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제임스 더글러스 James Douglas | |
별명 | 좋은 기사 제임스(Good Sir James) 블랙 더글러스(Black Douglas) | |
출생 | 1286년경 | |
스코틀랜드 왕국 사우스래너크셔 더글러스 | ||
사망 | 1330년 8월 25일 (향년 43~44세) | |
그라나다 토후국 테바 | ||
아버지 | 제3대 더글러스 영주 윌리엄 르 하디 | |
어머니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 |
형제 | 휴, 아치볼드 더글러스 | |
자녀 | 윌리엄, 아치볼드 더글러스 | |
직위 | 제5대 더글러스 영주,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
1. 개요
스코틀랜드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 로버트 1세의 최측근으로서 맹활약하여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끈 명장이다. 당대 스코틀랜드인은 그에게 '좋은 기사 제임스(Good Sir James)'라는 별칭으로 불렀고, 잉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북부를 연이어 습격해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그를 몹시 두려워해 '블랙 더글러스'(Black Douglas)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2. 생애
2.1. 초년기
제3대 더글러스 영주 윌리엄 르 하디와 스코틀랜드 고위 집사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외아들이다. 윌리엄 르 하디는 두번째 아내 엘레노어 드 루뱅[1]과의 사이에서 휴[2],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낳았다. 그의 이름인 제임스는 삼촌인 스코틀랜드 고위 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학자들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그의 대부가 되어줬을 거라고 추정한다.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진행중이던 1297년 7월, 아버지 윌리엄 르 하디가 윌리엄 월레스를 지원하던 중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었다. 그 후 베릭 성에 보내져서 일명 '더글러스 탑'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 런던으로 이송되어 1298년 1월 24일에 런던 탑에서 옥사했다. 그 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더글러스 가문의 영지를 몰수한 뒤 측근인 로버트 드 클리퍼드에게 하사했다.
이리하여 영지를 잃어버린 제임스 더글러스는 일찍이 프랑스로 피신했고, 1301년에서 1304년 사이에 파리에 머물렀는데, 스코틀랜드 사절로서 파리를 방문한 세인트앤드루스 주교이자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을 열정적으로 이끈 윌리엄 램버튼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1304년 초 스코틀랜드로 귀환한 윌리엄 램버튼은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귀족 및 성직자들이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할 때 따라서 경의를 표했다. 이때 그는 제임스를 위해 에드워드 1세에게 아버지의 영지를 되찾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그가 자신을 대적한 윌리엄 르 하디의 아들이라는 걸 듣고 화가 나서 단호히 거부했고, 제임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은거했다.
2.2. 로버트 1세의 추종자
1306년 3월, 로버트 1세가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고 스코틀랜드 국왕을 자칭했다. 은거 중이던 제임스는 즉시 그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1306년 6월 19일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제2대 펨브로크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총독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참패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는 왕이 잉글랜드군을 피해 하이랜드로 도망칠 때 동행했다. 이후 로버트 1세가 9월에서 12월 사이에 킨타이어, 레슬린을 거쳐 헤브리디스 제도로 이동할 때 끝까지 따라간 몇 안 되는 동료에 속했다.1307년 초 로버트 1세가 스코트랜드 남서부 갤러웨이에 상륙하여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재개했을 때, 제임스 역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로버트 보이드와 함께 아란에 상륙한 뒤 존 헤이스팅스가 브로딕 성으로 보낸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다. 로버트 1세는 아란에서 이들과 합류했고, 함께 캐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은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텐버리 성을 접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텐버리 마을을 야간을 틈타 약탈한 뒤 아란으로 후퇴했다.
그 후 로버트 1세가 1307년 4월에 스코틀랜드 북부로 이동하는 동안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더글러스 영지를 가져간 로버트 드 클리퍼드가 로버트 1세를 추격하자, 제임스는 이 때를 틈타 5월 1일에 더글러스 성을 기습 공격해 공략하고 로버트 드 클리퍼드가 배치했던 수비대를 섬멸했다. 그 후 제임스는 라우던 힐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그는 스코틀랜드 총독 에이머 드 발랑스와 협상을 벌였지만 결렬되었다. 그 후 라우던 힐 전투에서 로버트 1세와 함께 방어에 유리한 고지에서 항전해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후 어퍼 클라이드데일과 에트릭 숲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여 큰 성과를 거뒀다. 1307년 9월 페즐리에서 잉글랜드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에어셔의 펜윅 근처 에디포드에서 추격대를 격퇴했다.
1307년 말, 로버트 1세는 가장 강력한 정적인 부컨 백작 존 코민을 쳐부수기 위해 부컨 백작령으로 진군했다. 이때 제임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더그러스데일, 어퍼 클라이즈데일, 셀커크 숲, 그리고 제드버러를 잇달아 석권했다. 이후 로버트 1세가 1308년부터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 원정을 이끌었을 때,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남부의 애트릭 숲에서 유격전을 이어갔다. 1308년 4월 7일, 로버트 드 클리퍼드가 복구한 더글러스 성의 수비대를 더글러스 교회에서 성지주일 예배를 하던 중 급습하여 생포했다. 그 후 방어되지 않은 성을 점령하고 포로들을 지하실로 끌고 가서 참수했다. 그는 의 저장고에 있던 시체들을 빈 식량 자루와 와인 통에 담았고, 성에 소금을 잔뜩 뿌리고 말 시체로 오염시켰다.
1308년 8월 로버트 1세와 합류한 뒤, 지난 날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주하던 로버트 1세를 가로막아 달리그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힌 존 맥두걸을 응징하고쟈 아가일로 출진했다. 존 맥두걸은 로버트 1세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흐 호수를 발원지로 삼은 오 강이 벤 크루아찬 산을 지나면서 형성된 남쪽 경사면을 가로지르는 브랜더 고개에 주둔했다. 그는 이 고개에 숨어서 고개를 통과하는 좁은 길을 지나가는 로버트 1세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는 달리그 전투 때처럼 매복 공격을 순순히 당할 생각이 없었다. 제임스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궁수대는 벤 크루아찬 산을 훨씬 더 높이 올라가서 적의 후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로버트 1세가 고개 아래에서 적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고, 존 맥두걸이 이들을 요격했다. 그 때 제임스의 명령을 받든 궁수대가 적의 후미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화살 세례를 얻어맞은 존 맥두걸의 부하들은 동요하다가 이내 무너졌다. 존 맥두걸은 브랜더 고개 전투에서 참패한 뒤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존 맥두걸의 아버지 알렉산더 맥두걸은 로버트 1세에게 복종했지만, 1309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잉글랜드와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는 바람에 로버트 1세와 제임스의 공세를 피해 잉글랜드로 달아났다. 로버트 1세는 맥두걸 가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한 뒤 지지자들에게 나눠줬다. 영지 일부는 캠벨 가문에 귀속되었고, 나머지는 맥도날드 가문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에트릭 숲으로 돌아온 제임스는 소규모의 잉글랜드군과 스코틀랜드 동맹군을 습격해 생포했다. 이들 중에는 로버트 1세의 조카인 토머스 랜돌프도 있었는데, 그는 이 인물의 신원을 확인한 뒤 곧장 로버트 1세에게 데려갔다. 1309년 3월, 제임스는 로버트 1세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개최한 첫번째 스코틀랜드 의회에 영주로 참여했다. 그는 다음 몇 년 동안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당시에는 왕이 직접 군사 작전을 지휘했고, 제임스는 왕 밑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연대기 작가들에게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312년과 1313년에 스코틀랜드군이 던디, 베릭, 퍼스를 습격한 사견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314년 2월 27일, 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성 중 하나인 록스버러 성을 기습 공격해 함락했다.
스코틀랜드 시인 존 바버에 따르면, 제임스는 1314년 6월 23일 ~ 6월 24일 배넉번 전투 당시 4개의 쉴트론[3] 중 하나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연대기들에는 쉴트론이 3개만 구축되었다고 기술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로버트 1세의 동생인 에드워드 브루스의 지휘하에 싸웠을 거라고 추정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사촌인 월터 스튜어트에게 명목상 종속되었지만 실제로는 아직 어린 월터를 대신해 그가 지휘를 맡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와 월터 스튜어트는 전투 전날에 로버트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 배넉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더글러스 영지를 지배했던 로버트 드 클리퍼드가 전사하면서, 제임스는 명실상부한 더글러스 영주가 되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가 배넉번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장에서 도망친 후, 제임스는 로버트 1세에게 자기가 에드워드 2세를 추격해서 최대한 피해를 입히겠다고 호소해 관철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기병대는 에드워드 2세 호위부대보다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제임스는 윈치버그를 거쳐 던바까지 추격해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에드워드 2세는 던바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가까스로 탈출했다.
2.3. 잉글랜드의 악몽
2.3.1. 잉글랜드 북부 습격전
배넉번 전투 승리 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약탈전을 감행했다. 로버트 1세는 이런 습격 작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그 대신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와 제임스가 군대를 지휘했다. 1314년 8월 초, 제임스는 에드워드 브루스와 함께 잉글랜드 북동부로 진군해 리치먼드셔까지 진군하면서 가축을 약탈하고 곡물 밭을 파괴한 후, 스웨일데일과 스테인무어를 거쳐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브러, 애플비, 커크 오스월드를 방화했다.1315년 여름 로버트 1세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군이 더럼 주를 침공했을 때, 제임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하틀폴로 진군했다. 그는 하틀폴을 약탈하고 많은 포로를 잡은 뒤, 스코틀랜드로 귀환하여 왕의 군대에 합류했다. 같은 해 말, 제임스는 코플랜드와 컴벌랜드 일대를 약탈하고 성 비즈 수도원의 예복을 훔쳤다. 그 후 칼라일로 진군해 그곳에서 포위 공격하던 로버트 1세를 도왔다. 스코틀랜득둔이 마지막으로 칼라일을 공격했을 때, 그의 부대는 성벽 꼭대끼까지 거의 올라갔지만,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밀려났고, 제임스는 부상을 입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1316년 1월 7일, 로버트 1세와 함께 베릭을 기습 공격했지만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그는 공격이 실패한 후 사로잡힐 뻔했지만, 작은 배를 타고 간신히 탈출했다.
1316년 2월 14일, 베릭 성 수비대 내 가스코뉴 부대 지휘관 에드몽 드 카유는 식량난에 시달리다가 성내에서 굶어죽는 것보다 싸우다 죽는 것이낫다고 여기고 부하들을 이끌고 멜로즈 수도원에서 2리그(9.65km) 떨어진 지점까지 약탈을 자행했으며 이후, 부하들을 중대로 나누어 농민들로부터 가축과 그들을 몰고 갈 충분한 남자들을 탈취했다. 이후 충분한 전리품을 모은 뒤 가축을 몰고 베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제임스와 리데즈데일 영주 윌리엄 2세 드 소울스, 브랜스홀름 성주 헨리 드 발리올이 이들을 추격했다. 에드몽 드 카유는 콜드스트림 인근 스케이드뮤어에서 적이 추격하고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로와 가축을 베릭으로 먼저 보낸 뒤, 자신은 전투 대열을 형성해 적군과 맞서 싸웠다. 그 후 벌어진 스케이드뮤어 전투에서, 제임스는 에드몽 드 카유와 직접 격투를 벌인 끝에 사살했고, 지휘관을 잃은 가스코뉴 부하들은 낙담하여 도주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훗날 스케이트뮤어 전투가 자신의 긴 경력에서 가장 어려웠던 전투였다고 회상했다고 전해진다.
1316년 말과 이듬해 초,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변경 지역에서 여러 차례 교전을 벌여 잉글랜드군을 괴롭혔다. 또한 1316년 가을부터 1317년 초까지 로버트 1세와 토머스 랜돌프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났을 때, 제임스는 월터 스튜어트와 함께 변경의 관리인을 맡아 스코틀랜드를 지켰다.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은 로버트 1세의 부재를 이용하고자 1317년 3월 록스버러셔로 진군했다. 제임스는 처음에는 2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진군해오는 적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후퇴하길 반복했다. 그러던 중 엘리아스 더 클러크라는 잉글랜드 전사가 30명을 거느리고 제드버러 남쪽의 린탈리에 있는 제임스의 기지를 점령했다. 이후 그들이 남겨진 물자를 약탈하느라 정신없을 때, 제임스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엘리아슬르 비롯한 모든 적병을 사살했다. 그 후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진군하던 아룬델 백작의 군대를 급습해 궤멸시켰고, 잉글랜드 기사 토머스 리치먼드 경을 말에서 떨어뜨린 뒤 단검으로 찔러 죽였다.
2.3.2. 잉글랜드 대약탈
1317년 말, 제임스는 베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베릭으로 향하던 잉글랜드 기병대를 격파하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라비의 로버트 네빌을 사살했다. 1317년 12월, 로버트 1세는 베릭에서 20km 떨어진 올드 캠퍼스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공성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해, 장차 베릭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베릭의 시민인 스폴딩의 피터가 찾아왔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마리샬 백작 로버트 키스와 친척이었는데, 로버트 1세에게 야간에 공격한다면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로버트 1세는 처음에는 이 제안이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면밀한 검증 작업 끝에 그가 정말로 항복할 의사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에 따라 심복인 제임스와 월터 스튜어트에게 베릭 성을 기습하라고 지시했다.1318년 4월 1일에서 2일 사이의 밤, 제임스와 월터 스튜어트는 기습 공격을 이끌었다.(베릭 공방전) 스폴딩의 피터는 더글러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기가 지키는 성벽 구간에 로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걸 도왔다. 이후 격렬한 시가전 끝에, 스코틀랜드군은 도시를 점령했다. 베릭 수비대는 성채로 후퇴해서 농성했지만,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6월 18일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던 유일한 잉글랜드 왕국의 요충지인 베릭이 스코틀랜드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를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기로 마음먹고, , 5월에 요크셔로 쳐들어가 하보트, 워크 및 미트포드 성을 점령한 뒤 노샐러튼, 리폰, 폰트프랙트까지 진군했다. 리폰 주민들은 대성당으로 피신한 뒤 도시가 파괴되지 않는 조건으로 1,000 마크를 지불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나레스버러를 불태운 후 스키튼을 거쳐 철수했다. 베릭이 함락된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에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화해한 뒤 1319년 늦여름에 함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9월 7일부터 베릭을 포위했다. 그러나 월터 스튜어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한편, 제임스와 토머스 랜돌프는 적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기로 하고, 베릭을 우회한 뒤 요크셔로 진격했다. 1만에서 1만 5천 사이의 스코틀랜드군은 칼라일을 거쳐 컴벌랜드를 지난 뒤, 노섬벌랜드와 더럼을 거쳐 요크셔의 버러브릿지와 마이톤까지 행군하며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약탈했다. 얼마 후 요크 수비대는 생포된 스코틀랜드 스파이로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이 요크 시 인근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를 사로잡으려 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자벨은 급히 요크로 옮겨진 뒤, 배를 타고 노팅엄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이 요크 성 근처로 이동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요크의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잉글랜드 왕실 대집사인 존 호담은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의 협조하에 요크 시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다. 이때 모인 병력은 10,000 ~ 20,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그 대부분은 요크와 주변 지역의 징집병이었고, 많은 성직자들이 함께 했다. 9월 12일, 윌리엄 멜튼과 존 호담은 스코틀랜드군을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기 위해 20km 떨어진 마이톤온스웨일로 진격했다.
척후병으로부터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제임스는 평원에 잔뜩 깔린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건초 더미를 태운 불에서 나오는 연기는 스웨일 강의 다리를 건넌 잉글랜드군의 시야를 가렸다.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그 사이에 우회하여 다리를 건너 퇴각하는 것을 막았고, 스코틀랜드 주력군은 방향 감각을 잃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잉글랜드 민병대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잉글랜드 민병대는 삽시간에 와해했고, 적에게 사살되거나 스웨일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시인 존 바버는 <운율 연대기>에서, 마이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입은 손실에 대해 사제 300명을 포함해 1,000명이 죽었다고 밝혔고, 라네코스트 연대기는 잉글랜드인드인 4,000명이 스코틀랜드인에게 살해되었고, 1,000명은 스웨일 강에서 익사했다고 밝혔다. 요크 시장 니콜라스 플레밍은 전사했고, 여러 잉글랜드 장교들이 생포되었다. 윌리엄 멜튼과 존 호담은 간신히 요크로 탈출했고, 예상했던 스코틀랜드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성문을 닫았다. 이때 전투에 참여했던 수많은 잉글랜드 성직자가 살해되었는데, 후대 사람들은 마이톤 전투에서 전사한 성직자들을 "마이톤의 모임(Chapter of Myton)"이라고 일컬었다.
랭커스터 백작은 마이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이후 제임스와 토머스 랜돌프는 요크 성을 공격하지 않고 더 남쪽의 캐슬포드로 이동했다. 이곳은 랭커스터 백작의 가장 중요한 성 중 하나인 폰트프랙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9월 14일, 그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한동안 이동했다가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에어 강 주변 지역과 워프 강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후 페나인 산맥 서쪽 지역으로 진군해 그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농작물을 불태우고 많은 가축을 사로잡았다. 그 후 스테인무어, 길슬랜드, 칼라일을 지난 뒤 스코틀랜드에 무사히 귀환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요크에 병사 600명과 함께 남았지만, 제임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벌여 1319년 11월 1일 길슬랜드 시를 파괴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1319년 12월 22일에 최소 2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잉글랜드 측은 이 협정에 따라 1년 이내에 성을 철거하거나 스코틀랜드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노섬벌랜드에 있던 하보틀 성을 돌려받았다. 1320년 4월 6일,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백작 8명, 남작 30명이 아브로스 수도원에서 "우리는 절대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한 뒤 교황 요한 22세에게 발송할 때 참여했다.
1322년 1월 6일, 제임스는 휴전 협정이 만료되자마자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티사이드를 약탈한 뒤 하틀풀과 클리블랜드를 약탈하고 몸값을 받아냈으며, 부관인 월터 스튜어트는 리치먼드셔를 약탈하거나 몸값을 확보했다. 당시 랭커스터 백작은 남부 요크셔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지 않았다. 1322년 6월 17일, 로버트 1세는 제임스, 토머스 랜돌프, 월터 스튜어트와 함께 칼라일을 향해 진격햇다. 그들은 홀름컬트럼 수도원을 먼저 접수하고 심하게 파괴한 뒤, 코플랜드 영지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후 한여름에 에그레몬트를 지나가면서 방앗관 2개를 불태웠다. 퍼니스 수도원장은 로버트 1세에게 자기 영지를 보전해달라며 돈을 줬지만, 로버트 1세는 이를 무시하고 퍼니스 영지 역시 약탈하고 방화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랭커스터 시를 향해 진군하면서 네더 켈릿과 토리솔름을 파괴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남쪽으로 이주했다. 라네르코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그 지역에 있던 교회 2곳 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7월 2일 랭커스터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나흘간 그곳에 머물다가 프레스턴을 거쳐 스커튼으로 이동하면서, 그곳에 있던 밀 작물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프레스턴은 이때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수십 년간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다. 일부 스코틀랜드 분견대는 샘스베리로 진군해 그곳을 약탈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로 철수하다가 칼라일에 도착해 5일간 머물면서 부하들에게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도록 한 뒤, 7월 24일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군은 이번 원정에서 막대한 가축과 전리품을 확보해, 잉글랜드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할 보급품과 식량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1322년 8월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 그리고 라우스 백작 존 드 버밍엄과 함께 2만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북상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수중에 넘어간 베릭 성을 우회한 뒤 에든버러로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들과 대적하는 걸 회피하고자 군대를 포스 강 건너편으로 철수하면서, 잉글랜드군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을 가져갔다. 에드워드 2세는 로디언에서 적군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단지 절름발이 소 한 마리만 발견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서리 백작은 그 소를 보고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
"저 소는 내가 지금까지 본 소 중에서 가장 비싼 소일 것이다. 아마 천 파운드 이상 될 것이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8월 19일 머슬버러에서 야영한 뒤, 함대의 보급을 받고자 항구 도시인 리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송 함대는 폭풍우로 인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리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8월 말에 국경으로 후퇴했다. 이때 에드워드 2세의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가 사망했다. 9월 2일 잉글랜드에 도착한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남을 의사를 밝혔고, 9월 26일 밤버러, 워크워스, 던스턴버러, 올닉 성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직면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한편,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이 돌아가자 공세를 재차 벌이기로 했다. 9월 30일, 솔웨이 만에서 배를 타고 원더미어의 보우네스 인근으로 이동한 그는 10월 5일 칼라일 주변 지역을 파괴해,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도록 했다. 그 후 페나인 산맥을 통과하면서 스콧비, 칼라튼, 컴류 교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이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을 추격하고 있으며, 이미 몇 킬로미터 떨어진 노스앨러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여러 귀족과 군대에 복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10월 14일 스코틀랜드군이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리치먼드 백작이 이끄는 왕의 호위대를 격파했다. 에드워드 2세는 가까스로 체포를 모면하고 요크 지방으로 도주했고, 측근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새로운 군대를 모집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 참여했고, 잉글랜드 편에서 싸운 프랑스 기사 3명을 생포했다. 로버트 1세는 제임스를 설득해 그들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한 뒤, 프랑스인들이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와의 관계를 이를 통해 개선하기를 희망했다. 제임스는 로버트 1세로부터 보상으로 4,400 마크를 받았다.
한편, 타인머스 수도원에 머물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는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자 남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군대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적대햇던 이자벨을 단호히 거부하고 다른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그러지 못했고, 타인머스는 곧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게다가 해상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플란데런 백국 함대가 순찰했다. 이자벨은 적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호위대 일부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배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 후 이자벨과 수행원들이 배에 타는 동안, 스코틀랜드군이 도시로 진입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자벨의 수행원 2명이 사살되었다. 이자벨은 배에 오른 뒤 플란데런 선박들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상륙한 뒤 요크로 가서 남편과 합류했다. 이자벨은 에드워드 2세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속아서 자신을 저버렷다고 비난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맞서 이자벨과 동맹을 맺은 더럼 주교 루이스 드 보몽이 이자벨이 제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결혼 생활은 파탄났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의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별동대를 이끌고 랭커셔와 요크셔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많은 종교 건물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보존해줬다. 그 후 해안가를 따라 이스트 라이딩으로 진군하면서, 인근 교구에 있던 수도원들로부터 몸값을 뜯어냈다. 로버트 1세는 10월 20일 베벌리 타운으로부터 400파운드를 받아낸 뒤 스키튼으로 진군하면서 여러 마을과 도시로부터 역시 몸값을 받아내는 대가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다. 이윽고 스키튼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행군을 멈췄고, 토머스 랜돌프는 10월 22일 왕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혹독한 겨울 날씨와 폭우가 닥치자 스코틀랜드로의 귀환길에 올랐고, 11월 2일 스코틀랜드로 넘어갔다.
2.3.3. 웨어데일 전역
1323년 5월 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대표단은 1336년 6월 12일까지 최소 13년간 유효한 장기 휴전 협약에 합의했다. 그 후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가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에 의해 폐위되고 장남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3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 날인 1327년 2월 1일, 스코틀랜드군이 노럼 성을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1327년 4월, 로버트 1세는 얼스터로 가서 그곳을 장악하려 했지만, 현지인들의 외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327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1327년 6월 15일, 제임스는 토머스 랜돌프, 마르 백작 돔날 2세와 함께 스코틀랜드 기병 10,000명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보급품과 짐을 거의 챙기지 않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식량을 현지 주민으로부터 빼앗았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군사 관행, 즉 병력을 집중시켜서 이동하는 것과는 현저히 달랐고, 스코틀랜드군은 이 때문에 높은 수준의 기동성을 지녔다. 그들의 분산된 대형은 적어도 70마일(110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에서 기동했으며, 잉글랜드군은 그들의 수, 주요 목표 및 이동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과 농장을 약탈하고 불태운 뒤 7월 5일 애플비에 도착했다.
그 사이, 로저 모티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벌이기로 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다. 1327년 봄, 잉글랜드 왕실군이 노섬벌랜드 일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북상했다. 왕실군의 공식 사령관은 에드워드 3세였지만, 실질적인 지휘관은 로저 모티머였다. 에드워드 3세는 5월 말에 요크에 도착한 뒤 6월 내내 그곳에서 보내면서 시장, 마을 사람들, 수도원장들의 접견을 받았다. 7월 초, 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왕실군이 요크에서 출진해 더럼으로 진군했다. 잉글랜드군은 7월 15일 더럼에 도착했다. 이후 프랑스의 이자벨은 더럼에 남았고, 에드워드 3세와 로저 모티머는 행군을 이어갔다. 잉글랜드군은 불타는 농장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적군이 거기에 있으리라 여기고 추격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을 잡으려고 며칠간 추격해도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다. 로저 모티머는 그제야 적군이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하면서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있다는 걸 깨닫고,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7월20일, 잉글랜드군은 새벽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말을 타고 이동했다. 짐 운반 대열은 뒤에 남겨졌고, 보병은 가능한 한 빨리 기병대를 따라갔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기병대는 헤이든에 이르러 타인 강을 건넜다.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이 급습할 거라 여기고 방어를 준비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들은 자기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 호송대는 멀리 뒤쳐졌고, 근처에 식량도 없었으며, 그 사이에 폭우가 내려서 타인 강을 다시 건너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에 모티머는 정찰병을 앞서 보낸 뒤, 타인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홀트위슬에 도착했다.
이때 스코틀랜드군은 중병에 걸린 로버트 1세를 대신해 제임스가 총사령관으로서 지휘를 맡았으며, 홀트휘슬 남쪽에 있었다. 잉글랜드 정찰병 한 명이 그들에게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스코틀랜드인들이 싸우고 싶어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7월 31일,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이 주둔한 스탠호프 공원 근처 웨어 강 북쪽 기슭으로 진군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급류가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는 바위투성이의 언덕을 선점하면서, 쉴트론을 결성했다. 잉글랜드 지휘부는 이들을 공격하려고 언덕을 올라갔다간 막대한 희생만 볼 것임을 깨닫고, 그들을 어떻게든 언덕 아래로 끌어내려 했다. 먼저 천천히 스코틀랜드군 진영을 향해 접근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웨어 강 상류를 건넌 뒤 적군을 향해 사격을 가해, 그들이 언덕에서 내려오도록 강요하려 했지만,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출격해 궁수들을 몰아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전령을 스코틀랜드 진영으로 보내 공정하게 싸우길 원하니 당장 언덕 아래로 내려오라고 촉구했다. 이에 제임스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현 위치에 만족한다. 잉글랜드 국왕과 그의 고문들이 현 상황에 불만이 있다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두겠다."
잉글랜드 수뇌부는 적이 끝까지 언덕을 사수할 것임을 깨닫고, 스코틀랜드군과 마주보면서 웨어 강의 오른쪽 강둑에 별동대를 배치함으로써, 적의 식량 운송로를 차단해서 굶겨 죽이려 했다. 그 후 사흘간 대치하던 중, 스코틀랜드군은 8월 2일에서 3일 사이의 밤에 어둠을 틈타 몰래 후퇴하여 스탠호프 공원 내부의 훨씬 더 강력한 위치로 이동했다. 날이 밝으면서 스코틀랜드군이 이동한 걸 알게 된 잉글랜드군은 진영을 다시 옮겨서 강 남쪽에 있는 스코틀랜드군과 마주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자기들이 무리 지어 강을 건너려고 시도한다면, 적군이 즉각 공격하여 섬멸하려 들 것을 두려워했고, 일단 계속 대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측은 대치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8월 3일에서 4일 사이의 밤, 제임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 진영을 급습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하마터면 잡힐 뻔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제임스가 "더글러스!"라고 외치며 곧장 잉글랜드 숙영지 중앙 지점으로 달려가서 왕실 텐트의 밧줄 몇 개를 잘라내는 바람에 텐트가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한참 동안 그곳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구조되었다고 한다. 로저 모티머는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은 그 사이에 자기네 진영으로 돌아갔다.
8월 6일, 잉글랜드군은 수감자를 심문한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그날 밤 전체 군대를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할 거라 예상하고, 완전히 무장한 채 전투 대열을 결성한 채 잠을 잤고, 들판을 밝히기 위해 큰 모닥불을 피웠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이 절대로 지나갈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고지 북쪽의 늪을 돌파한 뒤 약탈품을 가지고 스코틀랜드로 유유히 철수했다. 로저 모티머는 적을 놓쳤다는 걸 알게 된 뒤, 사기가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다고 보고 철수했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에드워드 3세가 원정 실패에 너무 격분해 철군하는 내내 울었다고 밝혔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로 쳐들어가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실은 북부 잉글랜드에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 지출은 7만 파운드였는데, 그중 41,000파운드가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반면 잉글랜드 정부의 연간 수입은 30,000파운드였고, 수입을 제외한 지출액은 빚으로 충당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당국은 1327년 9월 중순 링컨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을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산의 1/20를 직접세로 거두기로 했다.
1327년 10월, 로버트 1세가 노섬벌랜드로 출진해 그 일대의 여러 성을 하나씩 공략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은 더 이상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이는 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로버트 1세에게 사절을 파견해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로버트 1세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전쟁을 끝내기를 갈망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후 협상이 순조롭게 이어진 끝에, 1328년 3월 17일 에든버러에서, 그리고 5월 4일 노샘프턴에서 전쟁을 끝낼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든버러-노샘프턴 협약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 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종결되었다. 제임스는 토머스 랜돌프와 함께 베릭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 데이비드와 잉글랜드 공주 조앤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이를 기리는 행사를 주관했다.
2.4. 최후
로버트 1세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해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끌어낸 제임스를 매우 신뢰했다. 그는 1318년에 제임스를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선임했으며, 제드버러 성과 숲, 에릭크 숲, 로더 및 베드룰, 그리고 에스데일의 스케이플고든과 랭홀름 일대를 받았으며, 광범위한 특권도 확보했다. 1328년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이 이뤄진 후, 그는 조부 윌리엄 더글러스의 영지였던 노섬벌랜드의 포든도 되찾았다. 그러던 1329년 6월 7일, 로버트 1세가 향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임종하기 전에 존 코민 3세를 살해한 것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자기 심장을 챙겨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제임스는 5살의 어린 아이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었다.1330년 2월 1일, 더글러스 교구 성인인 성 더글러스의 축일 날, 제임스는 로버트 1세의 심장을 은관에 넣은 뒤 7명의 기사와 20명의 시종을 데리고 레콩키스타에 참여하고자 이베리아 반도로 출발했다. 그는 안전 통행권과 잉글랜드 국왕의 추천서를 갖고 플란데런 백국의 슬로이스에 들렀고, 뒤이어 세비야로 항해한 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와 합류했다. 당시 알폰소 11세는 그라나다 토후국의 군주 무함마드 4세를 상대로 테바 전투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330년 8월 25일, 카스티야군은 테바 전투에서 우스만 이븐 아비 알울라가 이끄는 그라나다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했다가 본대와 동떨어져 버렸고, 그라나다군은 이를 확인한 뒤 즉시 제임스와 일행들을 에워쌌다. 존 바버의 묘사에 따르면, 제임스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목에 걸었던 로버트 1세의 심장이 담긴 은관을 집어든 뒤 적군 앞에 던지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앞으로 나아가라, 용감한 심장이여! 네가 항상 원했던 대로! 더글러스는 너를 따라오든지, 아니면 죽을 것이다."
이날 제임스와 로슬린의 윌리엄 싱클레어, 로건 씨족의 기사 로버트와 월터가 전사했다. 존 바버에 따르면, 전투가 끝난 뒤 제임스의 유해와 로버트 1세의 심장이 담긴 관이 회수되었고, 제임스의 뼈와 살은 삶은 후 갈스톤의 윌리엄 키스 경이 스코틀랜드로 가져가서 세인트 브라이드 교회에 안장했다. 로버트 1세의 심장인 모레이 백직아자 스코트랜드의 새 수호자 토머스 랜돌프가 가져가서 멜로즈 수도원의 높은 제단 아래에 안치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뒀다. 장남 윌리엄 더글러스는 제6대 더글러스 영주가 되었지만 1333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옹립하고자 쳐들어온 잉글랜드군에 맞서다 할리돈 힐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제임스 더글러스의 이복 형제인 휴 더글러스가 제7대 더글러스 영주에 선임되었고, 1342년 휴가 사망한 뒤 제임스 더글러스의 또다른 이복형제인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아들 윌리엄 더글러스가 제8대 더글러스 영주가 되었다가 나중에 초대 더글러스 백작에 올랐다. 제임스 더글러스의 차남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1388년 초대 더글러스 백작의 아들 제임스 더글러스가 오터번 전투에서 전사한 뒤 제3대 더글러스 백작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