국경에서 사임하라는 강요를 받고 물러났고, 파이프 백작 로버트가 새로운 호국경에 선임되었다. 그 후 존은 2년간 잠자코 지냈다.

2.3. 스코틀랜드 국왕

1390년 4월 19일, 로버트 2세가 사망했다. 당시 존은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지만,1388년에 왕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선언되었다. 반면, 그의 동생인 파이프 백작 로버트는 호국경으로서 스코틀랜드를 무난하게 다스렸다. 이에 따른 논쟁으로 대관식이 미뤄지다가, 1390년 8월 14일 스콘에서 거행되었고, 파이프 백작 로버트는 호국경을 계속 맡았다. 이때 존은 자기 이름 그대로 왕호에 쓰지 않고 '로버트 3세'를 칭했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새로운 왕의 이름 변경은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왕들의 실패한 통치와 비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들은 브리튼 제도에서는 존 발리올, 존 왕이 있었고, 프랑스까지 확대하면 장 1세장 2세가 있었는데, 모두 치세를 성공적으로 보내지 못했다. 또한 브루스와 스튜어트 지지자들은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존 발리올 후손들의 주장을 축소하려고 했기 때문에, 존이 로버트 3세로 이름을 바꾸면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스코트랜드 왕이 누구인지에 대한 어색한 질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를 당시 로버트 3세는 말에 치이는 사고로 중상을 입은 이래 신체적으로 무척 허약해져서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은 왕을 무시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며, 서로 불화를 벌이는 끝에 내전을 단행하기 일쑤였다. 특히 그의 동생이자 호국경을 맡은 파이프 백작 로버트 스튜어트와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대귀족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로버트 3세는 왕권을 어떻게든 회복하기 위해 장남이자 상속인인 캐릭 백작 데이비드를 왕실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1393년 2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의 요청에 따라 호국경을 폐지하고 로버트 3세가 주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하지만 파이프 백작은 이후에도 조카인 데이비드와 함게 왕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1395/1396년 겨울, 로버트 3세는 왕의 동의 없이 이뤄진 데이비드와 마치 백작 존 드 던바의 딸 엘리자베스 던바의 결혼을 단호하게 취소했다. 1396년 9월 28일, 로버트 3세는 퍼스 북쪽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 행사'를 직접 감독했다. 이 전투엔 카이 씨족과 퀘일 씨족에서 각각 30명의 전사가 참여했다. 이 행사는 하이랜드 중부의 불안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1398년,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로 공작 작위가 2개 신설되었다. 로버트 3세의 장남 데이비드는 로스세이 공작을 맡았고, 파이프 백작을 맡았던 로버트는 올버니 공작에 취임했다.

이렇듯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로버트 3세가 즉위한 직후 심각한 경제 침체와 통화 위기가 발생해 스코틀랜드 동전의 평가절하가 초래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재정 후원을 통해 왕권을 강화할 여력이 심각하게 제한되었고,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남아있는 왕실 세관 수입에 대한 접근을 놓고 경쟁이 심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1399년 1월, 새로운 의회에서 국왕과 관리들이 왕실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해 막대한 빚을 짊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혐의가 제기되었다. 그 결과, 3년 동안 왕국의 통치는 왕국의 총독직을 맡은 로스세이 공작과 올버니 공작이 이끄는 2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맡겨졌고, 로버트 3세 본인은 왕국의 모든 중요한 역할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 후 그는 스코틀랜드 정계에 사실상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스튜어트리에 있는 가족 영지에서 보냈다. 그러던 1401년, 로스세이 공작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잉글랜드의 침략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서 에딘버러가 함락되는 결과를 초래해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또한 데이비드는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의 버그 시에 쓸 돈을 부당하게 가져가고 비어있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구의 세속적 수입을 갈취했다.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이에 불만을 품었고, 데이비드가 자기 누이이자 그의 아내였던 마조리를 박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함께 데이비드 스튜어트를 해칠 음모를 꾸몄다.

1402년 2월 말, 두 사람은 스코틀랜드 남부를 여행중이던 데이비드 스튜어트를 납치한 뒤 포클랜드 성에 감금했다.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402년 3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데이비드 스튜어트가 포클랜드 성의 구덩이 감옥에서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가 하루아침에 두 귀족에게 납치당해 감금되었다가 비참하게 죽어버린 초유의 사건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의회에 소환된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로버트 스튜어트는 왕자의 사망과 관련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왕의 신하들은 그들에게 이와 관련해 어떠한 비난도 할 수 없었다. 이는 그들의 권세가 워낙 강해서 로버트 3세가 그들을 처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두 귀족이 왕국을 등지게 해서는 곤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스코틀랜드 왕국의 모든 권력은 1402년 5월 호국경으로 선임된 올버니 공작에게 속했고, 그의 권력은 1404년에 다시 2년간 연장되었다.

1402년 6월 22일, 헨리 퍼스조지 2세 드 던바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패트릭 햅번이 이끄는 소규모 스코틀랜드군을 네스빗무어 전투에서 격파하고 패트릭 햅번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장병 240명을 사살했다. 스코틀랜드 정계는 이에 분개했고,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총사령관을 맡고 100명이 넘는 남작과 50명의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이 조성되었다. 당대 연대기에는 40,000명에 달한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7,000 ~ 10,000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를 별다른 저항 없이 초토화한 뒤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호밀돈 언덕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 조지 2세 드 던바, 랄프 드 그레이스토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가로막혔다. 1402년 9월 14일에 벌어진 호밀돈 언덕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80명의 스코틀랜드 영주가 생포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사령관과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단 기사 10명만 잃었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북부 잉글랜드의 도시들에 보내졌다.

1404년, 로버트 3세의 둘째 아들 제임스가 왕위 계승자가 되어 캐릭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고 왕실 행정에서 왕당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후 로버트 3세는 애든버러와 린리스고에 정기적으로 출석해, 제임스 왕자의 수석 고문 중 한 명이 된 데이비드 플레밍의 영지 확대 시도를 지원했다. 그러던 1406년 2월 14일, 데이비드 플레밍은 롱 어민스톤 무어에서 빌베니의 제임스 더글러스 경에서 살해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데다, 이 무렵 병세가 악화되어 어린 아들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웠던 로버트 3세는 아들 제임스를 프랑스에 비밀리에 보내서 그들의 보호를 받게 하기로 했다.

그러나 1406년 3월 22일, 제임스가 타고 가던 배가 잉글랜드 해적에게 나포되었고, 어린 왕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에게 넘겨졌다. 그 해 4월 4일, 로버트 3세는 뷰트 섬의 로데세이 성에서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 월터 바워는 아들이 잉글랜드의 포로로 전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에 빠져 죽었다고 기술했다. 그의 유해는 페이즐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바워는 로버트 3세가 죽기 전에 자기 비문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게 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왕국 전체에서 가장 나쁜 왕과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잠들었다.

로버트 3세는 생전에 아들 셋을 뒀는데, 장남 로스세이 공작 데이비드는 올버니 공작과 더글러스 백작에게 납치된 뒤 사망했고, 둘째 아들 로버트는 1393년 유아기에 사망했다. 셋쨰 아들 제임스는 1394년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당시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가 1406년 7월 호국경으로 선임되어 나라를 대신 다스렸다. 로버트 스튜어트는 1420년에 사망했고, 뒤이어 장남 머독 스튜어트가 호국경을 맡다가, 1424년 4월 제임스 1세가 마침내 해방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면서 친정을 시작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