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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모티머(초대 마치 백작)

<colbgcolor=#FFC9C7><colcolor=#000000> 초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Roger Mortimer, 1st Earl of March
이름 로저 모티머 (Roger Mortimer)
출생 1287년 4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
사망 1330년 11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타이번
배우자 2대 제네빌 여남작 조앤 드 제네빌 (1301년 결혼)
자녀 에드먼드, 마거릿, 로저, 모드, 제프리, 존, 조앤, 이사벨라, 캐서린, 아그네스, 베아트리체, 블랜치
아버지 에드먼드 모티머
어머니 마거릿 드 피엔
형제 모드, 에드먼드, 휴, 엘리자베스, 조앤, 이졸데
직위 제3대 위그모어 남작, 초대 마치 백작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의 활약2.3. 에드워드 2세에게 대적하다2.4. 잉글랜드 최강의 권신2.5. 최후
3. 가족
3.1. 아내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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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에드워드 2세를 타도하고 에드워드 3세를 옹립한 뒤 프랑스의 이자벨과 함께 잉글랜드의 정국을 좌지우지했지만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인해 실각 후 처형되었다.

2. 생애

2.1. 초년기

1287년 4월 25일 제2대 위그모어 남작 에드먼드 모티머와 피엔과 텡그리 영주인 기욤 드 피엔의 딸 마거릿 드 피엔의 차남이다. 조부인 초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다. 아버지 에드먼드 모티머는 본래 차남으로, 성직자로서 경력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형 랄프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보내졌던 옥스퍼드 대학에서 소환된 뒤 상속인으로 선언되었다. 이후 1282년에 빌스 웰스에서 웨일스 공국의 마지막 독립 통치자 허웰린 압 그리피드를 사살해, 에드워드 1세의 웨일즈 정복을 완료하는 데 기여했다. 형제로 모드[2], 에드먼드[3], 휴[4], 엘리자베스[5], 조앤[6], 이졸데[7]가 있었다.

로저는 아직 소년이었을 때 처크의 영주이며 삼촌인 로저 모티머의 후견을 받았다. 이 로저 모티머는 1282년 허웰린 압 그리퍼드의 잘린 머리를 에드워드 1세에게 전달한 인물이었다. 그는 12살 때 월터스톤의 기사 피어스 드 제네빌의 딸 조앤과 약혼했고, 1301년에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웨일스의 러들로 성과 아일랜드의 메스 백작령을 모티머 가문의 영지에 추가했다. 1304년 7월 17일 빌스 웰스 인근에서 아버지 에드먼드 모티머가 웨일스 반란군과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초대 콘월 백작 피에르 가베스턴의 후견을 받았다.

2.2.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의 활약

1306년 4월 9일, 19세의 로저는 통치를 시작했고, 2,500마르크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의 영지는 프레스턴, 위그모어, 레드너셔, 페그원과 잉글랜드 전역에 흩어진 수백 개의 다른 소규모 영지, 브리지워터 시의 3분의 1 및 아일랜드 중부 남동쪽의 리 백작령에 있는 듄메이스의 저택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아내 조앤과 결혼하면서 웨일스의 주요 거점인 러들로 성을 확보함으로써 웨일즈 공국에서의 자신의 소유물을 강화했다. 여기에 아내 조앤의 할아버지인 제프리 드 제네빌이 1308년에 아일랜드 내 재산 대부분을 로저에게 양도하면서, 그는 아일랜드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306년 5월 22일 에드워드 1세가 백조 잔치에서 기사 작위를 내린 300명 중 한 명이었으며, 1308년 아일랜드 총독에 선임된 피에르 가베스턴의 부관으로 발탁되어 1308년부터 1312년까지 아일랜드에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형제인 에드워드 브루스의 지원을 받은 라시 가문과 갈등했다. 갈등의 본질은 제프리 드 제네빌이 라시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아일랜드 내의 재산을 확보했지만 라시 가문의 많은 대표자들이 아일랜드 관습에서는 여성이 재산 상속자가 될 권리가 없다며 이의를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로저와 그의 아내는 분쟁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할 기회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에 머물렀고, 사병을 동원해 라시 가문과 여러 차례 소규모 전쟁을 치렀다.

1314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를 상대로 원정을 떠난 에드워드 2세의 원정에 참여해 보병 300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1314년 6월 23일 ~ 6월 24일 배넉번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로버트 1세의 6촌인 점이 고려되어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고,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로버트 클리퍼드의 시신과 개인 인장, 방패를 스코틀랜드인들로부터 넘겨받은 뒤 에드워드 2세에게 돌려줬다. 배넉번 전투 후,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 상륙한 후 자신을 아일랜드의 대왕이라고 선포했으며, 라시 가문이 앞장서서 그에게 호응했다.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그가 이를 물리치려 했지만 코너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렇듯 아일랜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1315년 초, 로저는 웨일스 남부의 글래모건에서 흐웰린 브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며, 브리스톨 시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후 아일랜드 내 자신의 영지를 지켜내기 위해 에드워드 2세에게 자신이 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전담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에드워드 2세는 이를 받아들여 11월 23일에 그를 아일랜드 보안관에 선임했다. 1316년 초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한 그는 라시 가문을 격파하고 아일랜드 남부 전체를 장악했으며, 우스터에서 에드워드 브루스의 군대를 저지했다. 로저는 1318년 잉글랜드로 소환되었지만, 아일랜드에 남은 존 버밍엄이 1318년 10월 14일 포하트 힐스 전투에서 에드워드 브루스를 전사시킨 뒤 에드워드 브루스의 수급을 에드워드 2세에게 보냈다. 1319년 3월, 로저는 아일랜드 총독에 선임된 뒤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라시 가문을 코나흐트에서 크게 격파하고 라시 가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후 1321년까지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일랜드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2.3. 에드워드 2세에게 대적하다

로저가 아일랜드에서 종횡무진하고 있을 때,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디스펜서 더 영거는 모티머 가문에게 강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제2차 남작 전쟁 시기,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군에 가담한 초대 디스펜서 남작 휴 디스펜서가 1265년 8월 4일 이브셤 전투에서 몽포르와 함께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정부군과 격돌했다. 이때 에드워드 왕자는 돌격대를 조직한 뒤 이들에게 반란 지도자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고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돌격대는 로저의 할아버지인 초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가 이끌었고, 휴 디스펜서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디스펜서 가문은 모티머 가문에게 강한 복수심을 품었다.

휴 디스펜서 더 영거는 에드워드 2세를 꼬드겨서 남부 웨일스에서 자신의 영지를 확장해 모티머 가문의 이익에 해를 끼쳤다. 이에 반감을 품은 로저는 1321년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에드워드 2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함께 간신인 디스펜서를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토벌대가 웨일스로 진군하자, 험프리 드 보훈은 전의를 상실하고 북쪽으로 도망쳤고, 로저는 1322년 삼촌인 처크 영주 로저 모티머와 함께 슈루즈버리에서 토벌대에 항복했다. 험프리 드 보훈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합류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지만, 1322년 3월 16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참패하고 토머스와 함께 전사했다.

로저와 그의 삼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된 뒤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로저는 1324년 8월 탈옥에 성공한 뒤 도체스터로 피신했다가 화이트 섬으로 이동한 후, 배를 타고 프랑스로 피신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그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그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 그의 삼촌인 처크 영주 로저 모티머는 탈옥에 실패하고 런던 탑에 그대로 수감되었다가 옥사했다. 로저는 파리에 도착한 뒤 에드워드 2세와 휴 디스펜서에 맞서기 위해 지지자들을 모았지만, 프랑스 당국이 그를 돕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1324년,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의 누이인 프랑스의 이자벨이 생사르도 요새를 둘러싸고 벌어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쟁에 관해 협상하고자 프랑스를 방문했다. 당시 전횡을 일삼고 자신을 무시하는 휴 디스펜서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고, 무력한 남편 에드워드 2세에게도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이자벨은 로저에게 호감을 품었다.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었고, 휴 디스펜서가 에드워드 2세와 자신의 결혼 생활을 파괴했다고 주장하면서 미망인처럼 옷을 입었다. 1325년 9월 24일 에드워드 2세의 장남인 에드워드 왕자가 파리에 방문해 아키텐 공작이자 퐁티외와 몽트뢰유 백작으로서 샤를 4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이자벨과 모티머는 에드워드 왕자의 귀국을 막고, 그를 앞세워 휴 디스펜서와 에드워드 2세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을 모의했다.

1326년, 로저와 이자벨은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필요한 동맹국을 확보하기 위해 에노 백작 기욤 1세와 협상했다. 사실 에드워드 2세도 1319년 에드워드 왕자와 기욤 1세의 장녀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려고 접촉했지만,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두 사람은 1326년 초 발렌시네스에서 기욤 1세의 아내이자 샤를 4세의 삼촌인 샤를 드 발루아의 딸인 발루아의 잔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기욤 1세와 발루아의 잔 부부는 이자벨의 정변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둘째 딸인 에노의 필리파를 잉글랜드 왕비로 삼고, 향후 에노가 외세의 위협을 받을 때 잉글랜드군이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다. 로저와 이자벨은 이에 동의했고, 에드워드 왕자와 필리파의 약혼을 주선했다.

이렇게 에노 백작과 손잡은 뒤, 로저와 이자벨은 침공 준비에 착수하면서 에드워드 2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연인 관계는 유럽 각지에 널리 알려졌고, 교황 요한 22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에게 더 이상 두 사람에게 망명지를 제공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샤를 4세는 교회와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마지 못해 순종했지만, 두 사람이 프랑스를 떠나 에노로 갔다는 사실을 에드워드 2세에게 알리지 않았다. 1326년 9월 22일, 로저와 이자벨은 기욤 1세가 제공한 8척의 군함에 소규모 병력을 싣고 도르드레흐트에서 출항했다. 1326년 9월 26일 이스트 앵글리아의 오웰호 어귀에 상륙했고, 잉글랜드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서신을 잇따라 보내 왕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함께할 것을 촉구했으며, 런던 당국과 서신을 교환했다.

노퍽 백작과 여러 주교들은 재빨리 로저와 이자벨 편에 섰고, 두 사람의 군대가 던스터블에 도착했을 때 랭커스터 백작이 합류했다. 켄터베리 대주교 레이놀즈는 9월 30일 런던에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런던 시민들이 격분해 봉기를 일으켰고, 에드워드 2세, 휴 디스펜서, 레이놀즈는 10월 2일에 런던에서 도주했다. 10월 6일, 이자벨은 런던 시민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체포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0월 15일, 런던 시청에서 열린 회의에서 스태이플던 주교가 이자벨의 적으로 선언되었다. 스태이플던 주교는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체포된 뒤 참수되었다. 10월 16일, 런던 탑 순경은 로저 모티머의 두 아들을 포함한 모든 죄수를 석방하고 요새의 열쇠를 주었고, 당시 탑에 있었던 에드워드의 형제 존이 런던 탑 순경으로 선포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런던에서 탈출한 뒤 사우스 웨일스로 도주하려 했지만 11월 16일 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체포되었다. 휴 디스펜서 더 엘더와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은 그 전에 체포된 뒤 기사 재판 후 처형되었으며, 두 사람의 재산은 압류되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에게 양도되었다. 잉글랜드 총리 로버트 발독도 체포된 뒤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에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옥사했다. 로저와 이자벨 측은 에드워드 2세가 왕국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했다며, 에드워드 왕자를 '왕의 이름과 권리'로 왕국의 관리인으로 선포했다. 에드워드 2세는 포로 신분인 채 몬머스 성에 감금되었다가 12월 5일 레스터 백작 소유의 케닐워스 성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아들에게 국왕의 인장을 넘기라는 압박에 시달린 끝에 11월 20일에 1309년 프랑스로 떠날 때 만들었던 인장을 넘겼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제 막 14세가 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통치가 가능한 나이였다. 그러나 이자벨 왕비는 공식적으로 아들과 권력을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받았으며, 1327년 1월 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소집된 의회에 소환된 남작들의 명단 맨 위에는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가 자리잡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1327년 1월 초 런던에 도착했다. 1월 13일, 잉글랜드 남작들은 런던의 길드홀에서 휴 디스펜서 부자의 잔당들에 맞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지키고, 현 의회에서 통과된 조례를 지키며, 런던 시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같은 날 런던 의회에서, 로저는 영주들이 에드워드 2세를 폐위하고 에드워드 왕자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되기로 결의했다고 선언했다. 이 무렵 에드워드 왕자 편으로 돌아선 레이놀즈 대주교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에드워드 2세의 나약함과 무능함, 사악한 조언을 분별없이 들어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에서 영토를 잃은 것을 비난하며,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하십시오!"라는 세 번의 외침으로 레이놀즈 대주교의 발언을 환영했다.

1327년 1월 20~21일, 대표단이 에드워드 2세가 갇혀있던 케닐워스 성에 도착해 에드워드 2세에게 의회가 그의 폐위를 결의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만일 그가 왕위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와 그의 아들들을 모두 거부하고 왕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임명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에드워드 2세는 로저가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해 협박에 굴복하고 에드워드 왕자가 그의 후계자가 되면 자발적으로 왕위를 사임하겠다고 동의했다. 1월 24일 에드워드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고, 다음날인 1월 25일부터 에드워드 왕자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로서 공식 문서에 등장했다.

1327년 2월 1일, 에드워드 3세는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레이놀즈 대주교의 주관하에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도유식을 거행했다. 이후 국왕을 보조하고 국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의회는 4명의 주교, 4명의 백작, 6명의 남작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임해 모든 중요한 정책을 주관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이자벨과 로저에게 있었고, 위원회의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었다. 이자벨은 아들에 대한 영향력과 접근권을 통제했으며, 로저는 공식적으로는 주요 공직을 맡지 않고 왕실 추밀원 의원도 아니었지만 이자벨의 측근으로서 회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4. 잉글랜드 최강의 권신

로저와 이자벨은 에드워드 2세를 반대했다가 탄압받은 인사들을 복권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휴 디스펜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반역자로 규탄되었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토머스가 잃어버렸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돌려줬다. 로저 본인도 복권되었고, 처크의 제1대 모티머 남작이자 자신의 삼촌인 로저 모티머로부터 영지를 물려받은 것을 시작으로 웨일스에서 영지를 계속 늘려갔고, 1328년 9월 자신의 영지를 총괄하여 초대 마치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자벨 역시 에드워드 2세에게 몰수되었던 모든 영지를 반환받았고, 다른 토지들도 계속 양도받은 결과 20,000파운드에 달하는 수입을 매년 챙김으로서 잉글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토지 소유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로저와 이자벨은 에드워드 2세가 복위를 시도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던 1327년 9월 에드워드 2세를 구출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즉시 조치를 내렸다. 1327년 9월 23일 밤,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아버지가 이틀 전에 "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로저의 지시에 따라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현대 학자들도 이자벨과 로저가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에드워드 2세의 유해는 12월 20일 글로스터에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렇듯 로저와 이자벨이 재산을 계속 늘려가며 권세를 누렸던 반면,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 왕비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자벨과 모티머는 왕실 재정을 통제하면서, 어린 왕과 왕비의 지출을 일일이 간섭해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자벨은 잉글랜드 'Queen consort(왕비)' 직함을 독점하길 희망해, 필리파의 왕비 대관식을 가능한 한 미뤘다. 필리파의 대관식은 1330년 2월 18일이 되어서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는데, 당시 그녀는 흑태자 에드워드를 임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필리파는 잉글랜드에 온 이래 어떠한 토지도 수여받지 못했고, 독립적인 수입도 얻지 못했으며, 왕실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로저와 이자벨은 처음엔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2세의 정책을 고수해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 왕국의 북부 지역으로 간주했다. 1327년 봄, 왕실군이 노섬벌랜드 일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북상했다. 왕실군의 공식 사령관은 에드워드 3세였지만, 실질적인 지휘관은 로저였다. 에드워드 3세는 5월 말에 요크에 도착한 뒤 6월 내내 그곳에서 보내면서 시장, 마을 사람들, 수도원장들의 접견을 받았다. 7월 초, 로저가 이끄는 왕실군이 요크에서 출진해 더럼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8월 3일 또는 4일 밤에 스탠호프 인근의 웨어 계곡에서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와해되었다. 당시 원정군에 동행하던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하마터면 잡힐 뻔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제임스 더글러스가 "더글러스!"라고 외치며 곧장 잉글랜드 숙영지 중앙 지점으로 달려가서 왕실 텐트의 밧줄 몇 개를 잘라내는 바람에 텐트가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에드워드 3세는 한참 동안 그곳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구조되었다고 한다. 로저는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했지만 사기가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다고 보고 철수했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에드워드 3세가 원정 실패에 너무 격분해 철군하는 내내 울었다고 밝혔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은 북부 잉글랜드에 활개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실은 북부 잉글랜드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 지출은 7만 파운드였는데, 그중 41,000파운드가 용병에게 지급되었다. 반면 잉글랜드 정부의 연간 수입은 30,000 파운드였고, 수입을 제외한 지출액은 빚으로 충당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당국은 1327년 9월 중순 링컨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을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동산의 1/20를 직접세로 거두기로 했다. 그러나 로저와 이자벨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일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고, 1328년 5월 1일 노샘프턴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와 그의 후손들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두 왕국 사이의 국경은 스코틀랜드 전임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치세 말년 때의 국경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인 6살된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어린 아들인 데이비드 사이의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북부 잉글랜드를 황폐화한 것에 대해 2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1328년 12월, 랭커스터 백작 헨리가 에드워드 3세의 삼촌인 초대 노퍽 백작 토머스 브라더튼,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와 함께 에드워드 2세를 살해한 권신 로저를 성토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로저는 12월 29일 랭커스터 백작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이끌고 레스터셔로 진군해 랭거스터 가문의 모든 영지를 황폐화했다. 헨리는 이에 저항하기 위해 베드퍼드에서 장병들을 소집했지만, 토머스 브라더튼과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지원하러 오지 않았다. 결국 랭커스터의 헨리는 로저에게 항복했고, 로저는 11,0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토머스 브라더튼,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등 다른 주요 추종자들도 반란에 참가한 것에 대해 벌금을 부과받았다. 휴 디스펜서가 반란을 일으켰던 귀족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온건한 조치였다.

1329년 8월, 위그모어 성에서 장엄한 원탁 토너먼트가 개최되었다. 로저는 이 행사에서 아서 왕으로 참여했고, 이로 인해 그가 장차 잉글랜드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무렵,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자신의 형인 에드워드 2세가 아직 살아 있으며 코프 성에 있다는 소문을 믿고, 시종인 보도 드 바요와 존 데버리에게 에드워드 2세에게 전할 편지를 맡겼다. 그는 이 서신에서 에드워드 2세를 탈옥시킨 뒤 복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시종의 정체는 로저의 스파이였고, 자연히 로저에게 그 서신이 전해졌다. 1330년 3월,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윈체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다가 에드워드 3세를 전복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로저는 이번에는 봐주지 않기로 마음먹고, 1330년 3월 19일에 사형에 처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왕족이었던 그를 곧바로 처형한 일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죽기 전에 요크 대주교와 런던 주교를 포함해 40명이 넘는 공모자의 이름을 명시한 고백서를 작성했다. 그들 대부분은 목숨을 걸고 잉글랜드를 탈출했고, 그들의 재산은 압류되어 로저와 측근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2.5. 최후

로저는 랭커스터 백작 헨리의 반란 이후 에드워드 3세가 혹여 이 반란에 연루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귀족들이 에드워드 3세에게 접근해 모종의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에드워드 3세 주변에 스파이를 숨겨놓고 모든 행적을 감시하게 했다. 에드워드 3세는 로저가 활개치는 웨스트민스터와 런던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깊은 반감을 품고 왕권을 되찾기 위한 정변을 준비했다. 1329년 말 또는 1330년 초, 에드워드 3세는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몬타구에게 서신을 맡겨 교황 요한 22세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는 손글씨로 "pater sancte"(거룩한 아버지)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황에게 자신이 권력을 되찾는 걸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로저 모티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젊은 귀족들을 대거 끌어들여 장차 쿠데타를 일으킬 시기를 노렸다.

1330년 10월, 모티머와 이자벨이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위험해진 가스코뉴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가 열릴 에정인 노팅엄 성으로 이동했다. 에드워드 3세는 노팅엄 성에서 거사를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그곳으로 향했지만, 모티머로부터 4명의 하인만 대동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그는 친구들과 상황을 논의했고, 그들 중 한 명인 윌리엄 몬타구는 즉시 거사를 단행하자고 촉구했다. 얼마 후 도시에 도착한 랭커스터 백작은 에드워드 3세에게 병력을 제공하면서 그들의 계획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저는 스파이들로부터 왕의 동료들이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왕과 그의 추종자 5명을 심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거사를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파일:로저 모티머의 체포.jpg
로저 모티머의 체포.

1330년 10월 19일, 에드워드 3세와 수행원들은 노팅엄 성을 떠났다. 그날 밤 최소 1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공모자들이 지하 통로를 통해 요새로 들어왔다. 요새의 모든 복도와 통로의 구조를 완벽하게 알고 있던 노팅엄 성주 윌리엄 앨런드는 터널의 비밀 문을 잠그지 않았고, 공모자들에게 어둠 속에서 길을 보여줬다. 그렇게 성내로 들어간 공모자들은 이자벨이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로저는 이자벨과 한 곳에서 회담을 하고 있었고, 로저의 아들인 에드먼드와 제프리, 링컨 주교 헨리 베르거쉬, 기사 사이먼 베레스포드, 휴 터핑턴도 거기에 있었다. 방에 침입한 공모자들은 즉시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로저는 검을 가지러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지만 얼마 안가 제압되었다. 베르거쉬 주교는 변소를 통해 탈출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를 그곳에서 끌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자벨은 문가에 서서 동료들 뒤에 있었던 아들에게 외쳤다.
"에드워드! 선량한 모티머를 살려다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는 아침이 되자 국가를 자신의 손으로 장악했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한 뒤 1330년 11월 26일 웨스트민스터 의회를 소집한 후 로저를 "왕권과 정부를 찬탈하고 왕의 재산을 강탈"한 혐의로 기소했다. 로저는 변호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채 유죄 판결을 받고 1330년 11월 29일 타이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만 반역자의 시신을 여러 개로 잘라서 여러 도시에 보내던 관례를 따르지 않고, 유해를 런던에 온전히 묻었다가 코벤트리에 이장했다. 12월 24일에는 사이먼 베레스포드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잉글랜드를 탈출한 로저의 추종자 다섯 명은 에드워드 2세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궐석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이자 로저의 애인이었던 이자벨은 버크햄스테드 성에 이송되었다가 1332년까지 윈저 성에 갇혔고, 다시 노퍽의 캐슬 라이징으로 보내져 수년간 가택 연금되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3세가 그녀와 화해하면서, 특권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 후 이자벨은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가 낳은 첫 아이인 흑태자 에드워드를 무척 사랑해 종종 궁정에 찾아와서 어린 에드워드와 놀아주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로저 모티머의 장남 에드먼드 모티머는 1331년 11월 20일 모티머 남작에 선임되었으며, 또다른 아들 제프리도 1331년에 사면되어 잉글랜드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있는 어머니의 재산 중 일부를 돌려받는 걸 허락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사후 증손자인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친손녀 필리파 플랜태저넷[8]과 결혼하면서 로저 모티머와 에드워드 3세는 사돈 관계로 엮이게 되었다.

3. 가족

3.1. 아내

3.2. 자녀



[1]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을 정면으로 묘사한 15세기 삽화.[2] 제2대 베르됭 남작 티보 드 베르됭의 부인[3] 요크 민스터 재무관[4] 신부[5] 수녀[6] 수녀[7] 초대 오들리 남작 휴 오들리의 부인[8] 에드워드 3세의 차남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