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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33:59

윌리엄 더글러스(초대 더글러스 백작)

성명 윌리엄 더글러스
William Douglas
생몰년도 1323년 ~ 1384년 5월 1일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더글러스
사망지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더글러스
아버지 아치볼드 더글러스
어머니 베아트리체 드 린제이
형제 존, 엘레노어
아내 마르의 마거릿, 마거릿 스튜어트(정부)
자녀 제임스, 이사벨라, 조지(사생아), 마거릿(사생아), 조앤(사생아)
직위 초대 더글러스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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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1323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더글러스에서 록스버그셔의 모어배틀, 덤프리스셔의 커칸드루스, 뷰컨의 랫트레이 및 크리몬드, 킨카딘셔의 컨버트, 리데스데일 등지의 영지를 다스렸던 스코틀랜드의 대귀족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크로포드 출신의 기사 알락산더르 드 린제이의 딸 베아트리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존과 엘레노어가 있었다. 존은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했을 때 함께 갔다가 1342년에 사망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는 게 별로 없고, 엘레노어는 케릭 백작 알렉산다르, 제임스 드 샌디랜즈, 달리의 윌리엄 투어, 코일턴의 던컨 월리스, 헤일스의 패트릭 헵번 등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다. 그는 로버트 1세의 최측근으로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맹활약했고, 레콩키스타에 참여했다가 그라나다 공방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제임스 더글러스의 조카이기도 했다.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5살의 어린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스코틀랜드 왕국의 새 국왕이 되었고, 아버지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는 잉글랜드 귀족 및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쳐들어왔고,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이를 막으려 했다가 할리돈 힐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그 후 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했고, 친척이자 대부인 리데스데일의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의 후견을 받으며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다. 1342년, 그의 삼촌이며 더글러스의 영주인 '둔한 휴(Hugh the Dull)'는 리데스데일의 압력에 굴복해 자기가 가진 영지 대부분을 윌리엄에게 넘겼다. 이후 리데스데일은 윌리엄 더글러스의 재산을 상당 부분 횡령했고, 더글러스 영지의 소유권 일부를 빼돌렸다.

1346년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와 리데스데일을 포함한 여러 귀족이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었다. 에드워드 발리올은 기 기회를 틈타 스코틀랜드로 진격해 갤로웨이 일대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다. 윌리엄 더글러스는 1348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부핟릉르 끌어모아 자신의 영지에서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전면전으로는 잉글랜드인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삼촌인 제임스 더글러스를 본받아 에트릭 포테스트와 제드 포레스트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데이비드 2세의 석방을 위해 잉글랜드와 협상한 위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353년, 윌리엄은 애트릭 포레스트에서 결투를 벌여 대부인 리데스데일을 살해했다. 그는 리데스데일이 잉글랜드 국왕과 협력하고 스코틀랜드의 이익을 배신했기에 이같은 일을 벌였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가 자신의 재산을 갈취한 리데스데일에게 원한을 품었기에 이같은 일을 벌였다고 여겼다. 이후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며 잉글랜드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1355년 부관인 댈하우지의 윌리엄 램지에게 노럼 성 수비대를 유인하기 위해 노럼 주변의 땅을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램지는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했고, 노럼 성주인 히턴의 토머스 그레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이들을 추격했다. 윌리엄은 제9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와 함께 던스에서 남쪽으로 7마일 떨어진 네스빗 무어에 매복하고 있다가 아군을 추격하던 잉글랜드군을 습격해 궤멸시켰다.(네스빗 무어 전투) 이후 윌리엄은 마치 백작, 외젠 드 가랑시에르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함께 제2대 앵거스 백작 토머스 스튜어트의 군대와 합세한 뒤 베릭을 공격해 마을을 점령했지만 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베릭 공방전)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반격해오자 철수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56년 초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갔지만, 윌리엄 등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사전에 로우랜드에 사는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키고 모든 농경지와 우물을 파괴하는 등 초토화 전술을 쓰는 바람에 식량난에 시달리다가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번트 캔들마스) 윌리엄 등은 철수하는 적을 조용히 추격했다가 멜로즈 외곽에서 기습 공격을 가했고, 에드워드 3세는 윌리엄의 부하들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가 호위병들의 분전으로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 잉글랜드로 철수했다. 이후 윌리엄은 초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 후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9월 19일 프랑스군 편에서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해 스코틀랜드 연대를 지휘했으나 패전을 면치 못하고 부상을 입은 채 겨우 빠져나갔다. 1357년 데이비드 2세의 석방 조건과 몸값에 관한 협상에 참여해, 자기가 잉글랜드에서 인질로 지내면서 국왕의 몸값을 지불할 것을 보증했다. 1358년 1월 26일 초대 더글러스 백작에 선임되었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탄탈론 성을 건설했다. 이 성은 윌리엄의 처제이자 정부인 앵거스 백작부인 마거릿 스튜어트의 집이 되었다.

1364년, 윌리엄은 로버트 2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을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리는 조건으로,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탕감하고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보장하며, 더글러스 가문의 잉글랜드 영지를 복원하는 계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1371년 로버트 2세가 등극하자 그와 화해한 뒤 1372년 사우스 오브 더 포스의 재판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수년간 잉글랜드 국경을 습격하고 적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전념하다가 1384년 5월 1일 라나크셔 더글러스에서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